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정치란 복잡하고, 어렵고, 때로 부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보는 정치인들의 설전, 국회에서 벌어지는 난투극, 그리고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 정치라는 단어는 왠지모를 피로감을 동반한다.
그런데, 정치가 정말 그렇게 멀고 어렵기만 한 것일까? 정치가 내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까?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정국을 보며, 거리에서 벌어지는 응원봉 시위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치를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정치란 우리 곁에, 바로 일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친구들과 어디로 놀러 갈지 정하는 것, 회식 메뉴를 정할 때 생기는 작은 갈등, 이런 사소한 선택의 순간도 사실 정치의 한 부분이다.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다수의 결정을 따르거나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정치란 거창하고 권력적인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작은 예술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정치에 대한 작은 철칙, 그리고 위로
결국 사람은 누구든 정치적인 삶을 산다. 아무리 회피하고 싶어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 중인 대학에서 내가 지키는 철칙 중 하나는 학생들 앞에서 가급적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교수자이기 이전에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내 견해에 일말의 영향이라도 받아 스스로의 관념이나 세계관에 의도치 않은 구애를 받을까봐 만든 교육 신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얼마 전, 강의를 수강중인 학생이 선뜻 ‘정치의 예술화’라는 주제로 학술에세이를 써냈다. 정치인이 예술적 기법을 활용해 국민의 감정을 건드리고, 통합을 이끌어내는 방식에 대한 연구형식의 에세이였다. 글의 서두에서 학생은 이렇게 주장했다.
“정치의 예술화는 정치인이 예술의 여러 갈래를 통해 국민의 통합을 꾀하고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정치적인 이유로 요즘같이 세계가 어수선한 시기, 이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정치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외면하고 싶다면, 정치가 쉬워질 필요가 있다. 정치가 친근해질 필요가 있다. 정치가 문화가, 나아가 예술이 될 필요가 있었다. 정치가 어떻게 일상 속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곱씹고나니 요즘 학생들을 그러니까 청년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지,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사람으로써 새삼 미안해지기도 했다.
정치가 예술이 될 때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통치자가 예술을 통해 시민의 도덕성을 고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의 감정과 이성을 동시에 자극해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플라톤의 말처럼 정치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면 어떨까? 레이건이 연설을 통해 국민의 마음을 울리고, 젤렌스키가 패션으로 전쟁 속에서도 국민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가 예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국민은 정치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정치의 예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으며, 정치적 언어는 날카롭고 대립적이다. '내부 총질'과 같은 표현이 난무하고, 국민을 실망시키는 사건들이 반복된다. 하지만 정치가 더 예술적으로 변화한다면 어떨까? 예술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삶을 변화시키듯, 정치도 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정치를 어렵고 복잡하게 느낀다. 하지만 정치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작은 선택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예술이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정치도 우리의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
예술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며, 누구나 쉽게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정치라는 단어는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치가 예술처럼 다가온다면, 우리는 정치에 대해 덜 피로감을 느끼고,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 정치가 예술처럼 스며들어야 할까?
그 이유는 접근성과 공감에 있다. 현재의 정치는 기술적이고 복잡하며, 국민들이 쉽게 이해하거나 참여하기 어렵다. 반면 예술은 직관적이다. 복잡한 메시지도 그림 한 장, 음악 한 곡으로 쉽게 전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도 국민들에게 보다 친숙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 중에도 국방색 티셔츠를 입고 국민 앞에 선 것은 국민과 함께한다는 상징적 메시지였다. 이는 단순한 옷차림이 아니라 국민들과의 연대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예술적 표현이었다. 국민들은 젤렌스키의 옷을 보며 '우리와 함께하는 지도자'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정치가 예술의 언어를 배우고 활용할 때, 국민들은 정치에서 위로를 받고, 정치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정치는 더 이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정치를 어렵고 복잡하게 느낀다. 하지만 정치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작은 선택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예술이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정치도 우리의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
예술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며, 누구나 쉽게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정치라는 단어는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정치가 예술처럼 다가온다면, 우리는 정치에 대해 덜 피로감을 느끼고,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술적 정치의 그림자
하지만 예술적 정치가 언제나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힘을 지닌다. 이 힘이 잘못 사용될 경우, 역사는 우리가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아돌프 히틀러는 퍼레이드, 상징적 기념식, 건축과 같은 예술적 수단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예술적 연출은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집단적 열광 상태를 유도하며 권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의 예술화는 대중 선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를 낳았다.

정치의 예술화, 양날의 검
따라서 정치의 예술화는 양날의 검과 같다. 예술이 가진 힘. 즉,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상처를 위로하는 방식이 정치에도 접목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예술적 힘이 선동과 독재로 이어질 경우, 사회는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정치의 예술화는 단순히 정치에 감성과 감상을 덧입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예술이 그렇듯, 정치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소원하는, 지금 이 시기에 필요한 '정치의 예술화'가 아닐까.
*해당글은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박정원 학생(1004jeongwon@naver.com)의 학술에세이 「예술적인 정치, 위로하는 정치: 정치는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가?」 (2024)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일부를 인용해 작성했음을 밝힌다.
이 글은 예술과 정치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정치의 예술화가 국민 통합과 위로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정치의 본질적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 예술의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적용하고자하는 유의미한 글로써, 현 시국에 맞춰 소개하고 싶었다. 특히 그동안 예술이 역사적으로 정치적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으나, 이제는 정치가 예술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며,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긍정적인 도구로서의 정치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로널드 레이건의 연설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의 패션을 사례로 삼아, 예술적 기법이 정치적 목적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를 유의미하게 분석했다.
아래에 박정원 학생이 쓴 학술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옮긴다.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 ‘좋은 정치’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학계가 정치를 분석하고 대안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정치 본연의 목적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더불어,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정치가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는지 분석함으로써 정치인들로 하여금 정치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하는 데 본 연구의 가치가 있다.
최근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준 ‘12.3 비상계엄 사태’는 또다시 국민적 분열로 이어졌다. 여당과 야당 가릴 것 없이 분열의 언어를 쏟아내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장에서 기정사실로 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사례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국민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으로 다시금 발현된 지금, 정치권이 국민 분열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비상계엄 사태로 놀란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정치인의 몫이다. 정치의 양극화와 분열이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전술했듯, 갈등은 정치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정치의 성공은 이 갈등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필자의 꿈은 정치가 본질을 되찾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Colin G. Clark, 1905-1989)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우리는 정치꾼이 아닌 정치인이 필요하다. 필자가 이 에세이를 힘주어 쓴 이유이다. " (본문, 12쪽)
글·이지혜(이해이)
문화평론가. 2022년 문화전문지 《쿨투라》 제16회 영화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한국문화콘텐츠와 문화현상을 연구한다. 월간 《쿨투라》에 영화평론을, 르몽드 문화톡톡에 문화평론을,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에 에세이를 기고했다.
· 인스타: @leehey_cine · 이메일: leehe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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