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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의 문화톡톡] 사랑이라는 공포(3) 세기말, 사랑의 끝에서 용기를 묻다. <세기말의 사랑>(임선애, 2023)
[이지혜의 문화톡톡] 사랑이라는 공포(3) 세기말, 사랑의 끝에서 용기를 묻다. <세기말의 사랑>(임선애, 2023)
  • 이지혜(문화평론가)
  • 승인 2024.12.3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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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기말의 사랑' 공식 포스터 ⓒ네이버 영화
영화 '세기말의 사랑' 공식 포스터 ⓒ네이버 영화

세기말, 사랑의 끝에서 용기를 묻다

만약 지구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할까. 영화 시작과 동시에 던져지는 이 질문은 유난히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외면해온 공포와 깊이 맞닿아 있다. <세기말의 사랑>(임선애, 2023)은 이러한 물음 앞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용기 있는 선택인지 되묻는 영화다. 1999년, Y2K와 밀레니엄 버그로 온 세상이 종말의 가능성에 휩싸였던 때. 영미(이유영)는 종말이라는 가능성 앞에서 조용히 자신의 사랑을 끌어안는다.

 

'세기말의 사랑' 공식 스틸(1) ⓒ네이버 영화
'세기말의 사랑' 공식 스틸(1) ⓒ네이버 영화

사랑이라는 무모함, 혹은 용기

‘만약’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뜻하는 명사다. 일상의 '만약'은 예상 밖의 경우를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작게는 계획 밖의 일상을, 크게는 전쟁과 천재지변 등을 근거로 들어 만약을 상상하고 가정한다. 그리고 이를 대비하며 삶을 꾸려나간다. 이처럼 '만약'을 대비하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사랑만큼 만약을 가정하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중소기업의 경리로 일하는 영미는 같은 직장에 재직 중인 배송사원 구도영(노재원)을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대신 도영의 횡령 사실을 알고도 눈감아준다. 그가 처한 어려움을 기꺼이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는다. 그 결과 영미는 범죄자가 된다. 그런 영미의 마음은 언뜻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짝사랑처럼 보인다. 영미의 선택에는 '만약'이 없다. 왜냐하면 종말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을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영미의 선택에는 분명한 용기가 자리하고 있다. 끝이라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기말, 영미는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종말이 온다면 어차피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고,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그 미련과 후회는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마다 종말 앞에 선다.

 

'세기말의 사랑' 공식 스틸(2) ⓒ네이버 영화
'세기말의 사랑' 공식 스틸(2) ⓒ네이버 영화

연민의 손길, 사랑이 되는 순간

만약에 대한 대비가 없던, 용기 있던 영미의 사랑은 사회적 죽음이라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는 도영의 범죄를 눈 감은 죄로 전과자가 되어 감옥에 간다.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지만, 영미의 이름 위에는 빨간 줄이 그어졌다. 그러나 <세기말의 사랑>은 영미의 삶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는다. 출소한 영미는 도영의 배우자인 유진(임선우)을 만난다. 몸이 자유롭지 않은 유진과 오갈 데 없는 영미는 서로를 돌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세기말의 사랑>은 사랑이 거창하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다. 사지가 마비된 유진의 머리를 감겨주는 영미의 손짓이, 그의 휠체어에 반짝이는 전구를 다는 영미의 손길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유진 역시 영미 몸의 일그러진 화상 흉터를 맨드라미 꽃처럼 보아준다. 그 상처를 흔쾌히 어루만진다. 서로를 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서로를 걱정하고 돌보는 그 작은 손길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영화 말미, 도영과 유진이 서로를 걱정하며 만들어온 관계를 지켜보던 영미는 조용히 물러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꼭 긍정으로 귀결되지만은 않는다. 나를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타인을 향한 연민과 용기가 남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를 지키는 대신 상대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무모함이자 용기가 아닐까. <세기말의 사랑>은 종말이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말 이후의 삶은 우리가 남긴 사랑과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걱정한 덕분에, 그 걱정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이 찾아온다. 세기말의 영미가, 그리고 유진이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글·이지혜(이해이)

문화평론가. 2022년 문화전문지 《쿨투라》 제16회 영화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한국문화콘텐츠와 문화현상을 연구한다. 월간 《쿨투라》에 영화평론을, 르몽드 문화톡톡에 문화평론을,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에 에세이를 기고 중이다.

· 인스타: @leehey_cine · 이메일: leehe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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