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주의 영웅서사
영화 <하얼빈>(2024, 우민호)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같은 소재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안중근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영웅적 서사에 초점을 두고 대중들의 애국심을 호소한다. 그러한 애국주의적 서사 전략은 정보 불평등이 당연시됐던 1950년대까지는 잘 통했던 것 같다. 거기에는 국제 정세에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민중들이 있었고, 사상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정치 선전 수단으로 민중들을 호도해 정치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정부가 있었으니 말이다. 일례로, 친일파 청산과 국가적 정체성 확립이 시급했던 해방기에는 <의사 안중근>(이구영, 1946)이라는 계몽영화가 만들어졌었다. 또한, 한국전쟁 직후에는 정부 차원에서 반공사상의 확립이 필요했고, 그 시기에 개봉한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1959)이라는 작품은 그해 한국영화 흥행 5위에 올랐었다(이상 한국영상자료원 KMDB 참고).

역사적 사건의 교조적 재현
이러한 흐름에 균열을 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로 보인다. 이구영 감독의 <의사 안중근> 이후 긴 침묵을 깨고 1972년 <의사 안중근>(주동진)과 2004년 <도마 안중근>(서세원)이 제작됐다. 하지만 70년대 초반과 2000년 초반, 각각 시기를 달리하여 한국영화가 르네상스기를 맞이한 그 때, 장르적으로나 상상력의 면에서 작품의 다양성이 폭발하던 그 시기에 위인 전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웅 영화는 관객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애시당초 '을지문덕주의'에 입각한 교조적 영웅 스토리 자체가 한국적 콘텐츠가 옹색하던 시기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것이므로 나름의 스토리를 엮어내며 르네상스기를 구가하던 당시의 한국영화의 분위기와 맞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영화계에서 '안중근' 스토리는 영웅도 잃고, 관객도 잃게 되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다 비교적 최근인 2022년,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 영화 <영웅>을 선보이게 되는데, 동명의 뮤지컬 히트작의 명성을 등에 업은 작품 치고 흥행의 면에서는 크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한 원인으로 코로나19 감염병 사태의 여파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그 옛날 영웅서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특정 역사적 인물과 사건의 교조적 재현이라는 서사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얼빈>의 교조적 재현 극복 방식
클리셰를 극복한 캐릭터성
다행스럽게도 영화 <하얼빈>은 지금까지 제작된 여러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에 접근한다. 기존의 작품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위인의 영웅적 면모에 심취하도록 만드는 데 공을 들여 왔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안중근 영화'는 안중근으로 시작해 안중근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러한 영화 속 안중근이라는 캐릭터 또한 세월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면모가 발견되어 진화하기보다는 마치 모든 감독들에게 '안중근 경전'이라도 공유된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캐릭터화되었다. 말하자면, 영화 속 안중근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닌 독립기념관의 한 전시관 유리창 너머에만 존재할 법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반면, <하얼빈>에서는 안중근의 영웅적 면모보다는 인간적 면모에 집중하면서 지금까지 관습화되어 온 안중근의 영화적 캐릭터성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안중근과 함께 거사를 치를 주변 인물들의 심리 상태에도 공을 들이면서 안중근의 인간적 면모로 인해 촉발되는 갈등을 포착하는데, 이는 이미 클리셰가 된 '안중근 서사'를 더욱 새롭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기가 막히게도 그러한 갈등 묘사는 지금의 국내 정세와도 절묘하게 맞닿아 있어 시의적절했다. 이를 통해 <하얼빈>은 역사 속에만 존재하던 위인을 현재로 소환하는 데 성공하고, 덕분에 관객들은 독립기념관 밖의 안중근을 마주하며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우리 시대의 고민에 대입할 수 있게 된다.

조명 활용이 독보적인 미장센과 호연
영화 <하얼빈>에서 특별히 눈여겨 볼 만한 것은 미장센이다. 암울한 시대를 대변하는 듯 작품 전체 걸쳐 어두운 조명을 최대화했으며, 어둠 속에서는 밝은 조명을 최소화하여 희망이 없는 시대에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전면에 나타나도록 했다. 이렇게 영화 <하얼빈>은 역사적 영웅의 관습적 캐릭터성을 극복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역사적 사건의 교조적 재현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유효한 공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한편으로, <하얼빈>은 극의 중반에 만주 웨스턴으로 갈 뻔 하는 등 다소 그 연출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다행히 뛰어난 미장센과 배우들의 호연 속에 그러한 단점들이 조금이나마 상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한 일본의 명배우 릴리 프랭키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타 배우들의 존재감을 압도한다. 그런 그의 연기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에서 단 8분의 등장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제7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1999)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여왕 역의 주디 덴치를 떠오르게 한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영상번역가. 담화분석과 대중문화, 인문치료 분야에 집중하며 연구하고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사)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학술적 글쓰기에 익숙해진 김에 영화평론을 써내 서울국제사랑영화제(2013) 기독교 영화 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2015) 영화평론 부문 당선 등으로 등단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세종사이버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르몽드 코리아, 영화의 전당, 경기일보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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