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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없는 휴머니즘 —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서평
휴머니즘 없는 휴머니즘 —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서평
  • 신빛나리 (문화평론가)
  • 승인 2021.10.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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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 김은주 외, 갈무리

전통적 의미의 인간성이라는 개념의 변화와 확장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은 일견 같은 주장의 다른 표현형인 것처럼 보인다. 트랜스휴머니스트와 포스트휴머니스트 양자 모두 전통적인 휴머니즘이 내포하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생명보수주의(bioconservatism)를 거부하고, 기술 또는 여타의 다양한 비-인간과의 접합(conjugation) 혹은 보철(prosthetics)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러한 태도의 기저에는 소위 4차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정보혁명 이후의 폭발적인 기술 발전이 인간의 존재 조건을 비가역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인식이 있다. 즉,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실재 환경의 힘에 의해” 인간됨이 의미하는 모든 것들—“삶의 신성함, 행복의 추구, 선택의 자유”와 같은 기초적 가치들 뿐 아니라,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제, 정부, 법, 국가와 같은 기구들”(샤나한, 2018, p.14)—의 형태 역시 바뀔 것이라는 주장에 트랜스휴머니스트와 포스트휴머니스트 모두 동의할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이 분기하는 지점은 ‘트랜스-’와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제거하고 남은 ‘휴머니즘'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정치적 지향성에 있다. ‘탈신체적 인간 역량 강화와 ‘생명연장'을 지지하며 실리콘밸리와 친연성을 갖는 트랜스휴머니즘이 합리성에 근거한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향상’, ‘진보', ‘발전'의 서사를 이어간다면, 구조주의 및 후기구조주의라는 대륙철학의 지적 전통과 친연성을 갖는 포스트휴머니즘은 다양한 기술적 대상들과 인간들 간의 ‘억압’과 ‘소외’없는 ‘정의'로운 ‘공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해방적 휴머니즘의 서사를 이어간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자연 정복과 기계들의 노예화를 정당화"(김재희, 2021, p.26)했던 자유주의 휴머니즘적 주체에 대한 비판을 트랜스휴머니즘에 적용할 수 있다면, ‘개체초월적, 상호결정적 존재들’ 사이의 갈등 관계를 강화하거나 해소하는 ‘주체적 존재'가 애초에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을 포스트휴머니즘의 옹호자들에게 던질수 있는 이유이다.

‘트랜스-’와 ‘포스트-’라는 접두사의 화려함 이외에 이 둘 사이의 대립 관계가 그다지 새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보여준 통찰—반근대적(antimodern) 혹은 탈근대적 (postmodern) 입장은 자연/사회라는 근대적 이분법의 전제를 받아들인 후 이에 기반하여 근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모두 근대적이라는—을 상기시킨다. ‘트랜스-’이든, ‘포스트-’이든, 이들 ‘이후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인지적, 도덕적 자율성을 대전제로 하는 휴머니즘의 기획을 선택적으로 부정하고 계승하면서 끝내 인간 중심성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유한성 이후』에서 지적하였듯이, 우리가 사유의 과감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지 않는 한 데카르트 이후의 서구 사상이 주도해온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근거한 관계주의(correlationism)를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은 이상의 맥락에 대한 일종의 반응이자 비판으로써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이 정직하게 시사하는 것처럼, 책은 ‘디지털'이라는 ‘포스트휴먼'의 삶의 ‘조건’을 ‘디지털-포스트휴먼'으로 연접하여 사유하기를 시도한다. 서문에서 김은주는 이러한 조건을 “디지털 기술이 야기한 매체와 감각의 결합”(김은주 외, 2021, p.5)으로 명명하며, 디지털 매체를 “중개자(intermediary)가 아니라 매개자(mediator)의 역할을 수행”(ibid., p.6)하는 행위자agent로 볼 것을 요청한다. 1부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신체성>의 첫번째 글,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 주체가 될 수 있는가?」는 책의 이러한 의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김재희는 헤일스(Katherine Hayles)로 대표되는 “체현되고 분산된(embodied-distributed) 포스트휴먼 모델"(ibid., p.39)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체현되고 분산된 주체’는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담당했던 주체성의 역할을 신체적 감각운동성으로 전환시켰을 뿐, 여전히 인간 개체의 자기동일성을 그 체현으로부터 보장"(ibid., pp.39-40)받는다고 주장한다. 김재희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개체초월적인 인간-기계 앙상블”(ibid., p.42) 모델을 제안하면서, 시몽동의 사유에서 “존재는 자기 동일적 단일성을 지닌 부동불변의 안정적 실체”가 아니라, “단일성 그 이상이자 동일성 그 이상"인 준안정적인 실재(ibid., p.43)임을 강조한다. “이전 개체화의 결과물들을 연합환경으로 삼아 이전 개체화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새로운 수준에서 해결하는 방식"(ibid., p.45)으로 계속해서 분화하는 준안정적 개체들은, 환경과 “분리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연합되어 있는 환경의 잠재력을 다른 수준으로 운반”(ibid., p.47)한다. 이로 인해 모든 존재는 열린 매체(media)이자 매개자(mediator)가 되어 개체중심주의를 벗어난다. 여기까지의 논의는 무척 흥미롭고 설득력있게 진행된다.

문제는 ‘열린 매체로서의 인간-기계'를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모델로 제시하는 이 글이, “기술이 할 수 있는 것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며 “자연과 인간과 기술의 본래적 관계맺음"을 은폐하는 “종적 이기주의, 정치적 이해관계, 상업적 자본"(ibid., p.58)을 배격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이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에서 ‘진리 정치’라고 부른 것으로의 갑작스러운 도약으로 볼 수 있다. 개체가 애초에 부동불변의 안정적 실체가 아니라면, 자연과 인간과 기술의 ‘본래적' 관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종적 이기주의, 정치적 이해관계, 상업적 자본'은 다른 관계에 비해 ‘덜' 실재적인가? ‘비본질주의적이며 상호결정적인 존재’를 강조하는 글은 아이러니하게도 ‘본래적인 것'과 ‘본래적인 것을 방해하는 것' 사이의 대립 관계를 상정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주장의 타당성을 약화시킨다.

김은주의 「포스트휴먼 신체와 공생의 거주하기: 정동체로서 포스트휴먼 신체」 역시 개별적 개체가 아닌 “개체군으로 존재하는 거주하기의 방식"(ibid., p.93)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김재희의 글과 맥락을 같이한다. 김은주는 해러웨이의 ‘공생(sym-biosis/poiesis)'과 ‘면역(immunity)’ 개념을 이용하여 근대의 주체/객체, 인간/비인간 이분법을 넘어선 ‘함께 공유하는 공간’으로서의 면역계의 경계 재설정을 요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공존, 공생, 공진화—을 받아들이는 것이 포스트휴먼의 거주하기라고 주장한다. 글의 결론에 등장하는 개념들에 대한 개인적인 동의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나에게 미묘한 불편감을 주었는데, 저자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ibid., p.67)의 이행을 지나치게 혁명적인 것으로 강조함으로써, ‘공존, 공생, 공진화’가 존재의 일반적인 양태가 아닌 디지털 포스트휴먼만의 특징인 것처럼 다루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율적 주체됨의 환각"(ibid., p.99)에 얽매일 수 밖에 없었던 근대인과 ‘개체군으로 살기’에 ‘더’ 용이한 환경에 거주하는 포스트휴먼 사이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차이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며, 앞서 언급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의 근본적인 통찰—우리는 한번도 ‘더' 자율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그래서 ‘더' 공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과 양립 불가능한 결론을 도출한다. 근대의 자율성에 가상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공생 개념의 설정은 김은주의 글 또한 하먼이 ‘진리 정치'라고 명명한 것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의 철학적 전제 역할을 하는 1부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신체성>에 포함된 두 글에 드리운 미묘한 진리 정치의 그림자는 이후 2부 <디지털 혼합현실과 사이보그>와 3부 <디지털 감각의 변화와 포스트휴먼 윤리>에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웹소설의 한 장르인 ‘혼합현실서사’(유인혁, 「한국 혼합현실 서사에 나타난 ‘디지털 사이보그' 표상 연구: 웹소설을 중심으로」), 윤이형의 SF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사이보그(이양숙,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대의 호모데우스와 사이보그 글쓰기」), 워마드를 위시한 디지털 페미니즘의 역설적인 폐쇄화(이현재, 「디지털 도시화와 사이보그 페미니즘 정치 분석: 인정투쟁의 관점에서 본 폐쇄적 장소의 정치와 상상계적 정체성 정치」), 가짜뉴스(fake news)와 혐오표현(hate speech)과 같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 상의 디지털 쓰레기들을 양산하는 기술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성(홍남희, 「디지털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 플랫폼, 개인, 그리고 디지털 쓰레기」), 탈진실-단속-비대면-비접촉 시대의 기술-사회적 감각 밀도의 변화(이광석, 「감영병 재앙 시대 포스트휴먼의 조건: 인터넷과 사회적 감각 밀도의 공진화」) 등 흥미진진하고 시의적절한 주제어를 종횡무진하는 2부와 3부의 글들은 한국의 디지털 매체 환경에 대한 날카롭고 정밀한 분석을 펼쳐놓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아쉽게 느껴지는데, 이는 진리 정치라는 책의 배경 전제가 ‘디지털 매체’라는 비-인간들의 ‘현실적’ 행위자율성을 오직 특정한 정치적 대립 관계에 관여하는 것으로 축소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사회 관계망 내의 행위자로 규정하고, 반성 능력, 자의식, 자율성, 도덕성과 같은 인격성의 요소를 내적 속성과 관계적 속성의 차원으로 분류하여, 어떻게 인공지능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고찰하는 이중원의 「포스트휴먼과 관계의 인문학」은 이 책에서 진리 정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유일한 글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진지하게’ 비-인간 행위자인 인공지능의 행위자율성과 그 의미에 대해 사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중원이 인공지능의 행위주체성을 긍정하는 방식이 인류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 온, 그러나 근대에 의해서 철저히 전근대적인 것으로 부정당한, 의인화anthropomorphism의 방식을 일정 부분 경유한다는 점이다. 비-인간 존재자인 인공지능과 로봇으로부터 인격성과 비슷한 것을 유추하는 이중원의 의인적 사변은, 메이야수를 위시한 여러 사변적 실재론자들이 주장해온 다다를 수 없는 타자성에 다가가는 방법으로서의 사변의 유용함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기에, 인간성의 프리즘을 완전히 제거한 채로 비-인간적인 것의 윤리를 사유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의인적 사변은 ‘탈-인간중심적 존재론'의 현실 정치-윤리적 적용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현재적 차원의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글 · 신빛나리 (문화평론가)


참고문헌

김은주, 김재희, 유인혁 외. (2021). 『디지털 포스트휴머니즘의 조건』. 갈무리.

Hayles, N. Katherine. (1999). How We Became Posthuman: Virtual Bodies in Cybernetics,

Literature, and Informatics.[『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역. 플래닛. 2013.]

Harman, Graham. (2014).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Political. London: Pluto Press.

[『브뤼노 라투르: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 김효진 역. 갈무리. 2021.]

Latour, Bruno. (1991).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Paris: La Découverte.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역. 갈무리. 2009.]

Quentin, Meillassoux. (2006) Après la finitude : Essai sur la nécessité de la contingence.

Paris: Le Seuil.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 정지은 역. 도서출판b.

2010.]

Shanahan, Murray. (2015). The Technological Singularity. Boston: MIT Press. [『특이점과

초지능』. 성낙현 역. 한울엠플러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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