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초에 환웅이 인간으로 변하게 해 준다고 제안했던 건, 곰과 호랑이 그리고 여우였다. 곰과 호랑이는 동굴로 들어갔지만, 여우는 싫다고 거절했다. 쑥과 마늘을 먹고 잘 버틴 곰은 인간이 되었고, 포기한 호랑이는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여우는 웅녀의 부탁과 함께 ‘최초 구슬’을 받고 인간계와 동물계의 균형을 지키는 ‘야호족’이 된다.
<오백 년째 열다섯>(위즈덤하우스 출간) 속 이야기다. 이 작품은 단군 신화와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여기에 오백 년째 열다섯으로 사는 주인공의 비밀스러운 운명을 담은 장편소설이다. 절묘한 설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게, ‘가을’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아이도 어른도 아닌 경계에서 살아가는 청소년이면서, 인간도 동물도 아닌 야호족의 후손이다.
불멸의 삶은 인간이면 누구나 남몰래 꿈꾸는 것이지만, 하필 멈춰진 육체의 시간이 열다섯 살 중2라면 어떨까? 실제로 저자인 김혜정 작가가 십 대 청소년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오백 년째 열다섯인 여자아이 이야기를 쓴다고 했을 때 “열다섯을 일 년 보내는 것도 끔찍한데 오백 년이라니, 주인공에게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1권에서는 인간과 호랑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종(從) 야호가 된 ‘가을’이 자신의 운명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면, 올해 출간된 <오백 년째 열다섯 2 구슬의 무게>에서는 가을이 자신에게 주어진 최초 구슬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야호랑(야호족과 호랑족의 연합체)의 리더로 성장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한국적인 소재가 영리하게 사용된 판타지라고 여겼던 이 작품은, 시리즈가 더해갈수록 청소년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보여주는 잘 만들어진 성장소설로 읽힌다. 주인공 ‘가을’이 처한 상황은 지금 청소년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가을이 최초의 야호에게 받은, 힘의 한계를 알 수 없는 ‘최초 구슬’은 청소년의 거침없는 가능성과 같고, 야호족과 호랑족 모두에게 존재 가치를 의심받는 가을의 불완전함은 이제 막 존재 의미를 묻기 시작하는 청소년의 고뇌와 일맥상통한다.
작가 김혜정은 자신을 이야기 헌터라고 표현하는 타고난 글쟁이다. 공모전만 100여 차례 도전해 떨어졌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작가가 됐다. <다이어트 학교>, <판타스틱걸>, <하이킹 걸즈> 등 십 대 소녀의 성장이야기와 <헌터걸> 등의 판타지로 청소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작가로 알려졌다.
2022 사서들이 뽑은 베스트21선, 2022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사서 추천도서, 책따세 여름방학 추천도서 등 이 책이 받은 수많은 타이틀은 김혜정 작가가 짊어지고 가야 할 작가의 무게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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