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이는 밤은 고요하다. 그러기에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삭막하거나 허전하기 보다는 흐뭇한 내용을 갖게 한다. 고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삼 의식하게 되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스스로를 다시금 발견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의 삶, 나의 위치, 우리와 자연의 관계를 그 본연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 「눈」 (박이문, 1930년~2017년) -
던져진 가을은 노란 잎들로 흔들린다. 흔들린 잎들이 계절의 흔적을 치우느라 소란스럽다. 야위어가는 흔적 위로 조용히 따뜻한 언어가 떨어진다. 떨어지는 자연의 미학은 이야기를 가락으로 전하며 화자가 된다. 하얀 시가 쌓인다. 절망 속 긍정과 고뇌 속 숙명을 향해 가는 길. 오늘(Heute)의 흰 바탕 위 하얀 사각형이 내일(Morgen)은 비어 있음으로 빛난다.
백석의 / ‘푹푹’ 눈은 / 절망 속 / 긍정 승화
문학의 갈래를 사계절에 비유하면 겨울은 시이다. 시의 특성인 형상성, 함축성, 그리고 음악성(운율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계절이 겨울인 것이다. 지난날 내린 눈들이 그림과 음악으로 살아나며, 하얀 시를 소환한다. 백석(1912년~1996년)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 백석 -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접근 방법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나, 내재적 접근 중 절대론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한다. 가난하고 쓸쓸하지만, 자신의 순수한 삶과 사랑을 지키고 싶은 의지를 가진 화자. 더러운 세상을 거부하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사랑하는 ‘나타샤’와 깊은 산골로 가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점층적으로 심화시킨다. 화자를 중심으로 ‘눈’~‘나타사’~‘흰 당나귀’는 하얀 색채 이미지를 형상화하며 현실을 초월한 이상과 사랑에 대한 소망을 강조한다.
총 네 연으로 이뤄진 이 시의 1연에서는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가난한 화자의 심정이 내리는 눈으로 감정 이입되어 대비된다. 겨울밤 닫힌 공간에 앉아 있는 화자가 처한 상황이 부정적 심상의 ‘푹푹’으로 상징되어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지며, 나타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2연은 사랑을 이루기 힘든 현실에 절망하던 화자가 청유형 종결 어미(-자)를 제시한다. 나타샤와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산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낸다. 3연에서 화자는 상상 속 나타샤를 통해 자기 위안을 위한 내면의 소리를 낸다. 사랑을 둘러싼 외부 현실에 대한 부정성~산골로 가는 행위의 정당성~사랑과 순수를 지키는 의지성을 위해 더러운 세상을 버리고자 한다. 4연은 현실적 절망을 극복한 상상 속 자아 긍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화자의 소망이 긍정적 심상의 ‘푹푹’으로 함께 한다. 음성 상징어를 사용한 청각적 심상이 역설적 기쁨의 울음으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이 시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고유한 개성을 드러낸다. 첫째, 현실과 상상의 이원화를 전제로 현실과 상상 간 자유로운 교환이 일어난다. 가난한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상상 간 간섭 현상이 발생하며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 경계의 모호성이 현실의 절망감을 떠나 상상의 긍정적 역동성을 강화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둘째, 시적 대상 중 ‘눈’은 현실과 상상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그 경계이다. 화자는 내리는 눈을 타고 현실을 떠나 상상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 내린 눈이 녹으면 부정적 현실에서 이상적 상상의 세계로 이어주는 매개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니, 푹푹 내리는 눈으로 형상화하여 방어 기제 역할을 하도록 한다. ‘나타샤’는 화자에 대해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며 상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객체이다. 현실에서는 고독을 배가하는 대상이지만, 상상에서는 사랑을 극대화하도록 하는 존재이다. ‘흰 당나귀’는 순수하고 투명한 화자의 꿈과 사랑을 상징하며, 상상 속 세계를 향한 화자의 소망을 기쁨으로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셋째, 표현상의 특징 중 제목에 나타나는 접속조사 ‘-와’는 ‘나’, ‘나타샤’, ‘흰 당나귀’가 서로 같은 자격으로 이어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주체가 상상의 세계를 향해 서로 수평적 동일체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눈’을 매개로 한 공동 운명체인 것이다. 이어서 보조사 ‘-은’(‘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등)을 통해 절대적 대상에 대한 상대적 제약성을 부각한다.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 상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 장애물로서의 의미를 덧붙이며 화자와 맞닿아있는 부정적 현실을 강조한다. 또한 통사 구조의 반복(특정한 문장 구조나 유사한 어구를 반복 또는 변용하는 것)을 통해 화자의 순수한 삶과 사랑에 대한 의지를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통사 구조 속 음성 상징어와 더불어 이상적인 상상 속 공간에서 나타샤와 살아가고자 하는 화자의 열망을 드러낸다.
백석의 눈이 푹푹 날리고 나리는 날. 절망 속 자아 긍정을 위한 해방의 시간을 가지며, 이상적 상상의 세계를 향해 그 하얀 매개체와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프로스트 / ‘밤 숲’의 눈 / 고뇌 속의 / 숙명 추구
깊은 산골에 내리는 눈과 함께 늦은 저녁 숲을 찾는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년~1963년)의 「눈 내리는 밤 숲에 서서」(1922년).

“이게 누구의 숲인지 나는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서/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려고/ 내가 여기 멈춰서 있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내 조랑말은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밤/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 근처에 농가 하나 안 보이는 곳에/ 멈춰 서 있는 게 이상하다고 느꼈나 보다.//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듯/ 목 방울을 흔들어 본다./ 다른 소리라고는 숲을 스쳐가는/ 부드러운 바람과 솜처럼 하늘거리며 내리는 눈송이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두우며 깊은데/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 몇 십리를 더 가야 한다./ 잠들기 전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 「눈 내리는 밤 숲에 서서」(1922년),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
시는 눈 오는 밤 숲의 풍경을 그린다. 화자는 어느 눈 내리는 어두운 밤에 조랑말을 끌고 길을 가다 숲 가에 잠시 멈춘다. 숲의 소유주와 화자는 마을과 숲의 관계처럼 이질적이며 묘한 수직의 여운을 남기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숲은 고요히 눈으로 쌓여 덮여간다. 말 방울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부드럽게 내리는 눈송이 소리만이 숲의 정적을 더해 간다. 자연의 소리와 다른 조랑말의 목 방울 소리는, 이질적 긴장감으로 팽창되며 정적인 분위기를 깨뜨린다. 가장 어두운 밤이지만 편안한 안식을 위해 더 먼 길을 가야 하는 화자의 고뇌 속 숙명을 드러낸다.
네 연으로 구성된 이 시의 1연에서는 숲을 중심으로 집과 마을이 형상화의 수단으로 등장한다. 숲의 소유주는 마을에 있고, 화자는 마을에서 떨어져 숲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 어둠 속 깊고 아름다운 숲의 주인은 화자라는 것을 교감하려는 듯하다. 2연은 어두운 밤의 시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숲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물질적 소유주와 심미적 소유주 사이에서 혼동스러운 정서를 조랑말로 의인화한다. 3연에서는 자연의 소리가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목 방울 소리를 통해, 숲을 향한 본성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로 복귀해야 하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4연은 어둡고 깊은 아름다운 숲을 떠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먼 길을 떠나야 한다고 한다. 화자의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든, 삶을 위한 새로운 성취와 마무리를 위해 가야만 하는 길을 향한, 고뇌 속 숙명에 대한 엄숙한 선언인 것이다.
이 시가 갖는 생명력을 두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보자. 첫째, 내용 중 ‘눈 덮인 숲’이라는 자연에 대한 인식의 태도이다. 눈 덮인 한밤중의 숲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어둡고 깊다. 아름다움이 친근감과 머무름이라면, 어둡고 깊음은 낯섦과 두려움이다. 삶의 여정에서 눈 덮인 숲과의 만남을 통한 아름다움의 교감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 소리에 의해 낯섦과 두려움으로 바뀐다. 낯섦과 두려움은 더 가야 할 먼 길에도 숙명처럼 같이 하지만, 이는 우리가 태생적으로 안고 가야 할 약속인 것이다. 둘째, 형식 중 소유격이다. ‘-의’(‘누구의’, ‘그의’)를 언급하는 화자의 독백에서 파토스(pathos)를 느낀다. 화자가 언급한 숲의 소유주인 ‘그’는 숲에 있지 않고 마을에 있다. 소유주와 소유물 사이에 시간과 공간적 거리가 생긴다. 이 틈새에 숲을 보며 서 있는 존재인 화자. 숲 소유주인 ‘그’는 제도와 물질적 자원으로서 숲을 갖고 있음에 그친다. 그 숲이 어두운 밤과 대비되며 빛나는, 하얀 눈과 어우러져 호흡하는 아름다움은 가질 수 없다. 아름다움과의 교감을 통한 무형적 심미적 자원의 소유주는 화자인 것이다. 다음으로 운율 중 각운(rhyme, 행이나 연의 끝에서 음소나 음소군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대한 것이다. 1연에서 각 행의 끝 단어는 know, though, here, snow. 3행의 here를 제외한 세 단어는 발음이 [ou]로 같다. 이후 2연~3연 모두 1,2,4행은 발음이 같고 3행만 발음이 다른 구조를 보인다. 또한 1연의 3행 발음이 2연의 1,2,4행의 발음과 같고, 2연의 3행 발음이 3연의 1,2,4행 발음과 같다. 마지막 4연의 각 행 끝 단어는 3연의 3행 발음과 동일하다. 전체 시의 운율 구조가 AABA~BBCB~CCDC~DDDD의 각운 형태를 보인다. 눈 내리는 숲의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살아나도록 하기 위해 시각적 심상을 운율로 재현한 것이다.
프로스트의 눈이 한 송이 두 송이⋯소리로 내리는 날. 고뇌 속 숙명을 향한 약속의 시공간을 지키기 위해, 꿈과 희망의 세계를 노래하는 추임새를 넣으며 미래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백석과 / 프로스트 ‘눈’ / ‘비어 있음’ 향한 / 내일(Morgen)의 길
백석의 눈이 날리듯 나리며 푹푹 쌓이고, 프로스트의 눈은 고요한 소리를 내며 숲을 덮는다. 흰색 위에 하얀색이 그 경계를 찾아 하늘거리며 채색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9년~1935년)의 「흰 바탕 위의 흰 사각형」(1918년).

말레비치는 물질성의 제로화를 위해 대상의 재현을 배제한다.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사각형, 원 등)와 색채(하얀색, 검은색)를 그림의 절대적 요소화 한다. 현실 세계의 대상 소재를 재현하던 기존 그림 사조를 떠나, 무엇과도 닮지 않은 순수한 대상 자체를 표현하며 창작한다. 현실 세계에 대한 직간접적 암시 또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시각적 단서를 모두 없앰으로써, 보는 이가 대상의 관념적 오류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투명한 감상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Avant-garde, 기존 예술 사조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를 부정하고, 실험적•급진적•비전통적인 새로운 예술 개념을 추구한 혁신적 움직임)의 핵심 축으로 전개된다. 이는 후에 직접적으로는 현대 추상 미술(Abstract Art), 간접적으로는 미니멀 아트(Minimal Art)에 큰 영향을 미친 절대주의(Suprematism)의 출발점이 된다. 그의 작품 중 절대주의의 완성을 이룬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 것이 추상 캔버스 유화인 「흰 바탕 위의 흰 사각형」(White on White)이다. 흰색 바탕에 흰 사각형 도형을 그린 이 작품은 절대주의의 이론적 논리로 수렴하며, 말레비치 그림 가치관 발산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대상의 재현이, 나타내고자 하는 제재의 순수하고 투명한 심미적 가치를 오염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물을 직간접적 사실로 표현하는 구상 미술(Figurative Art)과의 타협을 거부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기하학적인 형태에 하나의 색만을 사용하는 파격을 보여준다. 대상에 대한 물질성의 배제가 순수한 창조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시공간 영역에 도달한 것을 ‘비어 있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어 있음’은 공(空)이 아닌, 무(無)로 인해 빛나는 눈과 다름없다.
백석의 흰 눈과 프로스트의 하얀 눈이 캔버스를 찾는다. 한 해를 마감하며 선물 같은 눈이 깊은 산골에 ‘푹푹 나리고’, ‘어둡고 깊으며 아름다운’ 눈이 숲을 덮는다. 백석과 프로스트를 통해 캔버스를 채색해 가는 우리의 눈은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하는지. 새로운 삶을 향해 가는 새해의 길이 절망 속이라도 자아 긍정을 하며, 고뇌에 머무르지 않고 숙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흰 바탕 위의 하얀 사각형은 비어 있음을 통한 가치의 완성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내일을 그린다. 눈이 내린다. 욕망의 수직 논리는 녹고, 욕망의 수평 논리가 쌓여간다.
“그리고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빛나고. 내가 걸어가게 될 길 위에서 행복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리니. 태양이 숨 쉬는 이 땅의 한가운데서…. 푸른 파도 일렁이는 저 넓은 바닷가로 조용히 천천히 내려가리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볼 때 행복의 고요한 침묵이 우리 위에 내릴 것이리라.”
- 「내일(Morgen)」, 존 헨리 맥케이(John Henry Mackay)(1864년~1933년) -
자아 긍정과 숙명의 자화상을 향해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년~1949년)의 가곡 「내일(Morgen)」(1894년)을 들으며 오늘(Heute)을 걷는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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