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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의 문화톡톡] 어둠 속의 눈동자
[이 호의 문화톡톡] 어둠 속의 눈동자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08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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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맨 인 더 다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지 못하고(스스로 가져다 붙인 이유는 빼버리자!), 내가 왜 이런 상황과 시간대 속으로 태어나 이런 장소들을 경유해서 오늘 여기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걸 알 수 없는 한 사람들은 모두 장님이다.(그런 것은 쓸데없는,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별 수는 없다.) 우리는 과거조차 알 수 없고, 원인과 이유도 알지 못하며 앞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인간은 눈 뜬 장님에 다름 아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고, 어디서 와서 왜 살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나 그런 것이 궁금한 존재가 인간이다. 이런 인간 실존의 현존재적 상황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우리는 심연 저편에서 떠올라 심연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그 사이를 인생이라 부른다”고 시적으로 끄적인 적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인식을 통해서 본다. 여하튼 알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인식적으로 장님이라는 것과 동의어다. 안다=본다는 것이 어원적으로 동일한 프랑스어나 그리스 라틴어권에서는 ‘본다’와 ‘안다’는 것이 동일한 것이었다.

 

영화 <맨 인 더 다크> 포스터

내가 상대방과 장기를 두거나 모종의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수가 높거나 똑똑한 사람은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있다. 그건 상대의 수를 읽고 있다(즉 보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상대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으면 머리 속으로 이미 계산하고 있는 것이고 보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안다는 문제는 본다는 단어와 거의 동일하다고 빨리 파악하는 편이 앞으로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안다 이퀄 본다. 오늘의 이 영화 Man in the Dark(원제 Don’t Breath)는 어둠 속에서 ‘보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빛(시선)이 사라진 밤 시간 동안 껌껌한 집 안과 그것도 지하실에서 장님과 벌이는 젊은 청년 세 명이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이들의 게임은 처음부터 불균형스럽다.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온통 불균형으로 가득 차 있고 이 불균형이 또 다른 불균형으로 시소처럼 뒤집혀지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이들은 젊다. 대신에 돈이 없고 가정 형편이 그다지 유복스럽지 못한, 즉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중간지점인 중산층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래서 잡법, 빈집털이범 짓을 일삼으며 뭔가를 기획하는 중이다. 이들과 대립되는 이라크 참전용사 노인은 눈이 먼 장님이다. 대신 돈이 조금 있다. 한 축은 젊고 패거리(공동체)이고 눈이 잘 보이고, 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늙고 철저히 혼자이며, 유폐된 집안에서 장님으로 지내고 있다. 더구나 그는 딸을 불의의 사고로 여윈 채 홀로 지내고 있다. 이쯤 되면 따뜻한 기류와 차가운 기류가 만나 한바탕 소나기가 내릴 상황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 참전용사 늙은이는 왜 눈이 멀게 된 것일까? 그는 왜 불행하게도 하나뿐인 딸을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것일까? (원인Cause은 영화에서 제공되지만 이유Reason은 알 수 없다.) 운명의 여신들이 대체로 눈이 먼 장님이거나 법의 여신이 눈을 가린 것처럼 그의 신체적 눈도 멀어 있고, 그는 자기 집에 침입하려는 사람들의 동기와 숫자, 이유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알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중요한 모티프다. 이 일이 어떻게 결말을 맞게 될지 못한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집중하게 만든다. 관객도 장님인 것이다.

 

영화 <맨 인 더 다크> 장면

이 영화가 이처럼 불균형 혹은 불공평의 문제를 배음으로 깔고 있다는 것은 주인공 여자 록키의 여동생이 뜬금없이 내뱉는 한마디에서도 암시된다. 미시건 주에는 바다가 없다고 말하자 여동생은 “불공평하다”고 불평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바다가 없다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건 어린아이의 투정이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는 섬에 태어나고 누구는 대륙이나 내륙에 태어난다. 그런 말은 록키가 처해 있는 아주 열악한 가정 형편에서도 암시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모든 사람은 각자 이유나 원인도 모르는 채 삶의 가혹한 운명 앞에 혹은 운명의 여신의 장난질 앞에서 철학적 질문을 가지고 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 이 따위 질문을 버리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을 만한 자가 되라”고 운명애를 가르친 니체는 과연 위버멘쉬의 경지에 오른 자라고 말해도 되리라.

이들이 펼쳐 보이는 늙은 용사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게임 역시도 이런 불균형을 바탕으로 벌어지고 있다. 힘의 불균형, 정보의 불균형,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불균형, 집안의 구조를 알고 있는 자와 모르는 자들의 불균형, 그 안에 누가 잡혀 있는지 왜 잡혀 있는지 아는 자와 그것을 모르는 자의 불균형 등등. 금고의 비밀번호를 봄으로써 금고 비밀번호의 불균형이 균형 잡힌다. 이 영화는 앎과 봄의 시소게임, 정보 빈자와 정보 부자의 보기 게임과 같다.

참전 용사의 범행도 사실은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에서 벌어지는 범죄다. 자신의 딸을 죽인 여자애를 붙잡아다가 자신의 새로운 아이를 배게 만들려는 행동 역시도 억울한 불균형을 회복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다. 그러니까 불균형은 고통이며, 이 불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남자는 법과 별도로 자신만의 정의를 실행하려고 하고 있다.

엎치락 뒤치락 이야기의 전개 끝에 록키는 돈가방을 얻어낸다. 참전용사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흥미로운 건 실명한 그의 눈이 완벽한 어둠 속에서는 별빛처럼 빛난다는 것이다) 록키는 밖의 빛 속으로 달아난다. 그리고 비로소 여동생을 데리고 록키는 천사들의 도시, 골드러시의 고장,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에게 따뜻함과 동경의 고장인 LA(즉 구원이 기다리는 서쪽)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하려고 대합실을 가로지른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가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볼)수 있다. 여기서 질문이 발생한다. 이 여자 록키는 과연 돈가방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가? 그녀가 그 곳에서 죽을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거기서 죽어버린 두 남자애는 죽을 짓을 했는가? 아니다. 죽을 짓은 셋이 다 했다. 그렇다면 록키의 가정이 불행하기 때문에 돈가방을 차지하는 균형 회복이 정당화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불행하다면 그들 모두 불행하고(이 영화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나오지 않는다) 특히나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긴 했어도(이 영화에는 모두 범죄자들만 나온다) 남자 역시 불행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왜 돈을 잃어버려야 했는가. 돈을 잃은 대신 범죄로 잡혀가지 않는 것으로 이 세상에 균형(정의)을 찾은 것인가?

 

영화 <맨 인 더 다크> 장면

록키가 돈가방을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 밖에 없다. 그녀는 희망을 했기 때문이다. 서사 내적으로 굳이 이유를 찾아내자면 그렇다. 그녀는 미래와 빛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저런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도 무당벌레 문신을 하면서 동생을 돌보고 범죄짓거리를 하면서도 그녀는 미래에 대한 희망(비록 이곳을 떠나 LA에 가자는 것 뿐이었지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는 행위,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반면 참전 용사는 어떤가. 그는 절망했다. 즉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지 않고 그냥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정의를 실행하려 했다. 자신만의 정의를 실행하기,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범죄라고 부른다.(국가-법은 철저히 사적 복수를 금지하고 있다. 사적 복수의 실행, 그것은 곧 범죄이다.) 그가 어떤 형태의 절망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사가 있다. “신은 없어. 신이 없다고 믿는 남자가 못할 일은 없지.” 즉 그는 어떤 형태로든 초월성을 믿지 않는다. 그가 당한 일 때문이든지, 원래 신심이 없는 사람이든지 그런 건 알 수도 없고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는 무언가를 믿지도 보지도 않으며, 무언가를 희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장님이다. 그는 앞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어둠 속에 있는 남자다. 어둠 속에 있는 것을 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희망이라는 걸 가진 록키가 돈가방을 차지할 근거가 있다면 겨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희망일까?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해변이 있는 곳으로 가, 친동생과 나머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은 보편적인 욕망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주어도 괜찮을까? 시대정신에 입각해 말하자면, 물론이다. 각 개인들이 가진 꿈과 소망과 욕구와 욕망과 요구, 나아가 판타지와 탐욕조차도 개인에게 절실하기만 한다면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 진실함을 뛰어넘어 팩트라는 용어까지도 할당받는 시대에서는 그렇다. 그런 욕망에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지위를 주는 것이 부당하다고 칼질을 하면 꼰대의 훈계질이라고 아닥을 요구받는다. 그러니 그저 영화의 스릴을 즐기고, 간난신고를 뚫고 돈가방을 차지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여자 주인공의 발걸음에서 카타르시스를 맛보면 만사오케이다.

 

 

글 · 이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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