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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의 문화톡톡] 지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시리즈<네버 해브 아이 에버Never Have I Ever>(2020)
[이지혜의 문화톡톡] 지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시리즈<네버 해브 아이 에버Never Have I Ever>(2020)
  • 이지혜(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06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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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과 여가 사이를 채우는 OTT콘텐츠 추천(2)

 

하이틴(청춘)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는 불문의 공식이 있다.

 

1. 학교가 배경이다.

2. 둘도 없는 친구(들)가 있다.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다)

3. 급격한 2차 성징과 함께 주인공이 외적 변화를 도모한다.

4. 이성에 관심이 생긴다.

5. 사랑에 빠지기 직전 이들을 방해하는 요소가 등장하며, 둘도 없는 친구들과도 오해가 생긴다.

6. 위기를 이겨내고 우정과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하이틴 시리즈에서 별반 다를 것 없는 소재가 반복된다는 건 그만큼 이런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 (never have i ever)>(2020)는 이런 하이틴 서사를 일부 계승해 넷플릭스에서 론칭한 오리지널 시리즈물이다. 그러나 이 하이틴물에는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다. 2020년대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하이틴 물의 특징이기도 하다. 바로 ‘인종 및 성적 소수자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기존의 서사를 타파하고자 시도’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의 서양 하이틴물의 주인공은 금발의 푸른 눈이었다. 혹은 적어도 남녀주인공 둘 중 한 명은 백인이었다. 그러나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하이틴 시리즈물의 주인공이나 서사는 앞서 말한 불문의 하이틴물 공식을 비틀거나 깨부시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주인공 ‘라라진’은 한국계 미국인 히로인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경우 '하이틴'이라 가능했던 ‘사건’ 뒤에 감춰진 감정을 낱낱이 톺아보는 서사 진행 방식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또한 <반쪽의 이야기>는 성 정체성을 깨우치고 받아들이는 주인공을 그대로 보여주며, <시에라 연애 대작전>에선 보편적으로 청춘물의 히로인이 갖춰야할 이미지와는 다른 캐릭터의 여주인공이 등장해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절대 ~한 적 없어

인도계 미국인 데비는 심장마비로 급사한 아버지 모한의 영혼을 보는 열다섯 살 소녀다. 하프 연주장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공개적으로 목격한 데비는 급작스런 충격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아버지를 잃은 트라우마로 인해 좋아하던 하프 연주도 어렵게 되었지만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친구 그룹의 관심 속에서 빠르게 재활에 성공한다. 그러나 데비가 짝사랑 상대인 '팩스턴'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휠체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학교에서 제일 불우하고 재미없는 애’로 소문이 난 데비는 이제 자신의 이미지를 좀 바꿔보고자 한다. ‘아버지를 잃고, 다리 마비된 재미없는 범생이’에서 ‘학교 최고 핫보이와 섹스하는 쿨녀’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품는다.

아버지 모한의 죽음은 데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큰 계기이자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이 사건을 정식 에피소드가 아닌 1화 파일럿 에피소드에서 단 8분 만에 정리한다. 이후 에피소드나 시즌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데비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아버지 모한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비는 엄마 날리나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계 혼혈 핫가이 팩스턴과 어떻게든 첫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데비는 자꾸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한다. 사고를 겪고 등교한 첫날부터 친구들을 향해 모두 남자 친구를 사귀라고 강요한다.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다니기 시작한 상담센터에서도 아버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자신에게 성적인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만 되묻는다. 현재 데비의 관심은 오로지 스스로에게 붙박힌 오명, 즉 ‘아버지 죽고나서 다리 마비된, 재미없는 인도 여자애’를 떨쳐버리는 것에 있을 뿐이다. 상담센터를 나선 데비는 어릴적부터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유대인 남자애에게 시종일관 싸움을 건다. 이런 데비의 모습을 두고 결국 친구들은 말한다.

 

"너는 변했어"

 

 

ⓒ 넷플릭스 제공
ⓒ 넷플릭스 제공

 

애도일기

진짜 이야기는 여기부터 시작된다. 시리즈물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각각의 소제목을 오프닝 숏에서 명확하게 드러낸다. 번역하자면 ‘절대로 ~ 한 적 없어’라는 제목 아래 ‘그 애와 해본 적 없어’, ‘잘 나가는 애들하고 취해본 적 없어’, ‘강렬한 인도를 느껴본 적 없어’ , ‘전쟁을 도발한 적 없어’ 등의 부제가 뒤따라 화면위로 떠오른다.

이러한 제목들은 철저히 데비의 주관에서 작명된 것이다. 사실 데비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이 하고자 했는데 실패했거나, 자신의 의지로 한 일, 혹은 경험한 것들을 자꾸만 부정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평범한 하이틴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상실에 대해 인정하는 과정, 즉 우리가 지금을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지금껏 말하지 않은 방식, 즉 하이틴의 방식으로 죽음을 애도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일기』를 통해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나아진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라고 고쳐 말한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에서 『애도일기』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데비의 상담사는 정말 말해야 하는 것들을 말하지 않는 그녀에게 <애도일기>를 써보라며 노트 한 권을 내민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 써야만 해소되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데비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애도일기> 첫 장에 팩스턴의 이름을 적는다. 다른 무엇도 아닌 ‘팩스턴과의 섹스’를 문장으로 적어 내려간다. 이 장면 앞에서 바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죽음에서도 기분이 즐거워지는 방심 상태들이 있으나, 그러다가도 갑자기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슬픔에 빠진다는 문장이었다. 격렬한 슬픔을 외면하기 위해 자꾸만 엇나가던 데비는 끝내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며 애도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자꾸만 멀어지는 친구들의 ‘지금’을 받아들이며 한 발자국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절대로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절대로 했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그 마음을 안다.

 

 

 

글·이지혜

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3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A)으로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영화평론가 및 문화평론가로 활동중이다. 대중문화와 기술인문(AI,NFT,메타버스,챗GPT)을 연구하고 있다.

인스타: leehey_cine 이메일: leehe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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