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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살아있다]의 '동시성'에 대하여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살아있다]의 '동시성'에 대하여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0.06.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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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가 있음.

본래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의 특별함은 기괴한 모습이나 분장에서 온다기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다시 말해 죽어있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존재 자체가 전달하는 존재적 부조리를 경험하는 것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 부조리한 존재가 생명력 가득한 움직임을 훌쩍 넘어서는 미친듯한 활력으로 우리에게 돌진해 오면 그 황당함 때문에 우리는 크게 놀라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좀비, 그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줄타기 하면서 우리를 기다리는 어떤 신성의 변주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부조리에 적응해버린 우리를 놀래기 위해서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무능한 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 [#살아있다]는 이런 식의 이해를 갖고 보게 되면 부조리로 가득한 우리의 진짜 삶의 의미를 깨닫길 바라는 소격효과 가득한 연극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영화[#살아있다]는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기운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주인공 오준우(유아인)를 '주인공이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아파트 단지 사람들을 죽이고야 마는 해괴한 의식과도 같은 전략만을 노출시킨다. 김유빈(박신혜)이 살아남아있던 상황은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기까지 한다. 결국 삶의 부조리한 실체를 겨냥할 수도 있었던 이 영화는 주인공이 확실히 존재하는 웹툰식 대서사극의 클리쉐로 함몰돼버린다. 영화는 결국 오준우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렇다. 오준우가 자고 있던 사이에 좀비들이 창궐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느 일상과 다름없이 생활한다. 그 순간 일면식도 없는 청년이 뛰어 들어와 마치 자느라 몰랐을 상황과 좀비로 변하게 될 때의 증상들을 친절하게 설명이라도 해주는 듯 모든 정보를 주고 밖으로 내쫓긴다. 준우는 당황스러웠으나 그를 통해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적절히 대처할 여러 전략을 고민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준우가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에 빛을 발한다. 김유빈의 도움 역시 그런 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도움은 신의 구원 같다기보다 준우를 살리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아파트 단지로 대표되는 현실적 삶의 구현이 가진 의미는 전부 퇴색하고 만다. 특히 이런 아파트 구조는 실제 삶을 드러내듯이 서사적 구조의 연쇄보다는 '동시성', 즉 동시적 사건을 표현하는 것에 장점을 보일 수 있었는데 이 역시 포착해 내지 못한다. 예컨대 준우의 시점은 아파트 단지에서 만큼은 일인칭 시점의 답답함이 아니라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기술(description)이 될 수 있었다. 아파트의 구조와 복도는 핏자국의 ‘나열’보다 소리(감각적 사실들) 등의 ‘동시성’을 더욱 긴장감 있게 포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바로 아래 포스터 이미지가 사건의 동시성, 감각(소리)의 동시성을 잘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의 준우 시점 장면들은 그의 감정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동시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이런 동시성의 장점을 살려내지 못한다. 이런 일련의 실망감은 마지막 구조헬기의 등장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아니, 사실 백번을 양보한다고 해도 우리나라 아파트 방음기술이 헬기 소음을 완벽히 차단할 만큼은 아니지 않나. 마지막 구조 헬기는 그렇게 납득하기 어렵게 등장하고 좁은 단지에 밀집된 좀비는 준우의 등장에만 요란하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이런 감각의 동시성을 탁월하게 포착할 수 있는 배우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의 능력을 조금도 담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실수는 급기야 외로움인지 가족 죽음의 슬픔 때문인지 모를 유아인의 절규를 의미 없이 소모해버리고 박신혜의 그 절박한 눈빛마저 그 어떤 것으로도 은유해 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건의 동시성의 묘사는 세심한 감각적 사실들로 엮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결국 이 영화 [#살아있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존재로서의 ‘좀비’와 사건의 동시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 그리고 그 동시성을 감각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한 배우들을 가졌으면서도 이상하리마치 순간순간 클리쉐를 개입시켜 실질적인 삶과 연결된 어떤 영화적 힘을 허무하게 희석시켜 버리고 만다. 이 영화는 자신의 역량을 그렇게 망각해 가다가 결국 B급 좀비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해쉬태그'의 의미가 삶과 직결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이 영화 [#살아있다]를 응원한다. 영화를 원망할 하등의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6월24일 개봉)

 

#살아있다 #한국영화파이팅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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