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동 감독은 영화 시인이다. 서사를 감싸는 적절한 은유와 비유는 의미가 확장되어 방황하는 리듬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뒤틀린 형식이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유하는 인간은 고통스럽다.’는 전제가 곳곳에 깔린 듯하다. 고뇌하는 인물들은 비정하고(<초록물고기>(1997)), 과거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지니거나(<박하사탕>(2000)), 막막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오아시스>(2002)) 보이지 않는 신에게 물음을 구하기도 하고(<밀양>(2007)), 죄책감의 잔상이 삶을 지탱하는 새로운 동력(<시>(2010))이 되기도 한다. 상술했듯 이창동은 리듬을 중요시하는데, 부유하는 질문들은 운율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막을 사이에 두고 왜곡된 형태로 서술되기도 하고, 과한 상징에 본질이 가려지기도 한다. 얇은 막을 벗겨내면 부유하던 질문들은 해체되고 해석된다. 이것은 그의 영화를 읽어내는 방식이다.
<밀양>에서 신애(전도연)는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려다가 무너지고 만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 미용실에서 자신의 아들 준을 납치한 원장의 딸을 거울로 목격한 신애는 보지 않음으로써 참으려고 한다. 하지만 눈앞의 거울은 같은 공간에 이들을 있도록 한다. 이때의 거울은 메타포다. 왜곡된 상을 통해 반사된 두 인물의 이미지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깨버리고자 하는 미묘한 의지가 숨겨져 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신애는 “왜 하필 이 집이냐며”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에게 따진 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거울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집에서 홀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를 보여주면서다. 작은 거울은 종찬이 제대로 들어주면서 신애의 얼굴이 관객에게까지 비춘다. 작은 거울 안에 담긴 신애의 얼굴은 이전의 장면과 달리 안정되어 있다. 신에게 물음을 구하는 것을 멈추고 본질을 직시하려는 시도다.
<버닝>(2018)은 사유의 미스터리에 빠지는 영화다.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는 속을 알 수 없는 벤(스티븐 연)과 해미(전종서)가 질문하는 끊임없는 고리에 갇힌다. 영화 역시 미스터리 장르의 공식을 답습하면서도 형식에서 벗어나 환기하려는 의지를 멈추지 않는다. 종수에게는 신애의 곁을 묵묵히 지키던 종찬과도 같은 인물은 없다. 폭력적인 객체를 소멸하면서 도약하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외로운 인간상일지도 모른다. 이창동의 시각은 2010년 개봉한 <시> 이후에 8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넘어 어떤 식으로 변모한 것일까?
폭력의 주체들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정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태어난 목적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삶의 목적을 확립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유한다.(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도 있지 않은가.) <버닝>의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프레임을 반쯤 가린 트럭의 뒷문을 닫는 종수를 따라간다. 끊임없이 따라가던 카메라는 해미가 종수를 쳐다보는 지점에서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걸음을 멈춘다. 이 장면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며, 벗어날 수 없는 닫힌 프레임을 제공한다. 가로막힌 상태는 하나의 형식이다. 형식 안에 갇힌 인간은 사유의 벽을 마주하게 되는데, “나 기억 안 나?”라고 묻는 해미의 대사는 종수에게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해미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생각하기를 중단한 것이다.
종수에게 질문들 던지는 인물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는데, 이들의 얼굴에 서려있는 비극의 냄새를 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수의 아버지는 공무원을 폭행해 구속 중이다. 변호사(문성근)는 종수에게 탄원서를 작성하라는 충고를 한다. 조언이랍시고, 종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슨 소설을 쓰나?” 연달아 이어지는 질문들 역시 첫 만남에 직설적으로 묻기에는 다소 폭력적이다. 벤 역시 첫 만남에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이 말에는 소설을 쓰는 행위보다 쓰는 대상에 대한 비난과 무시하는 태도와 분노가 서려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분노하고 있지?”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이창동은 조선희 작가와의 대담에서 말한다. “이 분노가 우리가 80년대 사회를 향해 분노하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옛 분노는 ‘순수한 분노’였어요. (…) 그러나 지금의 분노는 밝지 않아요. 어두워요.” 하지만 이창동의 창조한 분노하는 인물들은 비교적 냉담하다. 피가 끓는 식의 시대를 향한 분노보다는 개개인에 대한 모멸감을 통해 한없이 추락한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가 세상에 울분을 쏟아내며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쳤다면, 종수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변호사와 벤은 같은 부류의 사람일 테다. 자존심이 강해 사회에 불응하는 종수의 아버지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봐온 변호사는 종수에게 말했듯이 말리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종수의 아버지는 순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호사와 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한 질문들에 새로운 질문으로 대응한다. 냉철하고도 냉담하게 인식하면서도 감정을 쉽게 표출하지 않는다. 종수는 그들과 다르게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다. 해미를 대하는 벤에게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의 중첩

<시>에서 미자(윤정희)가 사물을 관찰하고 시를 쓰고자 했다면, 종수가 쓰려고 하는 텍스트는 소설이다. 소설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은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소설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나간 산문체의 양식을 말한다. 이 문장을 해체해 보자. 사실과 픽션이 중첩되어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종수가 쓰려는 소설은 사실에 기반이 되어 있을 수도,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을 바탕으로 제작된 <버닝>은 한국 문학사와 일본 문학사의 첨예한 시각 사이에서 혼란한 이창동의 견해가 드러난다. “80년대 현시에 매여 있던 문학적, 사고, 문화 전반에 걸쳐 현실의 중압에 눌려 있던 모든 것과 결별하게 한 존재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였어요.” 작가는 현실과 픽션을 구분한다. 한국 문학이 현실을 근간에 두어 소설을 집필했다면, 하루키는 이단아가 되어 픽션의 세계를 소설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종수에게 소설은 현실과 픽션이 중첩된 경계를 다룬 텍스트다. 벤이 “종수씨는 어떤 소설을 쓰세요?”라는 질문에 종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이기에 소설을 쓰는 행위가 어렵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종수가 글을 쓰는 행위는 딱 두 번 보여준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탄원서를 작성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해미의 집에서다. 하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종수가 쓰는 텍스트가 프레임에 노출되지 않는다. 첫 번째 장면은 종수가 아버지의 집에서 노트북을 사용해 무언가 작성하는 장면에서 탄원서라는 글이 등장한다. 이창동은 탄원서 내용 인서트를 꽤 오랜 시간 보여준다. 정보 전달을 위해서 짧게 사용하는 인서트에게 비교적 오래 생각할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종수는 아버지 이름을 수식하는 “성실하고 다정다감한 농부”라는 형용사에 커서를 대고 지웠다가 썼다를 반복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탄원서에 사인하는 이장은 이 문장에 불만을 표하며, 텍스트 안의 거짓을 곧바로 알아챈다. 객관적인 정보만을 전달해야 하는 글의 성격에 반하는 문장을 작성한 종수는 이장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한다. 이 문장이 명백한 거짓이라는 증거는 실제로 존재하는 종수 아버지가 있기 때문인데, 픽션으로 조각된 캐릭터가 아니기에 이장의 판단이 들어간다. 종수는 탄원서를 일종의 단편 소설을 작성하듯 캐릭터에 수식을 붙인 것이다.
영화의 의문은 종수는 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지 못하는가이다. 소설의 성격과 비슷한 인물들이 종수를 괴롭히는데, 그들은 은유 뒤에 본질을 숨겨 헷갈리게 한다. “세상이 수수께끼”라서 소설을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종수에게 새로운 퀴즈를 낸다. 퀴즈의 유형을 벤과 해미로 구분 지어 볼 수 있다. 벤의 퀴즈는 비닐하우스의 소멸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말에 종수는 그날부터 매일 달리며 집 주변의 비닐하우스를 찾는다. 하지만 종수는 비닐하우스가 태워지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려는 욕망을 얻게 된다. 여기서 비닐하우스는 그저 외피이며, 태운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사물의 형태에만 집착한 종수는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시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해 보면, 사물은 목적에 의해 태어났지만 인간은 다르다. 비닐하우스는 작물을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탄생했다. 때문에 비닐하우스에는 새로운 목적을 부여할 수 있다. 벤이 이야기한 비닐하우스는 죽일 대상이며, 태운다는 것은 살해의 방법을 의미한다. 벤은 버려진 것에 주목했지만, 종수는 비닐하우스에 주목했다.
해미는 어떠한가. 우물에 떨어져 갇혔다는 어린 시절의 진술은 무언가 이상하다. 종수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주변인들의 진술은 모두 어긋나있다. 해미의 어머니와 언니는 우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집을 나가기 전 파주에 살았던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이 있었지만, 사람이 빠질 정도로 깊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마을에 오랫동안 살았던 주민은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해미의 말은 일정 부분은 사실이자 거짓일 것이다. 종수는 세계로 이미 진입해버렸기 때문에 밖에서 자신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거짓으로 뒤덮인 대답들은 종수의 혼란을 가중 시킨다.
하나의 막

<버닝>을 보면서 느끼는 답답한 감정은 비단 종수에게 이입해서만은 아닌데, 영화는 지속적으로 막에 가려진 사람들을 제시한다. 미세한 막 뒤에 감춰진 진실은 마치 종수가 집주변을 달리다가 비닐하우스 내부를 관찰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종수는 비닐하우스의 바깥에서 안을 바라보지만, 관객은 비닐하우스의 안에서 들여다보는 종수를 본다. 군데군데 훼손된 천으로 인해 관객은 흐릿하고도 희미한 형태를 포착하게 된다. 이러한 형질은 본질을 뒤편에 숨기고 다층적인 해석의 요소가 된다.
해미의 고양이인 보일은 종수에게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벤의 집에서 긴가민가하게 드러낸다. 보일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한 종수는 “보일아”라고 불렀을 때 다가오는 반응으로 벤의 집에 있는 고양이가 보일일 것이라고 유추할 뿐이며, 벤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다. 종수의 반응은 직감으로 비롯된 하나의 가설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프레임에 정말 짧은 순간 드러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해미의 집에서의 햇빛이 그렇다.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이 해미의 옷장에 들어오는 순간은 일순간 머무르다가 허상처럼 사라진다. 종수가 햇빛을 목격하는 순간은 해미와 정사를 하며 오롯이 존재했던 시간이다. 이후에는 벤의 등장으로 해미와 종수는 같은 장면을 재현할 수 없다. 종수가 해미의 공간에 방문해서 자위를 하는 이유는 온전히 소유를 할 수 있던 유일한 시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침대에서 자위를 하던 종수의 뒤에 실종된 해미가 나타나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일그러뜨리기도 한다.
서울과 파주의 지역 분리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서울로 올라오는 종수는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조그마한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본다. 풍경의 앞에는 유리라는 막이 존재하며, 이는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파주의 집은 넓게 펼쳐진 광활한 풍경이 존재하지만, 어째서인지 비슷한 이미지들의 나열로 종수가 뛰고 있는 구간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막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연속적인 두 개의 신이다. 해미의 집에서 무언가를 쓰는 종수 뒤에는 바로 렌즈를 끼는 벤의 신이 붙는다. 카메라는 종수를 창문 너머에서 바라보는 방식을 취한다. 인물 앞, 창문은 하나의 막이 되어 도시의 일부처럼 보이도록 해 답답한 인상이 든다. 얇은 막이 눈에 안착되는 렌즈는 세상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속성도 있지만, 본래의 것에 얹어진다는 성질도 있다. 이창동은 후자를 택해 이야기하는데, 벤은 세상을 한 겹의 렌즈를 끼운 채 보는 사람이다.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외피를 생성하는 것이다. 종수는 그 세계를 벤을 살해하면서 파괴한다. 마치 소설의 형식 자체를 불태우는 느낌까지 든다. 칼로 벤을 찌르고 차와 함께 불태우는 벤은 트럭과 함께 유유히 사라지는데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흩날리는 눈이 트럭의 앞 유리에 닿아 녹아내리고, 운전하는 종수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비닐하우스를 보던 종수를 관객인 우리가 내부에서 관찰했다면, 이제는 완전히 전복되어 종수가 내부에서 바라보는 자가 된다.
태운다는 것

<버닝>은 한 겹의 막을 걷어 내야만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종수가 벤을 죽이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찾은 것처럼, 이창동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외피를 벗겨내야만 한다. 상징과 은유라는 화려함에 속지 말고, 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를 파악해야만 한다. 어쩌면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통해 새로운 선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작인 <시>가 제목 자체에서 은유와 비유를 드러냈다면, <버닝>에서는 텍스트와 말에 숨겨진 외피를 태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의 형식을 파괴했던 것처럼, 이창동은 영화의 형식을 구부린다. 오프닝과 엔딩의 전개 방식도 그렇다. 영화는 수미상관이 약간 비틀어진 형태로 설계되어 있다. 트럭 뒤에서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로 종수가 진입하는 것이 오프닝이라면, 벤을 살해하고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시골의 눈길을 트럭을 타고 종수가 빠져나가는 것이 엔딩이다. 종수는 은유와 상징의 세계에서 홀로 빠져나왔고, 해미와 벤, 아버지의 변호사를 비롯한 인물들은 실종되거나 죽거나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그들은 여전히 폭력의 주체가 될 것이다.
태운다는 것은 있던 것을 없던 것처럼 소멸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태운 자리에는 새로운 씨앗이나 목적이 들어올 수 있다. 종수는 이제 술집에서 해미가 이야기한 팬터마임의 오렌지를 상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개입 없이도 온전한 상상을 통해 ‘있는 것처럼’ 만들어 오렌지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과연 종수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써 내려갈 수 있는 장소가 그의 다음 목적지이지 않을까?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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