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파르 파나히의 영화를 정주행하시려고요? 자타공인 파나히빠가 입문용 영화를 추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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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장 ‘핫’한
지난 5월24일, 제78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주인공은 <언 심플 엑시던트>라는 신작을 연출한 이란의 감독 자파르 파나히다. 파나히 감독은 제 57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써클>과 제79회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노 베어스>등으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감독은 아니다. 따라서 이번 칸 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영화에 관심을 갖고 훑어보려는 영화 팬들이 있을 줄로 안다. 수상 경력이 많다고 해서 꼭 좋은 작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화려한 수상 목록과 논쟁 이력들이 말하는 것은 그는 지금 지구상에 현존하는 감독 중 가장 뜨거운 영화와 담론을 생산해내는 '핫'한 감독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은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의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영화에 눈을 감는 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눈을 감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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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히의 영화는 논쟁의 중심에서 정치와 시대에 관한 여러 시사점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영화 예술로서도 정교하고 뛰어난 만듦새를 지녔다. 그의 영화가 자못 어렵게 보이는 이유는 그의 영화가 난해하거나 모호해서가 아니라, 파나히가 서사구조 및 영화 속 공간의 구조를 매우 복잡하고 치밀하게 설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 이란 국민들이 놓인 정치,사회적 압박은 서사가 펼쳐지는 영화 속 공간에 입체적으로 시각화되어 영화의 메시지와 정교하게 맞물린다. 이러한 형식은 물론 파나히가 그의 스승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서 물려받은 가장 소중한 유산이자 영화 미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을 꼽으라면 단연코 자파르 파나히를 들 것이다. 그리고 파나히의 영화 세계에 입문하기에 좋은 한 편의 영화를 묻는다면 <오프사이드>(2006)를 추천한다. <오프사이드>는 파나히 감독의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해당하는 영화로서, <써클>을 통해 세계무대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파나히가 그의 영화의 색채를 더욱 확고히 해내가던 시기의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한 편이다. 우리나라에는 2006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소개되었고, 2008년에 Kbs에서 더빙, 방영되었다.

최근 우리에게 들려온 또 하나의 ‘핫’한 소식은 손흥민이 이끈 토트넘이 유로파리그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다. 십년간 묵묵히 한 팀을 지켜온 손흥민과 그가 속한 팀의 우승은 16년간 무관이던 팀을 10년간 떠나지 않고 의리를 지켜온 손흥민 선수에 관한 인간승리의 감동스토리가 되어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축구팬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토트넘의 유로파리그까지 가지 않고도, 한국 관중들에겐 물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기억이 있다. 축구경기는 실로 전세계인들의 놀이이자 축제다. 정말 그럴까?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약 40년간 여성에게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2019년부터 점진적, 제한적으로 여성의 축구 관람이 허용되기 시작했지만 축구 관람을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이란의 여성에게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프사이드>는 축구경기라는 소재로 남성 우월주의, 종교를 명분으로한 극단적 국가주의가 이란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란 여성들에게 얼마나 폭력적 억압기제로 작동하는지를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희극의 장르적 형태를 지녔지만 실은 이란 사회에 도저해있는 무시무시한 폭압기제와 그로 인해 가해지는 차별을 서슬푸르게 담아내고 있다.
세계를 보는 또 하나의 '눈'
영화는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는 딸을 잡으러 가는 한 노인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때 노인이 탄 자동차와 그 옆에 지나가는 버스를 카메라가 넘나든다. 노인이 타고 있는 자동차의 내부인가 하면, 그 옆의 버스의 내부다. 180도 상상선은 완전히 어긋나있고, 카메라 동선은 좌충우돌 중구난방이다. 언뜻봐도 뭔가 단단히 잘못 찍힌 장면이다. 재작년에 개봉한 <노베어스>의 도입부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노 베어스>에서 논란이 된 오프닝 장면에 관해서는, 많은 평자들이 '잘못' 찍은 장면이며 <노 베어스>는 잘못 찍은 영화에 대한 반성을 담은 영화라는 식의 비평을 전개했다. 이건 파나히 영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오해다. 카메라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영화를 찍는 장소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게 찍은 영화의 도입부는, 파나히의 모든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돼 온 파나히만의 형식적 인장이자 개괄이다. 첫 장편 데뷔작 <하얀 풍선>에서부터, 카메라 패닝을 통해 인물을 따라가며 서사의 중심인물과 그에 따른 서사의 축이 바뀌는 방법으로 영화를 찍어 온 파나히는 이번에는 자동차에서 자동차로 카메라의 시선을 옮긴다.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버스에서 내린 소녀와 축구장으로 향하는 일당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 버스의 '차창'은 파나히의 영화에서 세계를 보는 또 하나의 '눈'이다. 이는 물론 카메라 무빙을 통해 시선을 옮기는 방법처럼 키아로스타미에게서 계승한 것이다. 파나히의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자동차 영화들에 대한 흔적을 감지하는 예민한 관객이라면 차창과 차창을 넘어다니는 카메라 워크가 반가우면서도, 파나히가 키아로스타미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무엇을 차별화하는지 짚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 길의 영화, 자동차 영화라는 측면에서 키아로스타미 흐름을 확장하면서도 자기만의 갈래로 독자적 물길을 내는 파나히는 키아로스타미처럼 이란의 산하가 탁트인 전원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란의 도시 내부, 2000년대 이란의 문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관중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축구장이다.
여기에는 분명 ‘보는’ 행위에 대한 메타적, 전복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축구장에 입장하려는 소녀는 남장을 했지만 누가 봐도 소녀임이 드러나는 여성적인 외모가 감춰지지 않는다.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이 금지된 소녀는 축구를 관람하러 가는 남성들에게 ‘보이는’ 객체로서 시선을 받는다. 소녀가 축구장에 도착해 표를 사려고 하자, 암표상은 여성의 모습을 한 소녀가 '동생 같아서' 들여보낼 수 없다는 명목으로 안그래도 비싼 암표값을 더 비싸게 바가지 씌운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에게 이중, 삼중으로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데리다는 '동물, 그러므로 나인 동물'에서 고양이가 시선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다. 여기에는 '보는' 행위에 대한 시선의 전복이 들어있다. 보는 주체는 보이는 객체와 전복된다. (데리다라는) 남성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자리에 이란 소녀를 놓아보자. 소녀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박탈 당하고 보이는 객체로 전락했다. ‘보는’ 주체로서 눈이라는 신체적 자유를 갖고 있는 고양이보다도 자유가 제한 되어있다. 버스에는 시각장애인 남성이 타고 있었는데, 그의 존재를 통해 영화는 ‘보는’ 행위야 말로 인간이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신체적 자유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성의 신체적 자유의 제한
축구장에 들어가려던 소녀가 자기를 몸수색하려던 군인을 피해 달아나면서 축구장에서의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군인이 소녀를 가둔 철창 안에는 방금 전의 소녀와 같은 또래의 소녀들이 이미 서넛 모여있고, 이어서 계속해서 다른 소녀들이 잡혀 들어온다. 영화 속 인물들-이 소녀들과 이들을 가둔 군인들-에게는 이름이 따로 명시되지 않는데, 이것은 영화의 카메라가 이 인물과 저 인물 사이를 옮겨가며 시선을 계속 바꾸는 형식과 같은 의도로 보인다. 이를 통해 영화 속의 인물들이 모두 주인공이며 동시에 아무도 주인공이 아닌 게 된다. 전작 <써클>의 제목처럼, 이들의 운명은 끊이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에 있으면서 또한 그 운명이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통된 것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파나히의 영화들이 카메라를 패닝하여 인물과 서사의 축을 옮겨가며 찍는 것은 영화 속 비극적 서사들이 이란사회의 공동체적, 집단적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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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남성들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여성의 ‘보는’ 자유를 제한하면서 영화 속 여성들을 탐닉스럽게 ‘본’다. 영화는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로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던 소녀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러한 구호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드러낸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남성들을 보지 못하도록 (보호차원에서) 철창에 갇힌 소녀들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보인다. 어느새 이들을 가두고 감시하는 군인들도 철창과 철창 사이에 놓여있다. 철창 안에 가둬져있던 소녀들은 그들을 가둔 군인들과 말다툼을 벌인다. 십대소녀들과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군인들이 벌이는 말다툼은 유치하고 우스깡스럽다. 파나히 영화에서 보기 드문 유머들이 쏟아져나와 실소를 자아낸다. ‘왜 우리를 가두냐’는 소녀들의 아우성에 군인들의 명분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군인들도 그저 맹목적으로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질문은, 이 맹목적 복종의 구조를 상부의 상부로 소급해 보게 하는 것이다. 군인은, 군부는, 이란 정부는 왜? 여성의 신체적 자유를 억압하는가. ‘도대체 왜 축구도 못보게 하고 집에도 못하게 해요? 숨구멍은 터줘야 할 거 아니에요.’ 여기에 이성적이고 합당한 대답을 하는 인물은 적어도 영화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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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적 구호
영화의 도입부와 엔딩에는 집단적으로 '이란'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응원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영화는 '당신들이 찬양해마지 않는 이란이란 이런 국가다'라고 반복적으로 외치면서 시작하고 끝난다. 영화의 결말에선 감옥으로 가는 호송 버스 안에서 라디오로 축구중계를 들은 소녀들이 이란의 우승소식을 듣고 기뻐한다. 곧 감옥에 수감될 이들의 비극적 운명을 알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선 소녀들이 폭죽을 들고 열광하는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밖에 없다. 이때 화면을 지배하듯 울려퍼지는 광란의 사운드는 결말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는 아이러니한 연출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이렇게 용감무쌍하게 국가의 절대 권력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태도는 파나히가 역시 그의 스승인 키아로스타미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노랫소리를 키아로스타미의 다큐멘터리<숙제>에서 들을 수 있다. <숙제>의 결말은 이란의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되어있다. 해당 장면에서 아이들은 이슬람의 이맘들을 찬양하고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종교적이고 애국적인 구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는 당시 이란의 교육 시스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의례적 활동으로, 어린 학생들에게 종교적 신념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파나히의 급진적 태도를 키아로스타미와 연결시키는 게 억지스럽다고? 그럼 이건 어떤가. <오프사이드>보다 먼저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청소년을 통해 이란 사회의 극우적 초상을 담아낸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초기작 <여행자>와 옴니버스 영화<티켓>이었다. 아, 그러니까 <여행자>와 <티켓>에서 내내 비가시적으로 굴러가던 공은 키아로스타미의 데뷔작 <빵과 골목길>에서 굴러온 그 공이 맞다. 못 믿겠다고? 다음 번에 이어서 키아로스타미의 공이 특유의 지그재그 길 위를 굴러 어떻게 파나히의 길에까지 도달했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기대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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