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스 빈터베르크만큼 공동체와 폭력의 관계에 대해 천착한 작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셀레브레이션>은 한 가족의 생일잔치을 통해 가족공동체 내부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품이었고, <디어 웬디>는 공동체가 지닌 지울수 없는 그 원천적인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서브마리노>도 폭력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이탈당한 주인공을 통해 그 폭력성에 대한 구원을 모색하는 영화였다. <더 헌트>도 이러한 감독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아 있다. 좀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더 헌트>는 전작들 보다 더욱 객관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영화가 굳이 차갑게 보이려하지 않음에도 그 냉기를 참을 수 없는 것은 빈터베르크의 발전된 객관적 표현에 대한 관객의 필연적인 반응일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공동채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영화가 시작하면 주인공 '루카스'와과 그 친구들이 추운 날 호숫가에서 놀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윽고 한명이 알몸으로 추운 호숫물에 몸을 던진다. 추운 호숫물에 몸이 얼어 쥐가난 그는 외친다. "제길, 몸에 쥐가 났어! 누가 나 좀 꺼내줘!"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이 장면에서는 밝고 경쾌한 음악이 나오고 있으나, 무섭게 표현한다면 충분히 무섭게 표현할 수 있는 일상의 폭력이다. 도입부부터 그는 공동체가 지닌 본성적 폭력이라는 질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공동체적인 폭력에 유일하게 대항하는 인물이 루카스이다. 그는 모두가 웃고 있을 때, 혼자 "내가 갈께!"라고 외치며 차가운 호숫물에 옷을 입고 들어간다. 이런 루카스의 헌신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모습은 영화의 대부분에서 루카스라는 캐릭터의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캐릭터성이 된다. 그는 정말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생각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루카스를 궁지로 몰고 간다. 루카스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유치원생, 클라라에게 사려깊은 조언과 행동을 취해 해주었지만, 그 조언은 루카스의 앞날을 바꿀 이야기를 클라라에게 하게 할 뿐이고, 테오와의 절친한 친구라는 친분관계는 공동체의 작동에 의하여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 그의 성실함은 공동체 안에서 순식간에 그를 싸이코패스로 만든다.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근본적인 폭력에 무언의 대항을 하던 루카스는 순식간에 마을의 공공의 적이 된다. 공동체의 근원적 폭력성은 빈터베르크에게는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빈터베르크에 있어서는 루카스가 공동체에게 폭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폭력성에 대항하는 인물은 공동체에 필요충분조건을 위협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항했던 인물이 도리어 폭력을 대변하는 인물로 낙인찍히는 순간은 최소한 빈터베르크에게는 지극히 필연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루카스를 사냥감으로 공동체의 필요충분조건인 폭력성이 어느 때 보다 확실해지자, 실제로 공동체는 서로 연대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에 클라라를 관심이 없던, 그리고 서로에게 그닥 연대를 가지고 있지 않던 가족은 서로를 연대하기 시작하고, 그러한 연대는 테오의 주변인물들을 연대시키며 그 연대를 확장시킨다. 그러한 연대는 폭력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루카스가 배척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공동체적 연대는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퍼져나가고, 루카스는 말그대로 호모 사케르가 되어버린다. 여기에 루카스의 연대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그의 아들인 마구스가 마을에 오고, 그의 아버지가 당하는 끔찍한 폭력을 물리적으로 확인한 마구스는 그의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한다. 이를테면 공동체끼리의 폭력을 시작하는 것인데, 이러한 공동체끼리의 폭력은 서로를 배척시킬 뿐이다. 이때, 빈터베르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장면을 관객에게 던진다.
마을공동체에 의해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아버지의 체포로 집에조차 돌아갈 수 없게 된 마구스는 그의 대부인 브룬의 집에 찾아간다. 그 장면은 <더 헌트>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다. 브룬의 집은 마치 공동체의 룰에서 벗어난 듯한 곳이다. 브룬의 집은 공동체안에 있되, 공동체에서 실존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그곳은 공동체가 지닌 폭력의 영향에서 벗어난 곳이다. 그곳에서 마구스는 아버지의 무혐의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곳에 있는 사진들을 본다. 그 사진을 보며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듯, 미소를 짓던 마구스는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서 그의 표정은 어둡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는 그곳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본 것인가? 아니면 사냥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알아버린 것인가? 그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렇게 천천히 정합적으로, 그러나 극단적으로 밀고 붙이던 영화는 루카스를 끝까지 몰지 않는다. 영화는 그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주고, 루카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기회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크리스마스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이 영화가 말하고 자하는 바를 잡약적으로 보여준다. 쇼핑을 갔다가 만신창이가 된 루카스는 다시 평소대로 크리스마스에 성당을 가지만, 역시나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사가 시작되고 당하기만 하던 루카스는 갑자기 돌변하여 테오를 살의넘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표정을 본 테오는 무언가 위협을 느끼고 아그네스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마침내 성당에서 캐롤이 울려퍼지는 그 때, 루카스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테오를 사냥한다. 루카스는 테오에게 책임을 물으며 그를 물리적으로 가격한다. 그리고 나서야 테오는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안의 사회가 폭력에서 시작했듯, 단호하게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루카스의 아들 마구스가 사냥면허증이 나와 사냥으로 성인식을 하는 날, 그는 누군가에 의해서 저격미수를 당한다. 이 장면은 아마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루카스와 그의 절친인 테오와 그의 집에서 그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테오의 아내인 아그네스는 웃으면서 중요한 말을 하다 툭 던진다. "루카스 당신도 총을 아무대나 겨누는 것은 아니지?" 결말에서 이 대사는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한다. 그가 정말 의도적인 저격미수가 된 것인지 아는 것이 모호한 것이다. 빈터베르크는 그 모호함을 통해 폭력을 조건으로 작동하는 공동체라는 이름의 연대가 가진 베타성을 되묻는다.
글‧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신인평론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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