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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희생양 모티브와 복수극으로 빚은 운명 비극-<킬링 디어>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희생양 모티브와 복수극으로 빚은 운명 비극-<킬링 디어>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2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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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2018)는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연작은 아가멤논의 맏딸인 이피게네이아의 운명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이피게네이아는 트로이로 출정하는 그리스군 총사령관인 아버지 아가멤논의 결정에 의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하지만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 여신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란티모스 감독은 전작인 <더 랍스터>(The Lobster‧2015)에서 신화적인 상상력과 사냥 모티브로 주목 받았는데, <킬링 디어>에서도 그리스 신화, 희생양, 사냥 모티브를 흥미롭게 결합하고 있다. <킬링 디어>는 제70회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 이피게네이아의 운명은 두 사건이 실타래처럼 얽힌 결과다. 먼저 숙모인 헬레네의 일탈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파리스의 사과’ 에피소드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가장 아름다운 인간 여인이라고 지목했던 그 헬레네다.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이자 양치기인 파리스와 야반도주를 하고, 남편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에 선전포고를 하고,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공격하기 위해 아울리스 항에 집결한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배경 스토리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바람이 불지 않아서 출항하지 못한다. 이때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탁이 전해진다. 아가멤논의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면 바람이 불게 해주겠다는 내용이다.

왜 이피게네이아일까? 아르테미스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지목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가멤논이 사냥을 하면서 아르테미스의 성스러운 암사슴을 죽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히 사냥의 여신의 암사슴을 죽이다니.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아가멤논의 이 행동(실수)이 딸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피게네이아는 순결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다. 아버지와 그리스 군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 제물이 되겠노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르테미스는 극적인 순간에 이피게네이아를 구한다. 사제의 칼이 이피게네이아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에 암사슴을 대체 희생물로 보낸다. 살아난 이피게네이아는 이방인의 땅 타우리케로 가고, 그곳에서 신전을 지키면서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제물을 관리한다.

 

<킬링 디어>에서도 아버지의 행동이 가족의 영혼을 짓누르며, 그들의 운명을 가른다. 외과의사인 스티븐(콜린 파웰)은 가벼운 음주 후 수술을 하다가 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마취과 의사는 가벼운 음주 수술은 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 후에 죽은 남자의 아들 마틴(배리 케오간)이 스티븐을 찾아오고, 스티븐이 마틴의 올가미에 걸려 버둥거리면서 영화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 아가멤논이 희생양이 아니듯, <킬링 디어>에서도 진짜 희생양은 스티븐이 아니다. <킬링 디어>의 원제 <The Killing of a Sacred Deer>에 나타나 있듯이, 제물(희생양)은 순결하고 신성해야 한다. 스티븐의 딸 킴과 아들 밥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인물이다. 그리고 “가족들의 사지가 마비될 것이고, 다음엔 거식증에 걸릴 것이며, 눈에서 피를 흘리다 죽을 것”이라는 마틴의 경고는 현실이 된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세 사람 모두 죽는다.”라고 말한다. 마틴의 요구는 아르테미스의 신탁과 같은 역할을 한다.

스티븐의 가혹한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아내, 딸, 아들. 이 세 명 중에서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인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아내인 안나(니콜 키드먼)는 그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순결한 킴과 밥이 남는다. 실제로 그들은 다리 마비와 거식증으로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다. 이때 킴이 이피게네이아로 등장한다. 가족을 위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겠다고 말한다. 킴은 희생양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막 초경을 한 나이이며, 음악을 좋아하는 순결한 영혼과 육체를 지니고 있다. 이 장면에서 <킬링 디어>는 신화의 서사를 살짝 변형한다. 킴이 아니라 남동생 밥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희생양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피게네이아가 제단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것처럼 킴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다. 킴과 마틴의 (유사)연인 관계, 밥이 가족 중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킬링 디어>에서 마틴이 어떻게 주술사의 능력을 발휘하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스티븐에게 신적인 존재이니까. 어찌 됐든 마틴은 복수의 화신이자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다. 또한 스티븐과 그 가족을 노리는 집요한 사냥꾼이다. 마틴은 자신의 사냥을 ‘정의’라고 규정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스티븐 때문에 죽었으니, 그와 똑같이 스티븐의 가족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조항을 그대로 적용한다. 신화에서는 트로이 원정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이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리고 클리타임네스트라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킬링 디어>에서 스티븐과 안나는 살아남지만, 그들이 행복할 리는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한평생 원죄 의식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이 죄의식이 육체의 죽음보다 더 가혹한 복수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마틴은 때로 신적인 존재처럼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 초반의 시점 쇼트를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란티모스 감독은 스티븐을 자주 시점 쇼트로 촬영하고, 카메라의 교묘한 움직임을 통해 그가 누군가의 시선 안에 갇혀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스티븐의 영혼이 마틴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아가멤논의 운명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손아귀에 있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마틴은 심판관의 역할도 수행한다. 안나가 마틴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킬링 디어>에서 스티븐은 시종일관 무기력하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 같다. 그는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으로 마틴보다 월등한데도 마틴의 덫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기껏해야 마틴을 포박해 지하실에 가두는 정도다.

 

마틴의 복수는 스티븐의 아들 밥이 희생양으로 바쳐진 이후에, 마틴이 그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끝난다. “제 가족을 죽이셨으니 선생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겠죠?”라는 마틴의 선언은 현실이 된다. 그렇다면 마틴의 말대로 정의는 구현된 것일까? 밥의 죽음은 정의의 증거일까? 그런데 <킬링 디어>의 진짜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 사적인 복수의 정당성 혹은 사회적 처벌의 당위성 여부보다 마틴의 복수의 연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티븐의 가족인 안나, 킴, 밥은 순수한 마음으로 손님인 그를 환대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는 이피게네이아가 동생 오레스테스와 함께 타우리케를 탈출해 고향 이타카에 돌아온다. <킬링 디어>에서는 어린 밥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가 신화보다 더 냉혹하다.

마틴의 행위는 외형상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처럽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마틴과 아버지의 관계는 특별히 비중 있게 설명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는 쇼트도 없다. 마틴은 스파게티 먹는 방법이 아버지와 똑같다고 말한다(이는 친척들이 그렇다고 전해준 내용에 불과하다. 즉,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부자관계의 친밀함을 드러내려는 그 행위의 유사성도 사실은 누구나 스파게티를 먹는 방법일 뿐이다. 일종의 ‘발가락이 닮았다’와 같은 발상이다. 하지만 마틴은 집요하다. 그는 엄마가 스티븐을 성적으로 유혹한 행동조차 스티븐을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한다. 마틴이 엄마의 유혹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면, 더욱 소름끼치는 일이다. 마틴은 담배를 갓 배운 10대 후반의 소년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냥이라는 외피를 두른 마틴의 복수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란티모스 감독이 <더 랍스터>에서 대조적인 두 세계를 통해 사랑이라는 인간 본능을 탐구했다고 정리한다면, <킬링 디어>에서는 그리스 비극의 희생양 모티브를 빌려 복수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탐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신화는 인간의 무의식 혹은 본능을 설명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킬링 디어>는 그리스 비극의 희생양 및 사냥 모티브를 활용해 인간의 본능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단지 마틴의 복수 본능에 불을 댕긴 계기였을 뿐이다. 신화에서는 암사슴을 잃은 아르테미스의 복수가 물결처럼 번져 나가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죽음을 불러오고, 이피게네이아와 동생 오레스테스는 험악한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야 했다. <킬링 디어>에서는 마틴의 복수심이 스티븐의 가족을 검은 연기처럼 휩싸고, 그 복수심은 어린 밥을 희생양으로 삼킨 뒤에야 잦아든다. 밥의 부재를 확인시킨 뒤 식당을 빠져나가는 스티븐 가족을 빤히 쳐다보는 마틴의 시선은 그래서 더욱 두렵다. 아가멤논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티븐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이 모든 비극의 씨앗이니, 게다가 마틴의 사냥은 한낱 놀이였을 수 있으니,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로 한 <킬링 디어>를 21세기의 운명 비극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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