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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의 문화톡톡] 파도에 가라앉은 상실의 흔적,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영화 <하나레이 베이>(마츠나가 다이시, 2019)
[이지혜의 문화톡톡] 파도에 가라앉은 상실의 흔적,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영화 <하나레이 베이>(마츠나가 다이시, 2019)
  • 이지혜(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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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과 여가 사이를 채우는 OTT콘텐츠 추천(5)

 

ⓒ 네이버 영화, 하나레이베이 포스터
ⓒ 네이버 영화, 하나레이베이 포스터

 

진짜인 척 가짜: 픽션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하나레이 베이>는 상실과 상실 이후의 삶을 관찰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가능성이라기보단 필연성에 가깝게 그려진다. 어차피 결국 도래할 일이므로 언제 닥쳐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므로 주인공 ‘사치’의 아들은 하와이의 한 해변에서 서핑을 하던 중 죽는다. 사치는 남들보다 더 빨리, 잔인하게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겪는다.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고 싶다

카우아이 섬에선 자연이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이번 일로 섬을 원망하지는 말아달라

 

사치의 숙소에 방문한 보안관은 아들을 잃은 그녀에게 섬을 원망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순간 카메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치의 얼굴을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내내 표정 없던 사치의 얼굴이 찰나 일그러진다. 이후 카우아이 섬의 광활한 전경들이, 바다와 산이, 드넓은 숲과 나무들이 화면에 오래 담긴다. 사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공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무해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속에서 사치는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를 동시에 연기한다. 그러나 그녀는 한결같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들을 낳았던 과거시점과 사고를 당한 현재시점, 그리고 십 년 후에 이르기까지 나이의 구분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과거임을 알려주는 기법적 구분이 없었다거나, 십 년 후라고 명시하지 않았다면 영화의 시점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결같은 외관을 유지한 채 무감정한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한다. 이는 사치의 주체성이 사치의 자아와 욕망이 남편을 만나 아들을 낳은 직후인 이십 대 언저리쯤에 멈춰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네이버 영화, 하나레이베이 스틸컷
ⓒ 네이버 영화, 하나레이베이 스틸컷

사치가 겪은 상실을 아들의 죽음만으로 볼 수는 없다. 사치가 겪은 최초의 죽음은 사실 스스로에 대한 죽음이다. 그녀는 타인을 위해 자아를 죽인다. 피아노를 잘 쳤으며, 외국으로 요리 유학도 떠나고 싶었던 그녀는 남자를 만나 계획에 없던 아들을 낳는다. 갑작스레 남편이 죽은 후로는 보험금만으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아들도 죽은 지금, 사치의 삶은 텅 비어버렸다. 그러므로 사치는 자꾸만 아들 또래의 남자아이들 주위를 맴돈다. 아들에게 먹이지 못한 샌드위치를 억지로 권하고, 아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했던 삶의 지혜를 남자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렇게 사치는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우고 한 발자국씩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사치는 서핑도 배운다. 아이들에게 서핑을 배우는 사치의 모습을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촬영 방식을 활용해 화면에 담는다.

 

가짜인 척 진짜: 논픽션

 

이 영화엔 또 다른 죽음이 있다. <하나레이 베이>의 원작자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부친이 제국주의 시절 징병된 일본군이었으며, 부친이 소속되었던 부대가 중국에서 포로를 참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한 시상소감을 통해 고백했다. 이어 “일본은 과거사를 직시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전범국으로서의 일본을 인정하며 사과한 바 있다. 이러한 하루키의 역사관과 문제의식은 <토니 타키타니>, <기사단장 죽이기>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화되었고 고스란히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에서는 두 번의 전쟁이 언급된다. 한국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영화의 전반부 아래의 대사를 통해서 잠깐 언급된다.

“저희 삼촌은 1952년 한국 전쟁에서 돌아가셨어요. 백마고지 전투였죠. 전쟁에서는 양측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사람이 죽어요. 아드님은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 누구의 분노나 증오 때문도 아니죠.”

이라크 전쟁은 영화의 중 후반부 등장하는 퇴역군인이 아이들과 싸움에 붙기 전과, 이라크로 파병되었다가 변을 당한 호텔리어를 추억할 때 언급된다.

 

왜 우리가 이와쿠니까지 가서 너희 일본인들을 지켜줘야 하는 거지?”

이라크에선 말이야, 그깟 자식 놈 하나 잃었다고 해마다 나타나서 어슬렁거리기나 하고. 난 동료를 잃었지만 그래도 싸웠어.”

 

특히 흥미로운 것은 사치를 위협하는 미군에게 소년들이 달려들어 대신 싸우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분명하게 일본이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은유하고 있다. “아시아의 독립을 지키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만든다.”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일본의 침략 계획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1941년 12월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습격한 이후 핵폭탄을 맞고 처참하게 실패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나타나는 “하와이 하면 일본”, “왜 일본 놈들은 서핑을 하러 하와이까지 오는 거야?”등의 대사를 통해 하와이라는 배경 설정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사치는 하와이에서 아들을 잃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하와이 바다에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수많은 죽음들이 붙박혀 있다.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사치도 모르는 사이 따라붙는 전범국에 대한 원죄 의식은 이처럼 결국 개인이 증명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환상. 즉 일본인만 보았고, 일본인 사이에서만 알고 있는 소문 속 서퍼 유령인 '외다리 서퍼'에 대한 기담으로 환원된다.

 

ⓒ 네이버 영화, 하나레이베이 스틸컷
ⓒ 네이버 영화, 하나레이베이 스틸컷

 

"난 이 섬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이 섬은 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난 그것마저 받아들여야 하느냐"

 

서핑을 배운 사치는 물 속에서 비로소 지독한 분노를 뿜어낸다. 로라를 찾아가 “나는 아들을 싫어했지만, 사랑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서글프다. 하나레이 해변을 따라 걷던 그녀는 큰 나무를 마주치고, 외다리 서퍼를 보여달라며 나무를 때리며 오열한다. 이 장면은 인간인 사치가 자연의 이치, 즉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 운명에 맞서 싸우고자 시도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이 장면을 아주 길게 보여준다.

영화의 말미, 사치는 처음으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 내뱉는다. 그녀는 아들을 잃고 십년도 더 지나서야 “네가 보고 싶어”라고 간신히 말한다. 그러므로 사치의 상실이란 결국 보고싶은 마음이다. 말하자면 상실이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글·이지혜

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3 전주국제단편영화제 전북부문 심사위원,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A)으로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영화평론가 및 문화평론가로 활동중이다. 대중문화와 기술인문(AI,NFT,메타버스,챗GPT)을 연구하고 있다.

인스타: leehey_cine 이메일: leehe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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