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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촘스키를 험담하나
누가 촘스키를 험담하나
  • 자크 부브레스/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철학
  • 승인 2010.05.10 12:5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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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엄 촘스키
촘스키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뉴욕타임스>조차 그를“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치켜세웠다. 촘스키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혁명적인 업적을 남긴 언어학자이지만, 해외에서는 권력자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무정부주의자로 더 이름이 알려졌다. ‘세속적 사제’로 불리는 지식인과 언론인 역시 그의 촌철살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촘스키는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파리를 방문할 예정이다.

카를 크라우스가 자신의 조국에 보인 태도를 두고 사람들은 “제 둥지를 더럽히는 새”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런 비난에 대해, 때에 따라서는 반대로 새가 자기 둥지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으며 그 둥지를 좀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 결과로 그는 “비열한 자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역사상 어떤 지식인도 그만큼 미움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1) <<원문 보기>>

현재 노엄 촘스키가 처한 상황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촘스키가 더럽다고 비난하는 둥지에 안주하는 상당수 지식인의 눈에 촘스키야말로 물질적·정신적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혹은 별수 없이 그렇다고 믿어야 하는) 둥지를 더럽히는 사람이다. 그 둥지란 미국을 지칭하지만, 동시에 유럽, 보편적 의미에서 서구 민주주의, 이스라엘, 엘리트 지식인, 학문 세계, 대학, 교육제도 등도 포함될 것이다.

카를 크라우스의 예가 보여주듯이, 지식인이란 자기 나라 대문 앞을 항상 깨끗이 청소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다른 나라 지식인 역시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격렬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그런 행위가 필연적으로 진리와 정당성, 정의를 모두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역사상 가장 미움받는 지식인

이런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촘스키 자신이다. 구체적 이름까지 호명해가며 자신의 조국이 다른 국가에 저지르는 권력 남용과 불의, 폭력과 범죄를 고발하는 그의 태도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적에 대해 눈을 감아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난받는다. 촘스키가 미국과 그 동맹국이 몇몇 국가에서 벌이는 파렴치한 행위를 두고 “국제적 국가 테러리즘”, “강자의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이슬람 과격단체나 그 밖의 그룹이 벌인 끔찍한 짓을 “약자의 테러리즘”으로 치부함으로써 현실을 부인한다고 반박한다. 이들은 촘스키가 언론을 비판하기 위해 “프로파간다 모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도 똑같은 식으로 반응한다. 다른 국가라면 모를까,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자랑하는 미국이나 그 밖의 민주주의국가에 대해서까지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중상모략이자 모욕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용어의 사용이 어떤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

몇 년 전 촘스키는 좌파 지식인을 겨냥해, 자신들이 대표하고 대변한다고 믿는 평범한 사람보다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는 이러한 좌파 지식인의 퇴보를 좌파 지식인의 자기파괴 경향이라고 묘사한다. 상당수 좌파 지식인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되는 것은 하나의 징후로 읽힌다. “오래전부터 진행돼온 ‘계몽 프로젝트’ 속에서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중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문제는 좌파 지식인의 참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략) 계몽 프로젝트에 대한 그들의 포기는 권력과 특권에 기반한 새로운 문화가 승리하고 있다는 신호다.”(2)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다양한 재현만이 가능할 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경우, 촘스키처럼 언론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고 왜곡하거나 중요한 사실에 침묵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예전에 조지 오웰이 탄식했듯이, 촘스키는 좌파 지식인이 반동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언론의 행태에 공개적 비판을 가하지 않으며 ‘진실’과 ‘객관성’을 방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모습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것이 본색이든 전통이든 간에, 예전부터 수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이 지식인은 더 이상 ‘사실’이란 것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의 세계’도 소멸해버렸다는 포스트모던 혁명의 선언이 실제로 실현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현상유지를 위한 철학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스페인 내전과 그 뒤의 다양한 사건에서 조지 오웰은 프랑코주의자의 가공할 만한 선전 방식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목격했다. 그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개념이 말 그대로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자면, 이 세계에서 ‘객관적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언젠가는 거짓말과 거짓에 가까운 말이 역사적 진실을 완전히 대체하는 때가 올지 모른다. 그렇다면 스페인 내전은 역사 속에 어떻게 기록될까?”(3)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퇴행’”

 

▲ <황산 SY1>, 1989-피터 클라센

20세기 수많은 독재체제가 체제 유지를 위해 객관적 사실을 완전히 가공된 새로운 사실로 대체함으로써 끔찍한 결과가 벌어지는 모습을 지켜본 지식인이 진실이란- 때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코 창조되거나 발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험에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사실 그 자체 혹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생산된 것이다. 그들은 ‘합의의 생산’이라는 개념을 넘어 ‘진리의 생산’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즉, 진리와 그 진리를 규정짓는 합의의 생산 과정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자는 객관적 진리라는 개념을 (아직은) 포기할 수 없지만, 오직 자유만을 추구하는 문학가는 객관적 진리를 완전히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한 환상일 뿐이다. 조지 오웰은 자유를 수호하려는 사람은 동시에 객관적 진리를 방어할 의무가 있으며, 반대로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자유를 수호하는 일을 부차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촘스키는 자연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도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교육이 ‘급진적’이라고 여겨지는 교육보다 전복적 효과가 없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연구가 때로 지배적 사고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 이런 관점을 취하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중략) 미국의 정치적 합의가 가하는 압력에서 벗어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현실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이런 연구가 급진적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4)

우리는 촘스키가 다루는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사회학·정치학·철학을 망라한 온갖 정교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말 중 상당 부분은 직설적으로 들리고, 식자의 눈에는 순진하게 비칠 수도 있다. 굳이 그를 변호하자면, 이 세계적 석학의 미덕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자신이 조금밖에 알지 못하며 아마 현재보다 더 많이 알 수 없을뿐더러, 다행스럽게도 더 알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행동에 나서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재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위해

촘스키는 권력자가 왜 거짓 선전과 중상모략, 체제 방어를 위한 메커니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모두 순진하게 들렸을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간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언급하는 말에서 부조리와 이기심을 벗겨내보라. 그러면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지 드러날 것이다.”(5)

여기서 문제가 되는 순진함은 곧 ‘지식인의 정직함’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촘스키는 항상 순진한 지식인이 되려 노력한 사람이다. 부조리와 이기심의 문제를 고민하는 철학자에게 촘스키의 이런 태도는 유익한 영감을 제공한다. 나는 촘스키가 견지하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촘스키처럼 전투적 지식인만이 낙관주의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폰 브리크트(6)는 비관적 표현이 근심을 낳고 결과적으로는 행동을 억제한다는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와 새로운 기술, 자유방임적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낙관주의야말로 무책임한 태도이며, 우리 행동을 억제하는 요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각국 정부가 이런 무기력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으며, 자신이 이끄는 대중 역시 그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7) 현대의 지식인 상당수가 보이는 태도 역시 이런 무기력한 낙관주의가 아닐까.

촘스키의 낙관주의는 이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의 낙관주의는 의지와 행동에서 발현되며, 만약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글•자크 부브레스 Jacques Bouveresse
이 글은 노엄 촘스키의 책 <이성과 자유: 인간 본성, 교육, 지식인의 역할에 관하여>(Agone·2010)의 서문 일부다.

번역•정기헌

<각주>
(1) 카를 크라우스, <Der Vogel, der sein eigenes nest beschmutz>, Die Fackel, 빈, n°781-786, 1928년 6월, p.5. 빈 출신의 풍자가 카를 크라우스에 대해서는 ‘바보들의 제국에 대항한 카를 크라우스’(Alain Accardo,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8월호)와 <슈모크 혹은 저널리즘의 승리: 카를 크라우스의 위대한 전투>(자크 부브레스, 파리, Seuil, 2001) 참조.
(2) 노엄 촘스키, <이성과 자유…>, p.198, ‘과학과 합리성’에서 인용.
(3) 조지 오웰, <에세이, 기사, 편지들>, 파리, Ivrea/Encyclopédia des nuisances, 1995~2001, vol. II, p.323.
(4) 노엄 촘스키, <학생운동을 지지한다.>, 1971. <이성과 자유…> p.339에 다시 게재됨.
(5) 노엄 촘스키, <미래에 대한 희망에 대하여: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에 관한 단상>, Agone, Marseille, 2001, p.94.
(6) 게오르그 헨리크 폰 브리크트(Georg Henrik von Wright·1916~2003). 핀란드 태생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했다. 말년에 진보에 대한 신화를 비판하는 데 전념했다.
(7) 게오르그 헨리크 폰 브리크트, <진보의 신화>, Philippe Quesne 옮김, L’Arche, 파리, 2000,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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