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갈기갈기 찢어진 듯 위태로운 인물들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감독이다. 첫 장편 <리노의 도박사>(1996)부터 <매그놀리아>(1999)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마스터>(2012) <팬텀 스레드>(2017) <리코리쉬 피자>(2022)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 속 인물들은 귀퉁이 한켠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다 차오르지 못한 달처럼 이지러져 있다.
그가 응시하는 것은 히피와 같은 특정 집단 속 인물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언제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위험요인을 안고 있다는 점에 천착한다. 다만 누군가는 이를 억누르고 있고, 누군가는 좀 더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감독은 각 주체들을 둘러싼 베일들을 모두 벗겨낸다. 그가 만든 화면 안에서만큼은 스스로 찢어짐을 받아들이고 표출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그리는 과정은 과감하며 도발적이다. <매그놀리아>에선 개구리 비를, <데어 윌비 블러드>에선 석유 비를 마구 뿌려댄다. 스크린 안의 인물들에게 마음껏 펼쳐보일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동시에 자신만의 질문을 그들에게 마구 던지며 함께 놀이를 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전 작품들과 달리 <팬텀 스레드>는 감독이 찢어진 주체들의 파편을 잘개 쪼개, 깊숙하게 숨겨놓은 작품이다.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은 1950년 영국 최고의 의상 디자이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세심하게 머리를 다듬고 옷을 입으며 결벽에 가까운 완벽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드콕 역시 찢어진 주체에 해당한다. 그 파편 중 가장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으로 부각된 파편일 뿐이다. 그 파편의 핵심은 자신의 유년에 대한 과도한 연민이다. 재혼하는 어머니를 위해 웨딩드레스를 만들었던 레이놀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만 집착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이놀즈의 얘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어머니보다 자신에게 방점이 찍혀 있다. 자신이 얼마나 그 웨딩드레스를 열심히 만들었는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얘기로 가득하다. 그렇게 레이놀즈는 그 순간을 박제하고, 이를 매일 복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 알마(빅키 그리엡스)는 레이놀즈가 매일 만드는 드레스에 가장 적합한 뮤즈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만난 첫날부터 치수를 재고 드레스 재단을 준비한다. 그리고 새벽마다 알마를 깨워 이를 반복한다. 알마에게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찾아 헤맨 느낌이요”라고 말하는 것 또한 보통 연인들이 주고받는 사랑의 언어가 아니다. 어머니는 충족시켜 주지 않았던, 자신의 미학을 완성시켜 줄 사람을 만난 것에 대한 환희에서 나온 말이다.
레이놀즈는 깊숙한 폐부 속에 존재하는 파편들을 매우 작은 공간에 숨겨둔다. 드레스에 솔기를 만들어 어머니의 머리칼을 넣어두기도 하고, 어떤 말을 적어 넣어두는 식이다. 옷을 만든 주체 자신만이 알고 있고, 옷을 입는 대상은 영원히 알기 힘든 은밀한 행위다.
그런데 알마는 레이놀즈가 솔기 안에 숨겨뒀던, 그의 가장 치명적인 파편을 발견한다. “나는 저주받지 않았다”라는 문장이다. 여기엔 레이놀즈가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배어있다. 박제된 시간 속에 자신을 꽁꽁 가둬두곤, 한편으론 자신이 저주받은 게 아닐까 하는 강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영화가 절반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이 베일을 벗겨내는데, 그 이후의 변화는 매우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레이놀즈의 치명적인 파편을 발견한 알마는 차가울 정도로 과감하다. 알마는 그 문장이 담긴 솔기를 주저하지 않고 잘라버린다. 이 행위의 의미는 전후 쇼트의 연결 구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알마는 솔기를 잘라내기 이전 레이놀즈에게 독버섯을 몰래 먹여 일부러 아프게 했다. 그렇게 그를 눕혀놓고 옷 수선을 하던 중 솔기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솔기를 자른 직후의 쇼트에선 알마와 레이놀즈의 힘의 전복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레이놀즈가 방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환영을 보던 중 알마는 방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환영과 알마는 잠시 함께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환영은 사라지고 만다. 알마가 레이놀즈의 박제된 시간을 부셔 버렸으며, 이 자리에 자신의 시간을 채워넣을 것임을 암시한다.
레이놀즈의 찢어진 주체는 알마를 통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한다. 알마에게 열망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지만, 이미 힘의 우위를 점한 알마는 이를 해소하기 시작한다. 알마는 잘게 쪼개져 은밀한 솔기 안에 숨어 있던 그의 욕망의 파편들을 주워담아 자신의 커다란 욕망의 세계로 이전시킨다. 이는 레이놀즈가 극도로 싫어했던 새해 전야 파티가 벌어지던 곳에서 이뤄진다. 새해 전날, 알마는 춤을 추기 위해 이곳에 가려 하고 레이놀즈와 크게 다툰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반대에도 이곳에 혼자 가서 시간을 즐기고 있고, 레이놀즈는 초조한 마음에 그곳으로 간다.
이때 한가지 이상한 점은 레이놀즈가 소란 속에 사라진 알마를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찾아나서는데, 알마는 한 구석에서 마치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알마가 머무르던 레이놀즈의 의상실은 철저하게 레이놀즈의 통제 하에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알마는 자신이 그를 통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를 이끌어낸다. 마지막 알마의 상상 속 장면에도 이 공간이 다시 나온다. 상상 속에선 알마와 레이놀즈가 이곳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레이놀즈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얌전히 알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을 뿐이다.
이는 찢어진 주체의 욕망을 아예 뺏어버린 것과는 다르다. 오랜 시간 깊숙하게 잠들어 있던 욕망의 파편을 꺼내들게 한 것뿐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다. 알마는 그 대상을 자신으로 설정하고, 욕망이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여기에 영화는 독버섯이란 강렬한 메타포의 무기까지 배치해 자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관객들이 영리함과 영악함을 오가는 알마라는 존재에 레이놀즈와 함께 빠져들게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찢어짐을 잘못된 하자를 지닌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속성으로 인정하고 끌어안는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글·김희경
인제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상물등급위원회 자체등급분류 사후관리위원,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사무총장, 한국영화학회 대외협력이사, 은평문화재단 이사, 영화평론가, 만화평론가로 활동. 前 한국경제신문 기자, 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경영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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