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김소영의 문화톡톡]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변증법적 혼종의 미학
[김소영의 문화톡톡]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변증법적 혼종의 미학
  • 김소영(문화평론가)
  • 승인 2024.07.15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 베를린파(Berliner Schule)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 감독은 국내에서 특별전이 열릴 정도로 많은 시네필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어파이어(Roter Himmel)>(2023)의 개봉과 함께 한국을 찾은 페촐트 감독의 명성답게, 여러 언론 인터뷰와 시사회가 이어졌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그의 영화에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탐색은 페촐트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나타난 미학을 산책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우선 베를린파는 페촐트 감독을 비롯하여, 토마스 아슬란(Thomas Arslan)과 앙겔라 샤넬렉(Angela Schanelec) 감독이 대표적이다. 베를린파는 90년대 독일의 보수적 정치 환경에 대한 영화적 반작용으로, 극적 플롯을 대신하는 일상의 관찰에 주목하면서 2001년 비평계에서 불리게 된 용어이다. 베를린파답게 페촐트 감독 역시 멜로드라마라는 양식을 차용하여 등장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세심하게 포착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미시적 일상 속 남녀 관계가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결합하면서 멜로드라마 이상의 장르적 특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사실주의적 이슈를 환영주의적으로 재현하며 인간의 실존적 문제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스토리텔링이라 할 수 있다.


해체되어 재구성되는 영화적 시공간

페촐트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다루는 시공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며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그만의 작법은 대표적으로 <옐라(Yella)>(2007)와 <트랜짓(Transit)>(2018)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선 <옐라>의 경우는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시공간을 동일하게 설정함으로써, 수미상관에 의한 시공간의 해체를 시도한다. 옐라는 경제적, 정신적 문제로 시달리는 남편을 떠나 주체적 여성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나서지만, 차가 강물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과는 무관하게 영화의 서사는 옐라가 한 사업가를 만나며 일을 시작하고, 그와 애정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이후 그들의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한 고객이 자살하게 되고, 이로 인한 죄책감으로 일을 그만두게 된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결말에서 차 안의 시공간이 처음 사고가 난 순간과 겹치며 원래의 시공간으로 회귀한다. 이를 마주한 관객은 영화의 주된 서사가 거짓이고 환영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페촐트 감독은 이처럼 시공간과 서사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것에 몰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환영적 작법으로 시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외연을 넘어 내포를 전달한다. 옐라가 당시 독일 여성으로서 어떠한 신분이었는지, 왜 직업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려 했는지, 이러한 시대적 문제를 멜로드라마라는 외피를 입혀 재현한 것이다.

<트랜짓>의 경우는 어떠한가? 영화의 시공간은 초기 작품들에 나타난 단선적 서사나 해체된 시공간보다 더욱 복잡하고 조밀하게 재구성되어 있다. 우선 시간적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이며, 나치의 탄압을 피해 타국으로 망명하려는 독일인들이 머무는 프랑스 마르세유가 공간적 배경이다. 이른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봄맞이 대청소’를 피하려는 마르세유의 망명자들은 대사관에 줄을 서서 영화제목인 통과 비자 ‘트랜짓’을 기다린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그러한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전하지만, 관객은 프레임 속 마르세유 거리를 보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대 프랑스 마르세유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페촐트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시공간의 불일치를 활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 영화는 유럽 국가가 겪는 동시대적 난민 문제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 트랜짓 @ 네이버 영화 트랜짓 포토
영화 트랜짓 @ 네이버 영화 트랜짓 포토

한편 <트랜짓>에서는 여러 인물들의 죽음이 나오는데, 이는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드러난 죽음의 재현 방식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죽음의 순간을 애도하는 영화적 시간을 관객에게 부여하지 않으며, 그러한 죽음은 대단히 갑작스러운 일시적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트랜짓>의 주인공 게오르크는 작가 바이델에게 전할 편지를 들고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이동하지만, 호텔방에서 그가 이미 자살한 후였다. 그뿐 아니라 페촐트 감독은 게오르크와 동행했던 하인츠의 죽음이나, 지휘자의 죽음, 건축가 중년 여성의 죽음, 그리고 바이델의 아내인 마리의 죽음까지 모두 프레임으로부터 즉시 이탈시키거나 소거해버린다.

특별히 대사관에서 만난 건축가의 자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시공간의 해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여성은 게오르크와 함께 담배를 피우다 난간에서 떨어져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시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게오르크와 걸으며 나눈 대화에서 중년 여성은 자신이 마르세유에 온 이유가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Rudy Ricciotti)가 설계한 건축물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그 건물은 유럽 지중해 문명 박물관(MuCEM, Museée des Civilisations de l’Europe et de la Méditerrnaée)으로 2013년에 지어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을 시도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살한 순간을 마주하는 공간에는 뮤셈이라는 마르세유의 상징적 현대 건축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적 시공간은 전체적인 서사뿐 아니라 부분적인 서사에서도 불일치함을 볼 수 있다.


‘원소 3부작’을 기대하며, 물에서 불로의 변주

페촐트 감독은 일명 3부작 시리즈를 지속해서 제작해 왔다. 먼저 <내가 속한 나라(Die innere Sicherheit>(2000), <유령(Gespenster)>(2005), <옐라>의 ‘유령 삼부작’을 들 수 있다. 또한 독일의 역사적 시공간을 재해석한 ‘역사 3부작’인 <바바라(Barbara)>(2012), <피닉스(Phoenix)>(2014), <트랜짓>도 관객과 평단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운디네>와 <어파이어>의 물과 불에서 이어지는 ‘원소 3부작’을 예고한 바 있다.

 

영화 운디네 @ 네이버 영화 운디네 포토
영화 운디네 @ 네이버 영화 운디네 포토

영화 <운디네>는 설화 속 물의 정령 ‘운디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물의 정령답게 결말에서 운디네는 강 속으로 투신하여 자살하지만, 산업잠수사인 크리스토프와 바다속에서 재회한다. 주목할 점은 <운디네>의 전체 서사가 여러 물의 공간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죽음을 매개한다는 사실이다. 옛 연인 요하네스와의 결별 이후,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처음 조우하는 카페에서부터 어항 속의 물이 그들을 덮치면서 물의 공간이 드러난다. 깨진 유리와 함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은 둘의 비극적 운명을 예고하는 상징적 오브제이다. 

한편 영화의 제목에서도 짐작 가능하듯, <어파이어>의 영화적 공간을 지배하는 요소는 바로 불이다. 물과 대비되는 불의 원소는 이전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어 온 불안감이나 두려움의 환영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물질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오히려 바다라는 물의 공간을 자주 보여주는 반면, 산불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영화 어파이어 @ 네이버 영화 어파이어 포토
영화 어파이어 @ 네이버 영화 어파이어 포토

더불어 <어파이어>는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서사적 양상을 보인다. 이전 영화들에서 독일의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문제를 배후에 둠으로써 독일이라는 국가 정체성과 독일 국민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켰다면, <어파이어>는 초기 작품들과 유사하게 단선적 서사를 유지하되 여름 해변을 찾은 젊은 청년들의 내적 심리와 욕망을 세밀하게 관찰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기술했듯, 유령적이고 모호한 분위기 속 등장인물의 일상과 내면을 쫓는 방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유령화되는 인물들, 실존적 존재로 수렴되다

그렇다면 우리는 페촐트 감독의 영화로부터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가? 물론 이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그것이 작품 이면에 내재된 독일의 역사적 사건에 관한 성찰이건, 해체되는 시공간의 작법을 파헤치는 이성적 판단이건, 멜로드라마 속 인물들의 사랑에 관한 감정적 공감이건, 모든 것은 관객에게 달려 있다. 다만 이러한 다양한 작법을 통해 페촐트 감독이 추구하는 바가 결국 인간 실존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가 재구성하는 시공간과 급작스러운 죽음들이야말로, 세계 속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꼽아 기다린다. 페촐트 감독이 물과 불을 잇는 또 다른 원소를 통해, 어떻게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할지 말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이 글은 필자의 논문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미학, 신비적 서사에서 실존적 사유로의 변주: <옐라>와 <운디네>, <열망>과 <피닉스>를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Vol. 50, 2023 중 일부 내용을 반영하였음을 밝힌다.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겸 서울사이버대 객원교수.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상임이사.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영화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