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인 윤동주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날이다. 윤동주는 1917년에 태어나 광복을 4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시집을 한 권도 출판하지 못한 그가 시인의 칭호를 처음으로 얻었던 때는 고향 땅에 세워진 묘비에서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쓸 수 없던 때에 우리 말, 특히 쉬운 말로 시를 썼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동시를 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고 다짐한다. (1941년 11월 20일) 그러나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하면서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라며 참회록을 쓴다. (1942년 1월 24일) 참회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깊이 뉘우쳐 고백한 기록을 의미하는데 스물여섯 젊은 나이 시인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구하라> 맹자 이루 상
남을 사랑하더라도 (남이 나를) 친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인함을 돌이켜보고, 남에게 예로 대해도 답례하지 않으면 그 공경하는 마음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행했는데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자신에게 돌이켜 구해야 하니 그 자신이 바르게 되면 천하가 귀의하게 되는 것이다.
반구제기(反求諸己), 윤동주가 즐겨 읽고 메모해 놓았던 맹자의 구절이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잘못을 모두 다른 이에게 돌리고 끝까지 반성이란 없는 사람들 때문에 부끄러움은 우리 몫이 되어버린 요즘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매일 매일 마주하고 있는 우리에겐 시인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인지 그의 ‘부끄러움’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도무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선한 의지와 실천이 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한편으로 시 한 구절이 사람들에게 얼마큼의 힘과 의지가 될까 하는 회의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이 써준 동시들을 가만히 읊조리다 보면 시가 그림이 되어 떠오르며 마음속으로 작은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개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1936년 12월 추정)
눈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 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1936년 12월)
시는 시인의 삶이다.

시비 뒤쪽으로 핀슨관 사진 © 김정희
무얼 먹구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구 살구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구 살구
별나라 사람 무얼 먹구 사나 (1936년 10월)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삶을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 역사는 그들의 것이다.
바닷가 사람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골사람은 감자를 구워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나라이면 좋겠다.
봄
우리 애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윤동주가 광명 중학교(1936년 10월) 때 쓴 동시이다. 맑은 날 마당에는 가벼운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고, 아기가 자는 방 바로 옆의 부엌에는 고양이가 부뚜막에 앉아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 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기일지라도 아이들은 커가고 있고, 하늘 한가운데서 해님은 늘 쨍쨍 빛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친구

윤동주 시인의 연희 전문 시절 기숙사
연세대학교 핀슨관 국가등록문화재 제770호 © 김정희
귀뚜라미와 나와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1938년 추정)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고, 누가 달라면 책이나 셔츠나 거저 주는”시인에게 친구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윤동주 시집을 전해준 정병욱(1922~1982)이 없었다면 우리는 윤동주의 시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존재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후배이자 친구였던 정병욱은 언제나 윤동주를 닮으려 애썼으며, 윤동주를 가슴에 품기 위해 흰 그림자(백영)를 호로 삼았다. 흰 그림자(白影)는 윤동주가 도쿄에서 쓴 시(1942년 4월 14일)의 제목이다.
내일은 없다 - 어린 마음이 물은-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1934년 12월 24일
‘어린 마음이 물은’이라는 부제가 붙은 <내일은 없다>에서 열일곱의 윤동주는 ‘오늘이 반복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새날을 찾기위해 애쓰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 전문에 입학하던 1938년은 일제에 의해 3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된 해이다. 조선어 교육과 한국어 사용을 사실상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던 일제는 1939년 각급 학교의 조선어 과목을 전폐하고(4월), 각 신문 잡지를 폐간해 나간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실시하고(2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8월) 후 1941년에는 친일 문인단체를 결성(6월)했고, 관제 단체를 통해 일본어 보급 운동(8월)을 펼쳤고, 친일 선전 활동조차 일본어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말로 시를 쓴다는 것, 우리말로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든다는것,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의 시집을 보관한다는 것들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일들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우리말로 시를 썼고, 한 권의 시집을 엮었고, 친구의 가족(어머니였다)은 그 시집을 지켜냈고, 마침내 친구는 우리에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전해줄 수 있었다.
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1937년 초로 추정)
언젠가 어둠 속에서 빛나던 반딧불이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작디작은 반딧불이 한 마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밝게 주위를 빛내며 날고 있었다. 어두운 연말 현실의 어둠을 밝혀 줄 반딧불을 찾아서 나아가야겠다. 달 조각을 주으러 가야겠다. 그렇게 주운 달 조각으로 새로운 해를 맞으며 윤동주의 시를 통해 가슴 속 작은 희망의 불씨를 켤 수 있으면 좋겠다.
글·김정희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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