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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적 기록으로 완성한 인디언 레퀴엠-<플라워 킬링 문>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적 기록으로 완성한 인디언 레퀴엠-<플라워 킬링 문>
  • 김희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3.12.1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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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세의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펼쳐온 대서사시엔 다양한 함의가 담겨 있다. 그중 대표적인 특징은 사실주의 작품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과오를 조망해 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갱스 오브 뉴욕>(2002), <아이리시맨>(2019) 등 스코세이지 감독의 주요작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하나의 영화적 기록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실제 작업을 할 때마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진행했으며, 그 견고한 토대 위에 영화를 만들어 왔다.

3시간 26분에 달하는 영화 <플라워 킬링 문>(2023)은 그의 영화적 기록에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 족을 침탈한 백인들의 잔혹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오세이지 족에 대한 공부와 면담을 진행한 것은 물론, 그들의 후예를 영화에 출연시켰다. 그리하여 <플라워 킬링 문>은 영화적 기록으로 완성한 한 곡의 장엄한 인디언 레퀴엠(Requiem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다.

 

증폭되는 인디언 죽음의 잔혹성

 

영화적 기록은 기록 자체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 앞서 영화가 가진 서사의 틀 위에 마땅히 존재하게 된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작품에서도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독보적인 서사를 펼쳐 보이며, 그 기록을 켜켜이 쌓고 남긴다.

<플라워 킬링 문>1920년대 백인 퇴역 군인인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오세이지 족 거주 지역으로 오게 되며 시작된다. 1890년대 오세이지 족의 거주지에선 석유가 발견됐고, 이들은 순식간에 부자가 됐다. 어니스트는 이후 이곳에 정착해 큰 돈을 번 삼촌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과 함께 지내게 된다. 그리고 헤일의 권유로 오세이지 족 가운데서도 부유한 몰리(릴리 글래드스턴)와 결혼한다.

어니스트와 몰리의 결합을 전후로 영화엔 수많은 죽음이 흐르게 된다. 어니스트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이곳엔 오세이지 족 여러 명의 죽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어니스트와 몰리의 결혼 이후엔 더욱 많은 죽음이 발생하는데, 갈수록 손쉬우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같은 변주를 통해 죽음의 잔혹성을 증폭시켜 나간다.

 

스코세이지 영화 세계의 전환점은 몰리로부터

 

죽음의 중심엔 두 남성 캐릭터, 어니스트와 헤일이 있다. 스코세이지 감독 다수의 전작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이들 역시 강렬한 욕망으로 많은 것을 이뤄낸 후 결국 비극에 이른다. 어니스트와 헤일은 그 욕망의 다채로운 형태와 층위를 보여주는 캐릭터로, 함께 절묘한 조합을 이룬다.

어니스트는 평범함 속에 숨겨둔 인간의 악한 본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헤일의 지시를 받아 몰리의 자매들을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낸다. 표면적으로는 헤일의 지시에 좌지우지 되다가, 그 화살의 끝에 결국 자신이 서게 된다는 점에서 순진하고 우매한 캐릭터로만 보인다. 몰리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고, 이에 맞게 행동한다는 점에서 순수함도 가진 인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몰리에게 투여한 인슐린 주사에 헤일이 준 정체 모를 액체를 함께 투약, 몰리의 죽음에 암묵적 동의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악한 본성을 함께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헤일은 그보다 더 큰, 한 사회를 통째로 움직이는 거대한 악의 실체를 상징한다. 그는 각종 기부나 단체 설립과 지원 등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척, 선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어니스트를 조종하며 오세이지 족에 대한 무자비한 행위를 이어간다.

스코세이지 감독 영화 세계의 전환점이자, <플라워 킬링 문>의 전환점은 여성 캐릭터 몰리로부터 마련된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미국 사회의 이면을 다뤄왔음에도, 백인 남성 중심의 서사로만 풀어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가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작품이다. 몰리 캐릭터는 중반까진 사랑과 배신이란 로맨스 서사 위에서 흐른다. 몰리는 어니스트가 돈을 밝히는 남성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의 진심을 믿으며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자신의 자매들이 처참하게 죽어가자 괴로워하고, 병으로 크게 고통받기도 한다. 여기까지 보면 약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 정도로 생각된다. 그러나 수많은 죽음이 일어나자, 몰리는 미국으로 떠나 스스로 이 사건의 해결책을 만들어 간다. 몰리의 미국행의 결과로 FBI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여성 캐릭터를 통해 백인들에 잔혹하게 침탈당해 수없이 짓밟히고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인디언 정신을 표상한다.

 

화면 안에 들어온 감독, 마침내 완성된 레퀴엠

 

<플라워 킬링 문>이 가진 영화적 기록으로서의 의미는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영화엔 흑백 영상이 교차 편집되어 있는데, 그 영상엔 오세이지 족이 오일 머니로 인해 부를 만끽하는 순간이 담겨 있다. 하지만 영광은 흑백 영상처럼 박제된 과거로만 남게 된다.

땅에서 석유가 솟구쳐 오르고, 석유를 시추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번갈아 배치된다. 석유 유전 개발을 둘러싼 탐욕과 폭력 등을 다룬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떠올리게 하는 이 숏들은 인간의 검은 욕망 자체를 상징한다. 처음엔 솟구치는 석유에 환호하던 오세이지 족의 얼굴과 표정은 석유를 뒤집어 쓴채 점점 어둡게 변해 간다.

영화는 클로징에서 돌연 극중극 형태로 바뀌게 된다. 이 지점에서 갑자기 스코세이지 감독은 직접 화면 안에 배치된다. 그는 이 이야기를 전하는 무대 위에 올라서서 몰리의 부고 기사를 그대로 읽은 후, “살인에 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이 영화적 기록 안으로 들어와,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죽음을 암시하며 막을 내린다. 그렇게 스코세이지 감독이 인디언에게 바치는 레퀴엠은 완성되고 울려 퍼진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김희경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한국영화학회 이사, 은평문화재단 이사, 만화평론가로 활동.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예술경영 석사, 영상학 박사.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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