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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빠른 시간의 속도와 더딘 시선의 속도-<작가 미상>
[김희경의 문화톡톡] 빠른 시간의 속도와 더딘 시선의 속도-<작가 미상>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0.04.27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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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시야는 더디게 확장된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작가 미상>(2018)에서 쿠르트 바르너트(톰 쉴링)의 몇 년의 시간은 단 몇 분의 짧은 순간으로 그려진다. 때론 몇 초의 쇼트로 표현돼 쿠르트가 인생을 성큼성큼 빠른 보폭으로 걷고 있는 느낌이 든다. 반면 쿠르트의 시야가 열리고 시선이 변하는 것은 계속 지연된다. 시간의 속도에 비해 뒤처지는 인상마저 준다.

영화가 시간과 시선의 변화 속도를 달리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어긋남의 끝에 쿠르트의 시선이 도달한 지점은 어디일까.

 

"눈길 돌리지 마."

영화는 전후 독일의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삶을 그리고 있다. 쿠르트의 소년 시절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담아내며 그의 삶과 시선을 톺아간다.

오프닝은 1937년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에서 시작된다. 카메라에 불쑥 한 얼굴이 등장하는데, 미술관에서 도슨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의 주변엔 설명을 들으려는 관객들이 있다. 어린 쿠르트도 엘리자베스 이모(사스키아 로젠달)의 손을 잡고 이를 듣고 있다.

그런데 그의 해설은 일반 도슨트와 다르다. 작품과 관객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게 하려는 말들로 가득하다. 민족이란 특정 사회적 요소와 가치에 밀착되지 않은 작품들을 평가 절하한다. 카메라는 도슨트의 얼굴과 함께 이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쿠르트의 얼굴을 번갈아 비춘다. 쿠르트의 눈은 그의 말에도 작품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을 방해하고 배제하는 또 다른 시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이모는 그 응시를 응원하고,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을 각인시키는 존재다. 그것은 자신 또한 사회적 충격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쿠르트에게 “눈길 돌리지마. 진실한 건 모두 아름다워”라 조언하는 강인함으로 표출된다.

쿠르트는 엘리자베스 이모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 물론 극단적 억압을 당하는 이모를 위해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눈을 가리는 어머니의 손을 내리고 지켜본다. 그렇게 이모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자리한다. 고개 돌리지 않고 눈 가리지 않으며 응시 했으므로.

 

배제를 위한 배제, 묻어둔 분노

그럼에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온전한 응시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도슨트가 쏟아내는 말의 조각보다 더 커다랗고 날카로운 시대와 사회의 조각들이 곳곳에 박혀 들기 때문이다.

이는 ‘배제를 위한 배제’가 반복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에선 나치즘에 이어 사회주의가 타인을 배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특히 쿠르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이로 인해 육체적·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엘리자베스 이모는 나치즘으로 인해 강제로 피임 수술을 받고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쿠르트의 아버지는 전혀 스스로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나치 당원이 되었음에도 전쟁 이후 그 과거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다.

영화는 가족 두 명의 죽음에도 쿠르트가 격분하거나 절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슬픔과 분노는 시간의 축약과 함께 쓱쓱 지나가는 듯 보인다. 어쩌면 ‘지나간다’는 표현보다 ‘묻어둔다’는 단어가 더 적합할지도.

이후 쿠르트는 그림만 그린다. 처음엔 그냥 간판에 글자를 페인팅하는 일을 하고 있고, 이후엔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는 그림을 그린다. 응시하고 있지만 응시하지 않고 있는 듯한, 그리하여 시대와 사회가 원하는 것에 맞춘 붓질만을 한다.

 

쫓는 응시, 불완전한 응시

하지만 쿠르트는 점차 기존 세계의 틀을 깨고 온전한 응시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첫 걸음은 아내 엘리(폴라 비어)의 아버지 제반트 교수(세바스티안 코치)가 동독을 떠나면서 그와의 거리가 다소 멀어진 덕분에 이뤄진다. 영화에서 제반트는 배제를 위한 배제를 하는 시대와 사회를 상징하는 인물 자체로 기능한다. 제반트는 쿠르트의 엘리자베스 이모의 낙태는 물론 간접적으로 죽음으로 내몬 인물이다. 전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 나치즘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에 도취된 척 하여 상류층으로 남아있다. 제반트에게 시선의 변화는 언제든 가능하며, 또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어떤 상황과 위치에 있든 그의 시선은 오직 남을 배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배제는 가족 안에서도 이뤄진다. 엘리와 교제를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는 쿠르트를 끝내 못마땅하게 여기고,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마저 유전자가 우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지우게 한다. 이 강압적 행위는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임을 내세워 딸 부부를 거짓으로 속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실까지도 쿠르트가 직접적으로 알게 되고 분노하며 대치하는 상황을 보여주진 않는다. 대신 그만의 응시가 응축되고, 그림이란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폭발적으로 표출되게 한다.

쿠르트는 제반트가 자신들을 떠나자 직후 아내와 자신도 동독에서 서독으로 떠나며 새로운 발돋움을 한다. 하지만 이로써 어렵게 이뤄진 쿠르트의 한 차례 시선의 변화는 다소 어색하게 그려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노동자들을 그리던 그는 서독으로 와 이곳에서 유행하고 있는 추상주의 미술을 따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 응시하고 있으나, 그 응시가 온전히 쿠르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번 그저 무언가를 향해 ‘쫓는’ 응시를 하고 있을 뿐이다.

 

종국에 도달한 응시의 대상, ‘나’

쿠르트의 시야가 열리는 순간은 페르텐 교수(올리퍼 마주크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페르텐 교수는 쿠르트의 추상주의 작품을 보더니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자신의 피부로 감각하고, 체화한 것만이 진정한 응시의 대상이며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렇게 쿠르트의 시선은 종국에 닿아야 할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쿠르트 자신이다. “자네는 누구이고, 무엇인가”하는 페르텐 교수의 질문은 그가 점점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계기가 되어준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사진들을 꺼내들기 시작한다. 과거의 사진들은 묘하게 현재 쿠르트가 갖고 있는 사진들과 겹치게 된다. 이를 개별적으로 하나씩 그리던 쿠르트는 급기야 이 시선들을 한 화폭 안에 모두 담아낸다. 자신을 안아주며 함께 세상을 또렷이 응시하던 엘리자베스 이모의 시선, 이를 배제하고 억압하던 제반트의 시선, 그리고 이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던 안락사 정책 책임자의 시선이다.

그는 사진을 화폭에 묘사하면서도 흐릿하게 처리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기억, 시대와 사회의 기억에서 흐릿한 이미지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그림은 강렬하게 각인된다. 우리의 내면을 파고들어 있는 그 기억들과 다시 대면하게 되었으며, 그 기억들이야말로 피부로 감각하고 체화한 것이지 않은가.

영화의 클로징엔 쿠르트가 엘리자베트 이모와 동일한 행동을 하는 쇼트가 담긴다. 버스 여러 대가 동시에 경적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듣고 두 팔을 위로 들어올리며 자신이 깨어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현실에서도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그 흐름 속엔 수많은 억압과 배제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그리하여 온전한 응시는 자꾸만 배제되고 지체된다. 하지만 쿠르트처럼 오롯이 나를 향해 걸어간다면 찬찬히 시야가 열리지 않을까.  

*사진출처:네이버영화

글:김희경(문화평론가)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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