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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길을 잃고 대신 세상을 얻은 소년의 이야기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My Friend's Home>(1987)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길을 잃고 대신 세상을 얻은 소년의 이야기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My Friend's Home>(1987)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8.1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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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00년의 역사를 새롭게 여는 차세대 영화의 시작이라고 평론가들의 입에 침이 마르지않았던 영화.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My Friend's Home>(1987). 그러나 이 영화는 까닭도 없이 평론가들의 호들갑에서 시작하여 호들갑으로만 끝날 그런 영화는 아니다. 몇 가지 점에서 이 영화는 중요하다.

첫째, 이 영화가 헐리우드같은 상업적 풍토라면 꿈꿀 수 조차 없는 영화라는 점이다. 이란이라는 나라의 특이한 배경아래서 제작된 이러한 저예산 독립영화는 지나치게 상업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독립적’이다. 단 두 명의 친구 아마드와 네마자데간의 보이지 않는 우정을 그린 이 영화는 어린 꼬마 혼자 영화를 다 끌어나간다. 헐리우드라는 괴물은 전 세계 영화를 천편일률화시킨다.

모든 영화는 극단적이고 말초적인 오락으로! 헐리우드의 깃발은 전 세계를 뒤덥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보며 감탄하는 영화는 특수효과로 치장된 요란한 공상과학 영화거나 황당하고 잔인한 모험영화들 뿐이다. 영화는 오직 그러한 것일 뿐인가. 이런 회의에 답하는 영화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상업성은 감독의 상상력 마저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이란 영화와 그 영화의 주역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그리고 그의 대표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 영화는 헐리우드와 대적하기 위한 그런 영화가 아니라 영화 본연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예술가의 자세를 갖는 영화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진정한 감동을 보여주는데 그 감동의 원천은 꾸미지 않은 일상성과 현실성에서 찿는다.

두 번째로 이 영화에서 놀라운 점은 영화가 자본이나 기술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아이디어로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새삼스럽지만 구현하기 어려운 점을 증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엔 스토리텔링의 기교나 도피적이고 감각적이며 현란한 촬영, 미쟝센이 보이지 않는다. 자본이 없어 영화를 잘 못찍겠다는 핑계도 없다. 영화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영화는 첫째도 아이디어, 두 번째도 아이디어, 오직 아이디어만이 그 전부인 것이다.

 

현실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허구적인 드라마를 허구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 인물의 드라마 공간을 확대시켜 인물이 환경속에 던져져 있고 끊임없이 ‘일’을 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일하는 인간의 묘사는 곧 인간의 조건을 말하는 주제의식을 설명해준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마드는 갑자기 친구인 나마자데의 공책을 자신이 잘못 가져옴으로서 그 공책을 빨리 나마자데에게 돌려줘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상황은 그를 목적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 어머니, 할머니는 그에게 끝없이 집안일을 시킨다. 할아버지는 일부러 없던 일을 만들기까지 해서 마치 그를 ‘부려먹음(?)’으로서 그것이 바로 손자의 인간교육을 시키는 것이라고 자랑스러워 하기도 한다. 애를 이층에서 내려 요람에 눕혀라. 끓는 물에 설탕 두덩어리를 넣어라. 빵을 사와라. 담배를 사와라. 그의 목적을 가로막는 일들의 연속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늘상 하는 일들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대로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가 일하는 공간에서는 계속 애 우는 소리와 거리의 소음, 닭소리, 가축소리 들이 간섭한다. 그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머리속은 오직 나마자데를 만나 공책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일념 뿐이지만 그는 복잡한 관계속에 놓여져 있다. 그건 그의 순수한 책임, 열정과는 무관한 객관적 현실이다. 그리고 또한 타락하고 타협적인 어른들의 세계인 것이다.

카메라는 이러한 공간을 짧은 컷트의 나열이 아닌 긴 흐름으로(롱테이크) 찍어나간다. 그의 시간과 공간은 현실과 일치되며 우린 허구가 아닌 일상의 진리를 목격하는 관찰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아마드는 이 영화의 특수한 원맨 히어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오직 그 하나만을 중심으로 끌어져 나간다. 그러나 그의 각별한 인생이 특별히 강조되는 원맨 히어로 영화의 허구가 아닌 것이다. 주인공이 중심화되더라도 허황된 영웅을 만들지 않는 것. 그 비결이 바로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비법인 것이다.

 

착한 사람은 길을 헤맨다

소년 아마드는 객관적 세계의 진리를 믿는 순수한 인간이다. 그는 선생님의 말을 믿는다. 숙제를 노트에 해오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나마자데는 숙제를 할 수가 없다. 바로 나 때문이다. 아마드는 본의 아니게 친구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을 생각하고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찿아 헤맨다.

누구도 아마드의 순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공책을 챙기지 못한 칠칠맞은 나마자데는 벌을 받아 마땅해. 어머니는 가혹하게 말한다. 너는 네 숙제만 해라. 네 숙제 하기도 바쁜데 친구 공책 돌려주는 일에 신경 쓸 일이 뭐있냐. 이 세상은 살기 힘들다. 어린이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있다. 나 하나 살기에도 너무나 힘든 비정한 세계가 있다.

아마드는 미로속을 헤맨다. 그는 산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갔던 길을 가고 또 반복해서 간다. 감독이 보여주는 반복의 영상은 기교라면 기교다. 그건 시적 은유이다. 순수한 어린이는 바로 그 순수 때문에 혼탁한 세상에서 길을 잃게끔 되어있다.

그가 만일 길을 올바로 찿아간다면 이미 그는 이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지하고 너무나 세상물정에 어두운 천사같은 아이인 것이다. 그가 길을 헤매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고 물들어야만 하는데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적 삶이 아니라, 친구와의 우정, 다시 말하면 정의며 책임감인 것이다.

문짝을 수리하는 어떤 할아버지는 옛날 나무문이 좋은데도 요즘 사람들이 새로 나온 철문을 선호한다며 세상을 개탄한다. 시골이 싫다고 화려한 도시로 떠난 그 할아버지의 형. 그래도 그는 도시가 싫으며 무엇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를 알고있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마자데를 결국 찿지 못해 자기 방에서 그의 숙제까지 대신 해가는 아마드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장면처리하고 있다. 밖에는 태풍이 불고 그의 방문이 열리면서 아마드는 공포에 질린다.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일은 바로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는 일이다. 마음의 사악한 적들과 싸우는 일이다. 영화의 처음에 어린이들을 가둔 닫힌 문에서 시작한 영화는 아마드의 방문(마음의 문)을 열면서 고통스런 투쟁을 보여주다가, 다음 날 열린 노트의 책갈피에 꽂힌 꽃잎으로 클로즈 업되면서 환희와 의지의 승리를 보여주는 감동으로 끝난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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