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5월 11일, 나치 독일의 친위대 중령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에게 납치된다. 유대인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아이히만은 패망한 독일을 탈출해 아르헨티나에서 15년 동안이나 숨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로 끌려가 예루살렘의 감옥에 수감 된 아이히만의 재판은 1961년 4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잡지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현장에서 지켜보게 된다. 독일에서 태어난 아렌트는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 마가레테 폰 트로타가 연출한 <한나 아렌트>(2012)는 아렌트의 일생 가운데서 아이히만의 재판과 관련된 시기를 다루고 있다. ‘5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열차에 태웠던’ 아이히만은 늙고 피로한 모습으로 유리로 둘러싸인 피고인석에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아이히만의 장면은 모두 현장을 기록한 영상 자료를 사용했다. 따라서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 일부나마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아이히만은 왼손에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자신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명령을 받고 명령에 따랐습니다. 생사에 관계없이 명령을 집행한 것입니다. 제가 한 일은 행정 절차의 작은 역할입니다. 열차가 움직이도록 하는 다른 역할은 다른 부서에서 실행했습니다. 고발된 내용은 입증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공무원은 충성 서약을 합니다. (신념에 찬 단호한 표정과 어조로) 서약을 어기는 건 해악입니다. 이 생각은 여전합니다.” 그뿐 아니라 아이히만은 총통(히틀러)이 자신의 아버지를 반역자로 지목했다면, “사살했을 것입니다. 충성심이 나의 명예이고, 총통의 명령은 법입니다”라고 답한다. 또 임무와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 적은 없느냐는 물음에, “그렇게 되면(양심을 버리지 않으면) 국론이 분열됩니다. 국가가 분열되고 서로 제각각 흩어집니다.” 가족 중에 혼자 살아남은 생존자가 한 맺힌 증언을 해도,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가스실에서 희생된 사례를 나열해도, 한 증언자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바닥에 쓰러져도, 아이히만은 시종일관 짜증 어린 표정으로 유령처럼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며 변호할 궁리만 찾는다.

아렌트는 이러한 아이히만에게서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으스스한 악마가 아니라 보잘 것 없을 정도로 평범한 관료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면, 폭압 체제가 요구하는 대로 아주 열렬히 자기 업무를 충실히 수행한 자가 수많은 사람을 사지로 보내는 잔악한 행위를 했지만, 열차만 움직이면 자기 일은 다 했으므로 어떤 책임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인데, 아이히만 같은 인간은 사유하지 않고 좀비처럼 단순히 명령에 복종한 결과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정상적인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을 저버리게 되면 사람이기를 거부한 인간의 행위로 귀결되며, 더 이상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전례 없는 악행을 자행하게 된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만일 아렌트가 여기까지만 주장했다면 그렇게까지 큰 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뉴요커>의 기고문에서 유대인 지도부를 가감 없이 비판한다. “유대인 지도부는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식으로든 어떤 명분으로든 나치와 협력했다. 사실대로 말해 유대인들이 지도자 없이 비조직적이었으면 혼란과 큰 고통을 겪었을 테지만, 4백50만에서 6백만이라는 숫자의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학자의 양심에 따라 진실을 드러낸 이러한 주장에 유대인들 대부분이 무분별하게 분노한다. 그들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옹호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유대인을 쇼아의 공범으로 매도했다는 비난을 쏟아붓는다. 이스라엘 정보부의 협박과 유대인 독자들의 위협 그리고 오랜 친구들과 결별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아렌트는 용기 있게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간다.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게 된 원인을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같은 인간은 현대사회에 아주 많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내란 사태를 보면 아이히만처럼 어떤 반성도 죄책감도 없이 자기변명과 변호에 골몰하는 인간들이 정말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추악한 임무라도 자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좀비들이 떼 지어 출몰하는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악은 평범하면서 극단적이다. 선만이 깊고 근본적이다. 사유한다는 건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말할 능력이다. 내가 바라는 건 사람들이 생각의 힘으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칠 때 파국을 막는 것이다.” 아렌트의 답변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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