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과 푸른 달(May)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 암흑 같은 공간에서 한 줄기의 조명을 쓴 듯한 작품은 대개 이 화가의 것이다. 마치 부족한 빛을 주인공에게 집중하여 주인공 외엔 아무것도 없는 듯 묘사한 경우가 많다. ~(중략)~. 조명을 비춘 듯 가운데만 밝았던 그림처럼 그의 인생의 가장자리는 어두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굽히지 않았다. 스스로의 가치를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빛을 가장 잘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천재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 빛을 남겨두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그림자가 되었던 것이다.”
- 《휴식을 위한 지식》(허진모, 2017년) -
‘빛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R, 1606년~1669년)의 자서전은 자화상(Self-portrait)이다. 삶의 과정에 대해 시간순으로 심리 상태까지 반영한 꾸밈없는 모습의 연작 형태로 남아있다. 자화상은 라틴어 ‘portrahere(끄집어내다,밝히다)’를 어원으로, 자아를 뜻하는 ‘self’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자아를 끄집어내어 밝힌 대상물’이다. 그 대상물은 그림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예술과의 결합을 통해 그 표현 수단을 확장해 간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에 대해 홀로 듣고 혼자 말하는 자아 성찰이 머무른다. 지나간 시간 속 태양과 촛불의 흔적을 담아낸다. 5월의 달(moon)이 청동 구릿빛 거울로 떠오른다. 푸른 달(May)에 어린이, 부부, 그리고 어버이가 비친다. 가만히 쳐다본다. 달과 얘기를 나누며 곡을 짓고,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린다.
푸른 달(May) / 어린이의 / 자화상은 / ‘어린이 정경’
푸른 달(May)의 풍경 너머 정경(情景, 사람의 행위・감정・정서가 깃들여져 있는 풍경)을 찾는 어린이. 로베르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년~1856년)은 피아노곡인 《어린이 정경》(Kinderszenen Op.15)을 1838년에 작곡한다.

그는 열애의 대상인 클라라가 피아노 연주회를 위해 빈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작곡의 배경에 대해 편지를 쓴다. “나는 지금 음악으로 가득 차 넘칠 것 같은 그러한 기분이 자주 납니다. 무엇을 작곡했는지, 잊어버리기 전에 써 두겠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습니다. ‘가끔 당신은 어린애처럼 생각됩니다.’라고. 이 말의 여운이 마법의 붓처럼 움직여 쓴 30곡 중 12곡을 골라 <어린이 정경>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위한 곡이라기보다는, 슈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클라라와 결혼을 통한 자녀의 탄생을 염두에 둔 중의적 행복의 전주곡임을 의미하리라. 실제 《어린이 정경》은 12곡에 추가 1곡을 더하여 13개의 소곡으로 완성되어 발표되며, 이후 2년 뒤에 슈만과 클라라는 결혼에 이르게 된다.
13개의 곡은 슈만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모두 성격 소품과 표제음악의 특성을 드러낸다. 슈만이 포함된 낭만주의 시대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격 소품(Character Piece, 19세기 음악 중 특정한 분위기・장면・사상 등을 담은 짧은 음악 작품)과 표제음악(program music, 제목이 있는 음악이라는 뜻으로 음악 외적인 이야기인 문학이나 그림 등을 음악적으로 묘사한 음악)을 지향하며 어린이를 만난다. 이는 어린 시절의 소중한 단상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시간 흐름 따른 이야기의 유기적 구성을 통해 어린 시절로 들어가는 13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묘사와 서사적 구성은 바로크와 고전 시대를 거쳐 완성된 음악의 형식에, 미술과 문학이 결합하기 시작한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제1곡 <미지의 나라와 사람들>(Von fremden Ländern und Menschen)~제2곡 <신기한 이야기>(Kuriose Geschichte)~제3곡 <술래잡기>(Hasche-Mann)~제4곡 <졸라대는 어린이> (Bittendes Kind)~제5곡 <만족>(Glückes genug)~제6곡 <중요한 사건>(Wichtige Begebenheit)~제7곡 <꿈>(Träumerei)~제8곡 <난롯가에서>(Am Kamin)~제9곡 <목마의 기사>(Ritter vom Steckenpferd)~제10곡 <약이 올라서>(Fast zu ernst)~제11곡 <두려워함>(Fürchtenmachen)~제12곡 <잠자는 어린이>(Kind im Einschlummern)~제13곡 <시인의 이야기>(Der Dichter spricht)로 놓인 13개의 징검다리. 이는 마치 4명의 주인공(어린 슈만, 슈만과 클라라, 슈만과 클라라의 미래 자녀)이 등장하는 4막으로 구성된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하다. 1막은 대상에 대한 호기심(제1곡), 즐거운 반응(제2곡/제3곡)과 또 다른 대상을 향한 재촉(제4곡), 결과로써의 만족(제5곡). 2막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의지를 반영한 꿈(제6곡/제7곡). 3막은 꿈을 꾸는 공간(제8곡), 행동과 심정(제9곡/제10곡), 갈등 고조와 안정(제11곡/제12곡). 4막은 응축된 결론으로서의 꿈꾸는 어린 시인에 대한 그리움과 위로(제13곡)이다. 이 중 균형추이면서 가장 유명한 곡이 7번째 곡인 ‘트로이메라이 Träumerei’이다. ‘트로이메라이’는 독일어로 꿈, 몽상 또는 환상을 의미한다. 13곡 중 짧지만 가장 긴 3분여 초를 향한 ‘꿈’의 여정은, 섬집 아기를 위해 불러주는 바다의 자장노래를 연상시키는 낮은 서정적 선율로 열린다. 열린 문밖으로 펼쳐지는 유성우를 보며 고래의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인 서사로 닫힌다.
성격 소품을 반영한 표제에서 드러나듯, 슈만이 어린이의 시각에서 어린 날의 순수한 동심, 굳센 의지, 아름다운 꿈을 향한 동경을 그린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작품이다. 푸르른 5월에 자라나는 어린이를 위한 자화상을 슈만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고백받는다. 물음표에서 시작하여 느낌표의 어린이집을 지어간다. ‘미지의 나라와 사람들’을 향한 ‘꿈’을 이루며 ‘시인’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속삭이듯 연주한다.
부부는 / ‘사랑’ 가득 / 소네트를 / 담아내고
어린 시인은 성장하여 부부로 가는 길을 걷는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년~1861년)의 《How Do I Love Thee》(1850년)를 만난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년~1889년) 부부의 사랑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 6년 연하의 무명 시인 로버트는 이미 천재적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시들을 좋아하다 시보다 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겪고 있는 알 수 없는 만성적 두통과 낙마 사고로 다친 척추로 인해 평생 진통제를 복용하며 반신불수의 몸으로 지내야 하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에 대한 로버트의 사랑은 서로의 시를 통한 교류로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시 중 엘리자베스가 로버트에 보낸 소네트(sonnet, 유럽에서 형성된 정형시의 한 종류로 관련된 형식적 규율들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였으나, 당시에는 14행의 시 형식이 유행함) 44편을 묶어 《포르투갈 사람으로부터 온 소네트》(Sonnets from the Portuguese)를 출판한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시가 소네트 43번인 《How Do I Love Thee》(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이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냐구요? 헤아려 볼게요
보이지 않는 절대적 존재를 향한 목적과 은총의 극치를 위해
내 영혼이 도달할 수 있을 만큼
그대를 사랑해요. 깊고 넓고 높게/
그대를 사랑해요. 매일의 삶에서 낮과 밤이 허락하는
한없이 고요한 시간이 될 수 있을 만큼이요
그대를 사랑해요.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 자유롭게
그대를 사랑해요. 칭송을 외면하고 돌아서듯, 순수하게/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쏟았던 열정과
어린 시절에 품었던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그대를 사랑해요
지금은 잃어버린 성인들에게 주었던 사랑으로, 그대를 사랑해요
내 평생 쉬는 숨과/
미소와 눈물을 담아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신이 허락해 주신다면,
내 삶이 끝난 후에도 더욱 그대를 사랑할 거예요.”
- 엘리자베스 브라우닝(E.B. Browning)《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1850년) -
한 개의 연으로 구성된 14행의 사랑 시는 현재 시점에서 바라는 관념적 사랑(1~4행)과 현실적 사랑(5~8행), 과거 시점으로의 공백 회귀를 통한 회복적 사랑(9~11행),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12~14행)을 추구한다. 이는 대상에 대한 성격(이상과 현실), 시간(과거~현재~미래), 공간(깊고 넓고 높게)을 가득 채우며 로버트를 향한 지극한 사랑의 방법과 정도를 동시에 드러낸다. ‘사랑 love’이란 단어가 아홉 번 반복되지만, 상투적 사랑의 외침이 아닌 점층적 고조에 따른 이성과 감정의 표출로 확대되어 간다. 이에 따라 한순간의 숨, 미소, 눈물도 낭비하지 않고 시간의 흔적에 사랑을 깊고 넓고 높게 새긴다.
“인생은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의 C(Choice·선택)다”라는 사르트르(J.P.Sartre, 1905년~1980년)의 말처럼, 삶은 ‘선택’으로 이어지는 시계열적 선택의 과정이다. 탄생 후 어린이를 거쳐, 결혼을 통해 부부로 함께 걸어가는 길. 부부의 자화상은 ‘사랑’이란 그릇에 오롯이 담아내는 함축적 운율이다.
어버이 / ‘빛과 그림자’ / K-자화상 / 기원(may) 고리
부부는 사랑의 DNA와 함께 어버이를 향한 시간 여정을 떠난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년~1967년)의 《바닷가 방 Rooms by the Sea》(1951년)에서 빛과 그림자를 만난다.

집에는 두 개의 문과 방이 있다. 첫 번째 문은 텅 비어 있는 방에 열린 채로 있고, 옅은 하늘과 푸른 바다로 맞닿아 있다. 방안에 빛이 들어온다. 빛은 그림자를 만들며 방을 채운다. 두 번째 문은 가구가 있는 작은 방으로 이어지며 부분으로 서 있다. 방 안에 들어온 빛이 그림자를 좇으며 방을 품는다. 비어있는 방, 잘려있는 문과 방, 직선과 사선으로 이루어진 빛과 그림자의 경계. 바람조차 멈춘 듯한 절박한 공간에 소외와 고독이 넘쳐나며 바다로 밀려간다. 하지만 그 진한 쓸쓸함이 문을 열고 빛과 함께 하늘과 바다로 난 길을 걷는다. 닫힌 풍경 너머 무한 가능성을 향한 열린 에너지를 보여 준다.
빛은 보통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 상태로 이동할 때 잃어버린 에너지가 방출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위치가 정해져 있으며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특성을 갖는다. 빛을 중심으로 어둠과 그림자가 있다. 어둠은 빛의 부재를 의미하나, 빛은 어둠이 있어서 더욱 빛난다. 그림자는 빛의 경로상에 불투명한 물체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 때문에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현상이다. 이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 있지만, 어둠보다는 빛의 또 다른 존재로서 보살핌과 포용의 의미도 함께 한다.
어버이는 빛과 그림자를 최대화하고 어둠을 최소화하며 절대 에너지로 서 있다. 그 에너지는 시간의 여정에 따라 상대 에너지로 변화한다. 에너지의 방출과 흡수를 통해 사랑의 DNA는 성장과 쇠퇴의 순환을 이룬다. 호퍼가 떠난 《바닷가 방》에서 어버이의 자화상을 본다. 오늘도 비어 있는 바닷가 방은 어버이의 소외와 고독으로 인한 슬픔과 쓸쓸함이 어둠 닮은 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하지만 열려 있는 문과 벽을 통해 또 다른 빛이 들어오고 나간다. 노란 햇살과 푸른 바다를 향한 빛이 기꺼이 스스로 그림자마저 채우며 품는다. 어버이의 자화상은 ‘빛과 그림자’로 그렇게 걸려 있고, 그리고 사라져간다.
어린이~부부~어버이의 자화상에 푸른 달(moon)이 비춘다. 달빛 아래 시리도록 아프게 드러나는 K-자화상(가족/인구). 어린이~부부~어버이 간 진화론적 연결 고리가 통계적 유의미성을 잃고 퇴색해 간다. 이제는 ‘미지의 나라와 사람들’을 향한 ‘꿈’을 이루며 ‘시인’이 되어가는 어린이, ‘사랑’의 부부,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어버이가 어우러지는 꽃밭을 가꾸어야 할 때. 꽃을 키우는 햇살과 바람의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의 낮과 밤을 함께 해야 할 때. 푸른 달(May)에 기원(may)해 본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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