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장윤미의 문화톡톡] 나는 무엇이 되어 사회에 저항할 수 있을까?
[장윤미의 문화톡톡] 나는 무엇이 되어 사회에 저항할 수 있을까?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4.07.01 14: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적응을 거부하고 저항한다는 것

적응이란 주어진 환경을 따라 자신을 적절히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질서, 규범, 제도에 맞춰 사고와 행동을 만들고 바꾸고 또 다듬는다. 이런 식으로 주어진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람들을 우리는 주류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든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은 아니며, 여러 이유로 주류에 포섭되지 못한(또는 않은) 채로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이유를 찾자면 환경의 차이, 능력의 차이, 그것도 아니면 의지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이 적응을 포기했다고 해서 생존을 포기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적응만이 생존의 유일한 답이 아니라는 것, 다른 것을 선택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이 앎을 자신의 언어, 신체, 행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저항이라 부르고 이들을 비주류라 부른다.

적응을 선택하지 않고, 저항을 선택했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는 꽤 비싸다. 저항 역시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지속가능성은 아무도 장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속되지 못함으로 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고, 보호받지 못함으로 신체가 훼손될 수도 있고,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언제든지 교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저항하여 얻은 눈앞에 놓인 결과물이 나를 풍요롭고 벅차게 만들 수 있으리란 것도 장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저항은 높은 확률로 비주류, 소수로 묶이는 탓에 수시로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경험해야 함에도 이들이 저항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응만큼이나 저항이 값지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저항이 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진취적으로, 그리고 이타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저항이 적응을 선택했을 때보다 더 약한 것을 돌보게 하고, 더 많은 것을 살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저항의 매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영상예술가이자 기록 활동가인 이하루가 쓴 『사회적응 거부선언』은 제목 그대로 사회적응을 거부하는 대신 저항을 선택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담은 묵직한 에세이다. 그는 자발적 유랑인을 자처하며 전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한다. 그러면서 탈 혈연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의 힘과 그 가치, 동시에 비주류 집단이 겪어야 하는 모멸감과 두려움을 거침없이 써 내려간다. 그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명분 삼아 끔찍한 폭력과 대량 학살을 보며 침묵하는 주류에 저항하며 고통받고 죽어가는 비주류들의 목격자이자 증인이 되고자 기꺼이 행동한다. 그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당신도 어느새 그와 함께 저항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 유랑인으로 저항하기

잠은 카우치서핑(Couch surfing, 무료 숙박 서비스), 식사는 덤스 다이빙(Dumpster Diving, 쓰레기통 뒤지기), 이동은 히치 하이킹(Hitch hiking)으로 해결한다. 안락함을 위해 자연을 해치거나 편리함을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것은 그만의 여행 원칙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이 단지 돈이 없어서라고 말할 수 없는 건, 이를 초월하는 더 많은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구경하(고 떠나)는 외국인, 즉 관광객 말고 ‘사는(live)’ 외국인이 되고 싶었고, 돈이 있어야만 생존 수 있다는 자본주의 법칙에 저항하고 싶었다.

관광객은 원하는 것도, 머무르는 시간도 분명하다. 돈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떠난다. 그러나 유랑인은 다르다. 목적도 정해진 시간도 없기에 선주민의 환대는 예상치 못한 것이라 감사하고, 돌봄은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간절하다. 낯선 선주민의 환대와 돌봄이 없다면 유랑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아는 작가는 착취에 가까운 행위만 하다 자신의 나라로 떠나는 관광객의 모습을 거부하는 대신 머무르는 유랑인을 자처한다.

한편, 돈은 교환가치인 동시에 존재를 증명하는 가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은 가격으로 가치를 평가받고, 인간 역시 소유한 돈의 양으로 가치를 평가받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가치관이 우리 삶을 지배한 것은 불과 이백 년이 조금 넘었을까 싶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돈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에 저항하듯 돈 없이 사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다. 남들이 보기에, 이 모습은 가난하고 궁색하고, 볼썽사나운 모습일지는 몰라도 정작 당사자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기꺼이 감수할 만큼 불편하고, 행복을 느낄 만큼 불행하고, 시행착오를 즐거워할 만큼 낯설고 새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랑인을 좌절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오로지 ‘주어지는’ 나의 위치다.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주류로부터 나의 위치는 규정된다. ‘거처불명의 여자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는 입국 심사관에게 끌려가서 수모를 겪는다. ‘신원이 분명한 남자 국내인’의 보증이 확인된 후에야 입국 ‘허가’를 받으며 얻은 건 불쾌함과 분노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 이국에 도착했지만 허가받지 못한 난민이라는 이유로 강제송환 될 사람을 보며 그가 겪었던 불쾌함은 안타까움을 너머 죄책감으로 바뀐다. 같은 유랑인이지만 그와 작가를 가르는 건 오로지 주어진 위치 때문이다. 이를 운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가혹하고 운명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정치적이라 좋은 경험을 하기 위해 떠난 유랑인 작가는 추방당해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 유랑인 앞에서 미안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3. 증인으로 저항하기

기계화, 대량화,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내가 직접 개입한 단계 이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개입할 기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계, 단계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탓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고 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달걀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온 것인지, 부위별로 나누어져 깔끔하게 포장된 각종 고기가 어떤 작업을 거쳐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달걀이 무항생제인지 아닌지, 이 고기가 얼마나 신선한 선홍빛을 띠는지, 살코기와 기름기 적당히 있는지 정도일 뿐이다.

대규모 생산 시스템, 공장식 자동 시스템 도입 이후 생명의 탄생부터 죽음의 과정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두고 더럽고,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굳이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건 시간 낭비, 감정 낭비일 뿐이다. 현대 사람들은 물리적인 손해만큼이나 정신적인 손해 역시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러나 작가는 기꺼이 스스로 목격자가, 증인이 되기 위해 기록하고 행동한다. 죽기 전까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젖을 착취 당하는 암소,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비좁은 배터리 케이지에서 산란만 하다 죽는 암탉, 쓸모없어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갈리는 수탉,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 기능이 떨어지면 도축되는 돼지. 우리가 마트에서 보는 고기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거나 피했지만 결국은 죽임을 당한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목도하고, 진심으로 슬퍼하고, 사실대로 기록함으로써 목격자로서 역할을 해낸다.

그의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잔인하고 끔찍한 집단 학살은 그것을 당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주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 이는 간접적 목격자가 피해 당사자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는 스스로 동물들의 집단 학살의 목격자이자 증인이자 당사자라고 선언하며 공장식 축산업의 문제를 고발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장에서 직접 존재했던 목격자가 되어 더 나아가서는 학살을 목격함으로써 정신적 외상을 입은 ‘당사자’가 되어 새로운 시선-진실-을 이 사회에 전하고 요구할 것이다. (256~257쪽)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 것은 신뢰하지 않는다. 목격자가 없으면 믿을 수 없고, 증거가 없으면 진실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스스로 목격자가 되어, 증인이 되어 숨겨진 사실에 저항한다. 그러나 저항이 성공하려면 소수로만으로는 안된다. 가능하다면 목격자가 많아지길, 증인이 많아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힘이 클수록 적응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소수자, 피해자들의 존재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그 무엇보다 연대가 필요한 이유다.

 

4. 생존 방식이 곧 나라면

생존 방식은 다양하다. 역량에 따라 절대권력을 선택할 수도, 기회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환경에 따라 공생을 선택할 수도 있고 경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의지에 따라 적응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항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개인의 판단에 달린 문제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 선택이 곧 나라는 것이다. 선택은 곧 행동이 되고 행동은 결과적으로 나의 가치관, 신념, 삶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므로.

우리는 고등 동물일수록 적응 능력이 높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물일수록 도태되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 그러나 생존에는 적응만 있지 않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응만큼이나 저항도 필요하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힘으로부터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강하고 센 사람만 살아남는 세상은 불행하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나만 살아남는 것 역시 불행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한 세상에서 불행에 적응하도록 만들지 않으려는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글·장윤미
소설가 겸 문화평론가. 저서로 독서 에세이 『우세한 책들』, 장편소설 『또다른 세계로 가는;플랫폼』이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