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파멸의 연쇄작용'의 단초를 찾아-<오펜하이머>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파멸의 연쇄작용'의 단초를 찾아-<오펜하이머>
  • 김희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22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견고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그 믿음엔 암묵적 불안이 수반된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확실하지만, 그 진보가 가져올 미래 역시 발전된 모습일까. 오히려 파멸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이 불안은 인류사에서 늘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연결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자국 보호를 명분으로 한 무기 개발 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무분별한 전쟁과 제국주의의 확장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영화는 과학기술을 소재로 할 때, 눈부신 진보와 더불어 불안과 죽음 등을 함께 다뤄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2023)도 그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놀란 감독은 영화에서 ‘파멸의 연쇄작용’이란 말을 활용한다. 주인공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아인슈타인과 나눈 대화에서 나온 표현이다. 특정 과학기술의 진보가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수많은 관련 작용을 일으키고 미래까지 뒤흔들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그리고 놀란 감독은 파멸의 연쇄작용의 단초가 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는 그 연쇄작용의 출발점에서 무엇을 비추고 있는가. 그렇게 시작된 끈질기고도 강력한 연쇄작용에 대해 놀란 감독은 어떤 영화적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가.

 

오펜하이머의 얼굴에서 읽는 불안한 미래

이 작품은 미국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오펜하이머 평전을 원작으로 한 ‘전기(傳記)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에서 이는 하나의 장르적 외형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전기 영화들이 해당 인물의 일생 전반을 두루 다루는 반면, <오펜하이머>는 인물에 관한 많은 요소들을 쉽게 생략해 버린다. 오펜하이머의 태생과 유년 시절에 대해선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가 유학 시절, 자신을 괴롭히는 교수의 사과에 독극물을 집어넣는 극단적인 상황이 그려지지만 이마저도 간단하게 일단락 된다. 이 사건으로 짐작되는 오펜하이머의 파괴적 성향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채 금세 다른 장면으로 전환된다. 그의 대학 강의 모습, 여성들과의 관계가 나오긴 하지만 이는 오펜하이머의 기본적인 정치적 성향, 사생활까지 노출되게 된 과정 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만 활용된다.

 

<오펜하이머>는 대신 두 가지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하나는 오펜하이머의 ‘얼굴’이다. 영화는 홀로 침대에 누워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얼굴과 추상적 이미지가 교차 편집되어 반복적으로 비춰진다. 여기서 추상적 이미지는 천재 물리학자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론, 그 이론이 실천될 때 나타날 현상, 해당 현상들이 세상에 미칠 막대한 파급력까지 계산된 거대한 세계를 표상한다. 이 세계를 상상하는 그의 얼굴엔 희열과 두려움이 교차되어 흐른다.

오펜하이머가 첫 번째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늘 위에서 솟구친 불기둥과 함께 그의 복잡미묘한 얼굴이 번갈아 나온다. 그 얼굴엔 마침내 해냈다는 목표 달성에 대한 안도감과 성취감, 이 실험의 성공이 의미하는 바를 되새기며 스친 불안과 죄책감이 한데 얽히고설켜 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놀란 감독이 중점에 둔 또 다른 부분은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고, 일본에 원자폭탄까지 투하된 이후의 사건들이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대중의 관심이 가장 집중된 것은 ‘핵실험이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였다. 특히 놀란 감독이 컴퓨터그래픽(CG) 없이 핵실험 시퀀스를 촬영한다는 점에 더욱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정작 놀란 감독은 관객의 스펙타클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신 그 실험이 가져올 연쇄작용에 보다 집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원폭 투하 역시 마찬가지다. 놀란 감독은 원폭 투하를 구체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가 연설을 끝내고 나오면서, 울부짖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환각을 보는 것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주요 사건들이 끝난 시점에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머지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간다. 트리니티 실험과 원폭 투하가 이뤄진 이후 진행된 두 개의 청문회에 대한 이야기다. 공산주의자로 몰렸던 오펜하이머에 대한 청문회, 그에게 망신을 당한 후 오랜 시간 복수를 준비했던 미 원자력위원회 창립위원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 대한 청문회다. 두 청문회를 통해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미국에 승리를 가져다주고도 스트로스에 의해 희생양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펜하이머의 이성 관계부터 핵실험 전후에 있었던 일들이 낱낱이 공개되는 모습을 담아낸다. 원폭 투하 이후 가졌던 오펜하이머가 가진 죄책감, 그 죄책감으로 인해 세상의 비난을 계속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파멸의 단초에 담긴 선과 악

그렇다면 오펜하이머의 얼굴, 주요 사건 이후의 청문회 장면 등을 통해 놀란 감독이 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놀란 감독의 목표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서술하거나, 핵실험과 전쟁 장면을 통한 스펙타클 구현에 있지 않다. 과연 파멸의 연쇄작용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시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냐를 조망하는 데에 있다.

오펜하이머가 선악의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듯, 파멸의 연쇄작용의 출발점 역시 온전히 악의 얼굴만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시작은 과학적 진보, 정치적 명분 등에 의해 이뤄질 때가 많다. 오펜하이머의 얼굴과 청문회 장면은 이 단초에도 선악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심지어 오펜하이머가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계기는 나치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히틀러의 죽음으로 그 명분은 일찌감치 사라져 버렸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표적을 달리해 다시 진행됐다. 오펜하이머가 이를 고민하는 모습은 카메라에 담겼지만 결국 이론을 실천으로, 목표를 구체적인 결과로 실행하겠다는 의지가 앞서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폭 투하로 인한 수많은 죽음과 연쇄적으로 따라올 파멸에 대한 가능성은 묵과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류사를 뒤흔든, 앞으로도 뒤흔들 파멸의 연쇄작용의 단초는 그렇게 마련되었다.

 

모호한 영화적 답변으로 만들어낸 프로메테우스

하지만 그 연쇄작용에 대한 <오펜하이머>에 담긴 놀란 감독의 영화적 답변은 왠지 모호하다. 영화 속 주요 사건들은 파멸의 연쇄작용의 단초인 동시에 미국 제국주의가 더욱 공고히 확장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꽤 관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특히 오펜하이머의 얼굴에 담긴 혼란은 오펜하이머에게 많은 면죄부를 쥐어주는 셈이 된다. 스스로 죽음이자 파괴자가 된 인물에게도 치열한 인간적 고뇌가 있었다는 점이 부각되는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스트로스에 의해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는 설정 역시 유사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스트로스의 청문회만을 흑백 영상으로 보여준다. 시간대가 다른 것을 구분하는 장치이지만, 이와 함께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와 대척점에 있는 빌런 같은 캐릭터임을 부각한다. 또한 영화는 중반까진 오펜하이머가 마련한 파멸의 연쇄작용의 단초를 다루지만, 후반에 이르러선 오펜하이머가 스트로스에 의해 모함을 당하게 되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신에게서 불을 훔쳐 벌을 받게 된 프로메테우스처럼, 오펜하이머는 고통을 스스로 자초하고 짊어지게 된 인물처럼 묘사된다.

관객은 과연 이 점에 온전히 동의할 수 있을까. 놀란 감독이 제시한 영화적 답변은 그렇게 한계를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인간적 고뇌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명분이란 이름으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앞으로도 펼쳐질 파멸의 연쇄작용에 얼마나 더 많은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까. 영화가 과학기술의 진보와 그늘을 함께 다룰 땐, 이 질문에 대해서도 끝까지 자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김희경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한국영화학회 이사, 은평문화재단 이사, 만화평론가로 활동. 前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예술경영 석사, 영상학 박사.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대상 수상.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