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의 나라 대한민국
지금 당장 페스티벌을 검색해보면 눈꽃, 얼음낚시, 겨울 먹거리, 불빛, 해맞이로 구분되어 있고 지역, 월별로 80여개 가 넘는 축제의 현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봄꽃놀이에서 시작된 벚꽃 축제부터 겨울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전국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서울의 겨울 축제는 몇 년째 “전통과 현대, 예술과 기술, 도시와 자연 등 빛을 주제로 다양한 서울의 모습을 담은 서울 최대의 겨울 축제”로 홍보하고 있는데 내용이 모두 영어로 쓰여 있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
광화문 오프닝 세리머니: 2024. 12. 13.
서울라이트 광화문: LUMINOUS AXIS
서울라이트 DDP: VIVA WINTER
서울콘: SEOULCON
청계천 서울빛초롱축제: SOUL LANTERN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SNOWFLAKE PLAZA
광화문 광장 광화문 마켓: SOUL TOWN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행사: THE MIDNIGHT SUN
한글로 써있는 곳을 찾아보아도 마찬가지다. 서울윈터 페스타 올해의 주제로 ‘서울에서 펼쳐지는 마음의 빛, 소울 프리즘(SOUL PRISM)’ 서울라이트 광화문, 광화문 마켓, 서울빛초롱축제‘소울 랜턴’, 서울라이트 DDP, 서울콘, 제야의 종 타종행사 및 새해맞이 페스티벌...

심지어 일본말로 된 축제도 생겼다. 이름하여 ‘빨간오뎅 축제’ 지금 우리가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지 알수가 없다. 모두 시에서 주관하는 행사들이다.
축제의 시작
축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전 농사를 지어 추수가 끝난 뒤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낼 때부터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축제가 항상 즐겁고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청준 장편 소설 『축제』에서 축제는 어머니의 장례이다. 작가는 1996년에 발표된 이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을 남은 사람들이 망자를 보내는 씻김굿처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씻김굿은 망자의 천도를 위한 굿이다. 굿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소리를 하고 춤을 추고 먹을 것을 나누는 행위가 결국은 축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며 공동체의 결속이 느슨해지면서 장례식도 결혼식도 축제처럼 많은 이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가족끼리 조용히 치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대한민국이 축제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면 평소 맺힌 것이 많아서 축제를 통해 풀어야 하는가?
시간의 통제
통행금지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통금이 해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미군정 시기부터 37년간 지속된 통금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당연히 통금이 있었다.

“순작법(巡綽法)을 엄하게 하였다. 삼군부에서 청하기를 이제부터 초경 3점 이후 5경 3점 이전에 순라를 범하는 자를 모두 가두소서.” 태종실록 1401년(태종1년) 5월 20일
인정과 파루
“궁성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가 뜰때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연다.”
『경국대전』병전 문개폐조
인정은 초경 3점 종을 28번 치는데, 별들을 28개의 구역으로 구분한 별자리 28수에서 유래한다. 파루는 5경 3점으로 북을 33번 치는데 불교의 33천에서 유래 하는 것으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시보 체제는 1884년 (고종21)창덕궁의 금천교에서 대포를 쏘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1895년 (고종 32) 9월 인정과 파루, 경점때 종과 북을 치는 제도를 중지하게 된다.
도성문을 여닫는 인정과 파루는 도성 안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제 시간에 맞추어 종을 친 사람들은 중형을 부과하였다.
통금은 단지 통행을 금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을 통제하는 것으로 통치 질서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 시키기 위함이다. 이렇게 통행금지를 통한 백성의 야간 활동 규제는 전근대 도시 통제의 방법이었고,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통금이 풀리는 날
섣달 그믐날과 설날, 정월 보름을 전후해 각각 하루씩 3일간 그리고 왕실의 잔치인 진연, 기로소 관원의 시상, 과거 응시일등은 특별히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 되었다.
3 일간 야금을 풀고 숭례문과 흥인문의 빗장을 잠그는 것을 중지하도록 명하여, 도성의 백성들이 성을 나가 답교(踏橋)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정조실록』 15년 정월 13일
대보름 다리밟기
대보름 맑은 밤 둥근 달이 휘영청 한데
병조에선 어명으로 통행금지 풀었네
올해도 미리 다리병 없길 기원하느라
긴 열두 다리 빠짐없이 밟는다네
『중암고(重菴稿)』 「한경사(漢京詞)」 중암 강이천 (1768~1801)
보름날 (上元)
···달이 뜨면 장안 사람들은 모두 종가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져 여러 다리를 밟고 다닌다. 그러면 다리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소 광통교 및 수표교 인기가 제일 좋다. 이날 저녁은 야금을 푸는 관례가 있다. 그래서 인산인해를 이루어 피리를 불고 북을 치고 노느라 떠들썩 하다.···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다리 밟기 풍속의 유래다.···
『경도잡지(京都雜志)』 「세시(歲時)」 유득공 (1749~1807)
1786년 1월 15일 달이 떴다.
준주 형이 부르기에 갔다. 함께 다리밟기를 하러 나갔다. 배오개(종로4가 네거리에 있던 고개. 이현이라고도 함) 어귀에서 꺾어 들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주점에 들러 약간 마시고 또 꺽어 들어 서쪽으로 내려가서 영풍교(지금의 세운상가 근처에 있던 다리) 등 여러 다리를 지나갔다. 큰 도랑이 온통 얼어 있는 걸 봤다. 얼음에 달빛이 비치니 갑절로 밝았다.
유만주 『흠영』
유만주의 일기 『흠영』을 보면 밤새 다리밟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글·김정희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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