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장소성, 그리고 비장소
인간은 태어난 이후 집이라는 곳에 거주하며, 이후 수많은 공간들로 이동하며 타자들과 조우한다. 일반적으로 공간은 시간과 대비되는 물리적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적 공간에 특정한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장소성(placeness)을 획득하며 장소화된다. 다시 말해 장소는 단순히 수학적 비율로 측정 가능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기억, 추억, 경험 등이 축적된 곳이다. 그러므로 장소는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다.
한번 떠올려 보자. 우리가 자주 머무는 장소는 어디인가? 서두에 언급한 집을 비롯하여 학교, 공원, 식당, 교회나 성당 등, 인간은 일생동안 수많은 장소에서 살아간다. 중요한 점은 앞서도 말한바, 그곳은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 이루어지면서 장소가 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저 공간에 그칠 뿐이다. 마르크 오제(Marc Auge)는 장소와 달리 정체성이 부재하고 관계적이거나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을 ‘비장소(非-場所, non-lieux, non-places)’라고 하였다. 따라서 임시적으로 경유하는 항공로, 철도, 고속도로, 호텔, 놀이공원 등이 비장소에 해당된다.
<애정만세>, 일생과 닮은 영화적 공간
영화는 시간의 예술인 동시에 공간의 예술이기도 하다. 영화적 공간들은 서사와 인물에 연동되어 장소화되는데, 여기서는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장소와 비장소의 사례를 들어보려 한다. 먼저 대만 차이밍량(Tsai Ming liang) 감독의 <애정만세(Vive L'Amour)>(1995)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대만의 대도시 타이페이에서 살아가는 세 젊은이의 일상을 그려낸다.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는 메이, 야시장의 노상에서 옷을 파는 아정, 그리고 납골당을 거래하는 시오아강. 이렇게 세 청년은 각기 다른 일을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공간을 살펴보면 꽤 흥미롭다. 집, 노상(도시의 길), 납골당은 한 사람이 일생동안 반드시 마주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들이다. 집은 생명의 탄생과 안식처를 의미하며, 노상은 일터를 오가거나 타자를 만나는 곳이며, 납골당은 죽음 이후 머무는 곳의 상징적 오브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장소화되지 못한다. 모든 등장인물이 그러한 공간에서 부유할 뿐,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메이가 거래해야 하는 한 아파트, 즉 '빈 집'이다. 그런데 이곳은 단순히 그녀가 팔아야하는 집이 아니라, 세 인물들이 만나거나 빗겨가며 때로는 욕망이 들끓는 독특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빈 아파트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일 뿐이며, 결코 장소가 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오제가 말한 비장소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소인 빈 집은 일하다 지친 메이에게 때로는 잠시 쉬어가는 안식처가 되며, 아정과 시오아강에게는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보면 이곳은 비장소적 정체성을 지니지만, 그곳은 인간의 본능, 욕망, 결핍, 고독 등의 존재론적 양상들이 뒤엉킨 장소가 되기도 한다.
<트랜짓>, 비장소의 유령적 재현
또 다른 영화 <트랜짓(Transit)>(2018)은 독일의 베를린파 감독인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가 제작한 것으로, 과거와 현재를 해체하는 독특한 시공간의 설정이 페촐트 감독만의 유령적 재현에 무게를 더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난민들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경유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지만, 실상 영화의 공간들은 현대의 도시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죽은 작가 바이델의 신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속이며 타국으로의 도피를 시도하는 주인공 게오르그는 바이델의 부인 마리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고 그녀만을 떠나보내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난민들이 등장하는 만큼, 잠시 거주하는 집이나 호텔, 기차, 대사관, 식당 등이 주된 공간적 배경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앞에서 언급한 비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빨리 떠나기를 원할 뿐, 머무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정 장소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비장소에서 잠시 스쳐지나가며 다른 목적지를 행해 가고 있는가? 대표적인 비장소인 터미널, 공항, 기차역 등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불안감, 설렘 등을 누구나 겪어보았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다른 곳, 더 나은 곳, 더 새로운 곳을 지향한다. 그것은 비단 물리적 장소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디론가 이동하고자 하는 갈망은 인간의 내적 본능이다. 따라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인간은 정주적 존재가 아닌 유목민, 즉 노마드이다. 인간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내던져진 이후 끊임없이 이동하며 죽음의 순간으로 다가간다. 그 알 수 없는 긴 항해 가운데,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머무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곳이 장소이건 비장소이건 말이다. 이처럼 장소와 비장소는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세계의 한 단면이다.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겸 서울사이버대 객원교수.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상임이사.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영화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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