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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주의 문화톡톡] 성서, 종이 교황인가?
[김창주의 문화톡톡] 성서, 종이 교황인가?
  • 김창주(문화평론가)
  • 승인 2025.05.1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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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무오설의 오류

기독교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정경의 지위를 인정한다. 곧 구약과 신약은 하느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디모데후서 3:16)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마태복음 5:18). 일부 기독교 중 성서의 권위 위에 성서의 무오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오류도 없는 완전무결한 진리라는 뜻이다. 그들의 신념은 성서의 권위를 앞세우려다 성서를 종이 교황의 위치로 격상시키고 마침내 하느님을 성서 안에 가두는 오류를 저지른다. 종이 교황은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교회 교의학>에서 무오설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성서 무오설은 16세기 개혁자들의 오직 성서라는 기치 위에 세워진 신학으로 심지어 누구든 성서를 읽기만 하면 오류 없이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예도 있다. 17세기 성서의 권위는 최고조에 이르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점차 비평적 성서 해석학이 싹트면서 성서 무오설의 입지는 좁아졌다. 근대 이후 인문학적 관점에서 무오설은 이미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이 강력한 교리는 일종의 신학적 괴물이 되어 한 동안 교회를 누볐고 여전히 일부 종파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성령이 성서 저자들을 통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경우, 우리는 무오성(innerancy)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연대기적 세부 사항, 사건의 정확한 순서, 숫자적 암시와 같은 문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경우, ‘무오성이 오도하며 적절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What We Believe and Teach," Fuller Theological Seminary. Archived>

 

미국의 한 보수적인 신학교 아카이브에 내걸린 성서에 대한 그들의 견해다. 한 마디로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 선택적, 혹은 부분적 인정이다.

전통적으로 성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하는 텍스트로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근거로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 계시의 책이라는 사실을 뛰어넘어 그 자체로 계시가 되었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움직일 수 없는 계시의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하느님은 성서의 글자 속에 단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종이 교황처럼 군림하게 되고 사제를 비롯한 해석자의 통제를 받는 우스꽝스러운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종이 교황을 거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티칸의 교황이 일부 교회의 종이 교황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티칸의 살아있는 교황은 과거 교황, 가톨릭교회의 살아있는 권위자,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의 선언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가 종이 교황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읽고 무엇을 파악해야 할까? 우선 성서와 신앙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성서와 신앙은 겹치지만,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 벤다이어그램을 보라. 예컨대 삼위일체(trinity)는 기독교의 핵심 중 핵심 교리지만 성서가 직접 언급하여 입증하지 않는 신학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교훈과 기적 등 성서의 주요 내용과 특징들이 신앙고백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성서 곧 똑같은 본문에 근거하지만 다른 신앙 형태가 가능한 것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대표적인 예다. 벤다이어그램의 두 가지 경우를 예상할 수 있다. 하나는 위 경우처럼 두 집합의 물리적 결합이고, 다른 하나는 조감도(bird view) 상 두 집합이 중복된 경우다. 후자의 경우 공중에서 내려다볼 때(sky view) 겹쳐 보이지만 실상 아무런 접합점이 없다. 위와 아래의 이격(離隔)과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괴이한 형태의 신앙공동체가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곤 한다. 기독교나 주요 종교를 가장한 소종파, 곧 이단(異端)이다. 소종파의 교리는 성서의 특정 이론과 벤다이어그램처럼 밀착된 교집합’(AB)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기독교와 전혀 관련이 없다. 외형적으로는 마치 기독교의 한 유파처럼 보일 뿐이다. 그들은 성서를 경전으로 중심에 두고 마치 교회인양 꾸민 그들의 왕국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창시자가 카리스마적 지도력으로 성서의 종말, 천년 왕국, 또는 휴거 등의 특정한 교리를 내세워 공동체를 통제하고 유지한다. 그러다가 그들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극단적인 행동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기독교의 일부 개념을 차용하고 조직을 교회처럼 운영한다고 해서 기독교가 아니다. 글자 그대로 사이비(似而非).

성서와 신앙의 벤 다이어그램
성서와 신앙의 벤 다이어그램

 

기독교 신앙이란 성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그 정신과 통찰을 삶의 토대로 삼는다. 성서가 곧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앙과 일치한다기보다는 간접적이다. 위대한 신학자로 일컫는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요한 칼뱅,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등은 성서를 종이 교황처럼 대하여 한 글자 한 문장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다. 앵무새처럼 성서를 반복함으로써 신학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니다. 성서 무오설에 근거하여 성서의 문자에 충실하였다면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수 없었다. 무오설 주장자들은 그들이 성서에 충실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기계적 영감론은 신학의 발전은커녕 성서를 공고한 성에 가두어 소수의 전유물로 전락시킨다. <걸쇠로 닫힌 중세 성서를 보라> 그들에게 성서는 하느님과 세상의 소통을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고립과 배타적 비밀문서가 된다. 이렇듯 제한적으로 허용되면 성서는 필연적으로 무기가 되고 희생자를 만들게 된다. 따라서 신앙이 반드시 성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이 교황의 지위를 확고히 하며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방해물이다.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성서가 소수의 해석자에 의해 종이 교황처럼 조종될 수 있다.

은 걸쇠로 장식된 성서 (18세기 네덜란드)
은 걸쇠로 장식된 성서 (18세기 네덜란드)

 

신앙이 성서와 일치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성서 무오설, 또는 축자 영감 교리의 잔재처럼 보인다. 성서가 신앙의 원천(text)이지만, 현실 세계와 사회의 모든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예컨대 요즘 교회의 뜨거운 쟁점에 해당하는 성 소수자 문제, 차별 금지, 낙태, 기후 위기, 생태 파괴, 안락사 등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성서가 해결책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말씀에 귀 기울이되,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개혁자 루터의 주장처럼 성서의 권위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밝히고 그리스도 의식을 증진하는 데 있다. 이 원칙은 우리가 정경에 포함된 모든 책을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신앙은 성서의 본문이나 주석가의 해석에 예속되지 않는다.

성서는 인류의 오랜 지혜를 담고 있는 책이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 경전이다. 그리하여 성서가 영감으로 기록된신성한 책이라는 지위를 얻었으며 서구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성서는 우리 스스로 알 수 없는 통찰력을 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예컨대, 유일신 하느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와 관계를 맺지만 결국 세상 모든 민족과 개인, 그리고 모든 생명을 포함한다는 사상 등이 그것이다. 한편 성서가 노예제도에 관하여 한 번도 비판하지 않았으나 악습을 폐지하는 데도 성서의 교훈과 통찰이 있었다. 적어도 성서의 도움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통찰이다.

성서를 문자 안에 가두지 말라. 하느님은 활자에 찍혀 해석자가 일으켜야 하는 분이 아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분을 제한된 공간에 가둔다면 하느님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 밖으로 한 걸음도 걸어 나올 수 없는 종이 교황을 원하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신앙이다. 성서 무오설은 어느새 권력의 도구가 되어 힘 있는 자의 편에 선다. 더 나아가 공동체를 통제하는 무기가 되어 반대자를 축출하고 급기야 죽인다.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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