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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의 문화톡톡] 사랑이라는 공포(1): K-연애 예능의 범람과 윤하 6집 '사건의 지평선'의 상관관계
[이지혜의 문화톡톡] 사랑이라는 공포(1): K-연애 예능의 범람과 윤하 6집 '사건의 지평선'의 상관관계
  • 이지혜(문화평론가)
  • 승인 2023.03.06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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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본즈 앤 올ⓒ 네이버 영화
영화 본즈 앤 올
ⓒ 네이버 영화

사랑이라는 공포

‘사랑’은 ‘공포’다. 공포가 무조건 사랑일 리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분명히 공포와 다름없다.

라는 수상한 명제가 작년 겨울 초입 <본즈 앤 올 BONES AND ALL>(루카 구아다니노, 2022)을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던 도중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지난 계절 내내 이 문장들에 은은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 문장들을 기준으로 당장 떠오르는 영화나 드라마의 형태소를 살뜰히 뜯어 다시금 분석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한편으로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 사명감마저 들었는데, 이 사명감의 정체는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우선 명제부터 증명해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책임감의 기원을 알고 나니 욕망을 회피하고 싶어졌으며, 마음 한구석에 이 석연찮은 말 덩어리를 담아둔 채 모른 척 계절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갔으며 봄이 도래했다.

외면하고 있던 명제에 대해 다시 떠올린 건 며칠 전이다.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외국인들과 한자리에 모여 현시점 대한민국의 문화현상에 관해 토론할 일이 있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대한민국은 사랑에 미쳐있어. 콘텐츠 대부분이 온통 사랑 이야기만 해. 대체 왜 그래?”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시원하게 대답할 수도 없었다. 2022년 봄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제작되어 공개되었거나 공개 예정인 영화, 드라마, 예능, 음악 등 콘텐츠 소재의 대부분에서 ‘사랑’을 거세하면 할 이야기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떠오르는 대답은 있었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나는 속으로 간신히 “그게 다들 겁쟁이라서, 무서워서 그래.”라는 말을 집어삼켰다. 주어가 없는 공포였다. 뭐가 무서운지 설명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더는 이 사명감에 대해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문화 평론은 순전히 필자의 미뤄둔 사적 궁금증과 욕망을 해결해야겠다는 불순한 의지와 한국문화에 관심을 두는 외국 친구들의 공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질문에 대답하고 싶다는 이유를 핑계로 시작하였음을 우선 밝힌다.

 

환승연애2 (2022, Tving) 공식 포스터
환승연애2 (2022, Tving) 공식 포스터

<연애하지 않는 사회>(KBS1)와 유사 감정에 빠진 K-컬처

필자도 시청자 중 한 명으로 예능들 속 ‘사랑’을 열렬히 즐기고 향유했다. 결혼 적령기의 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환승연애 2>를 비롯한 연애 예능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미디어 도처에 연애가 범람하는 와중에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어.”가 아니라 “아 도파민 덩어리 재밌었다.” 로 황급히 끝나는 대화들이 문화콘텐츠 연구자의 관점에서 어쩐지 석연치 않았다. ‘사랑’이 꼭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아니라지만, 어린 시절 동화 속에서 봤던 수많은 사랑의 결론은 대부분 연애와 결혼이었다. 연애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되는 거라는 말을 들으며 또래들과 성장해왔다. 그러나 인구보건복지협회가 2022년 7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19~34세) 중 비연애 비율이 65.6%에 달하고 있으며, 그중 자발적 비연애는 70.4%로 반수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단 나도, 우리마저도 그랬다.

명절 연휴, 부모님께 등짝을 맞고 삼삼오오 모인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남 일이 아니었다. “너희는 저런 연애 안 하니? 누구라도 좀 만나. 일단 나는 글렀으니까”라고 서로 미루었고, 누군가 한 명이 “싫어, 무서워. <헤어질 결심>(2022)에서 그런 말이 나오잖아. 무너지고 깨어짐. 사랑은 나 자신이 완전히 붕괴하는 거야. 그거 얼마나 공포스럽냐.”하고 대답했다. 과연, 나는 그 대답에 다시 한번 깊이 공감했다. TV를 끄고 신문을 집어 들면 하루가 멀다하고 연애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성토(‘MZ세대는 이기적이며, 이들이 결혼하지 않아서 나라가 망하고 있다’라는 논지의 글)나 아이를 낳지 않아 서울 시내 학교가 폐교되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대한민국의 합계 출생율은 0.78 명(보건복지부 발표)으로 역대 최저였다. 정부 차원에서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20/30대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사를 클릭했다.

2022년 12월 2일 KBS1 채널의 프로그램 <시사 직격>에서는 ‘연애산업 전성시대 vs 연애 하지 않는 사회’를 방송했다. 방송에 의하면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연애하는 모습을 보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 인간의 공통된 감정인 사랑을 이용해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므로 화제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연애 예능의 인기 요인이었다. 공개 예정인 연애 예능이 여전히 범람하는 와중, 총 혼인 건수는 2012년을 기준으로 2022년까지 41%가 감소했다. 이른 나이에 비혼주의를 선언하는 청년들이 조용히 늘어나는 중이었다. 방송 속에서 비혼주의자임을 밝힌 한 청년은 “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비연애를 택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랑”은 온전한 ‘나’를, 혼자여도 괜찮았던 ‘나’를 붕괴시킨다는 것을, 종내엔 ‘나’를 잃게 한다는 두려운 진실을 말이다.

쾌락이라는 단어를 읽으면 자연히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성, 즐거움, 유희 등의 일반적인 규정어들이다. 이러한 ‘쾌락’이 삶의 외연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영혼의 평화를 유지하고 내면의 평정을 중시해 삶을 유지하는 이상적 경지의 쾌락도 있다. 바로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다.

공포란 무엇인가.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다. 두렵고 무서운 마음의 반대에는 고요, 즉 평정심이 있다. 공포의 반대말을 아타락시아로 정의할 수 있다면 혼자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 오롯이 혼자인 삶을 유지하는 것 또한 일종의 쾌락이고 아타락시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지금 혼자 있으며 미래에도 혼자이길 원하는 사람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 흔들리게 하는 것,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 우리의 ‘아타락시아’를 무너지게 하는 공포의 대상은 무엇일까? 사랑 아닐까?

철학자 헤겔은 사랑이 인간의 도덕적 본질의 표출이라고 정의하며 사랑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가 정의한 ‘사랑의 변증법’이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자신에게서 나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바치고, 이러한 헌신 속에서 자신을 지우고 잊으며 스스로 소외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거부하며 정립을 자기 존재의 정립을 부정하고 다른 사람과 마주 서며 스스로를 성찰해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이 헤겔이 말하는 사랑의 일부다.

 

윤하(YOUNHA) - 사건의 지평선 M/V 출처: 공식 유튜브 갈무리
윤하(YOUNHA) - 사건의 지평선 M/V
ⓒ 공식 유튜브 갈무리

윤하(YOUNHA) - 사건의 지평선 M/V

 

모든 선택은 고민의 끝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탄생은 끝에서 시작된다.

사전적 의미에서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란 “어떤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느 영역 바깥쪽에 있는 관측자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찰나, 그 시공간 영역의 경계”를 말한다. 2022년 3월 뮤지션 윤하는 15년 만에 정규 6집 앨범<End Theory> 를 발매했으며, 타이틀 곡으로 <사건의 지평선>을 공개했다. 앨범의 높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공개 직후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팬데믹 이후 재개된 각종 축제 무대에 초대되며 윤하 특유의 음악성과 가창력을 중심으로 큰 환호를 받았다. 이후 2022년 9월 유튜브에 라이브 영상이 공개되었다. 대중과 언론은 이 라이브 영상을 필두로 <사건의 지평선>이 차트 역주행을 시작하는 기적을 이루어냈다고 말한다. 실제로 라이브 영상이 공개된 이후 <사건의 지평선>은 음반 발매 8개월 만에 음원 차트 1위에 오른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선택한 대로 살아간다. 설령, 선택이 정해져 있더라도.

모든 선택은 고민의 끝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끝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시간을 일단락한다.

모든 탄생은 끝에서 시작된다.

예외는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정규 6집<End Theory> 에 수록된 윤하의 말-

 

 

그러나 필자는 <사건의 지평선>이 역주행한 것이 윤하의 뮤지션적인 면모와 음악이 좋았기 때문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기회를 빌려 <사건의 지평선>의 가사를 음미하고 싶다. <사건의 지평선>은 K-Pop에 만연한 ‘사랑을 이루거나, 사랑을 원하고 바라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을 했으며, 사랑이라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온전한 자기 자신을 되찾는 과정을 말하는’ 것에 방점을 찍은 노래다. 따라서 사랑이 기쁘지 않고 이별이 슬프지 않은 역설적인 노래다. 어떤 면에서는 헤겔이 말한 ‘사랑의 변증법’과 닮아있다. 그러므로 윤하의 노래는 K-문화산업계 도처에 안전한 쾌락인 ‘남의 연애 훔쳐보기’가 만연했던 작년 하반기, 비약일 수도 있지만 유일하게 용기를 낸 음악 콘텐츠였다고 말하고 싶다.

<사건의 지평선>의 노래 말미에서는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중략)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라는 가사가 흘러나온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낯선 세계 너머로 나아가길 다짐하는 노랫말의 결심을 가만히 되새기며 다시 한번 되묻는다. 사랑이 공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사랑이 공포라고 가정 할 수 있다면 공포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 이 글은 ‘사랑이라는 공포’와 ‘사랑이라는 용기’를 대주제로 문화현상을 톺아보고자 작성 중인 평론의 서론 중 일부인 점을 밝힌다.

 

 

글·이지혜(이해이)
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영화평론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문화현상과 기술인문을 연구하고 있다.

(이메일: leehey@khu.ac.kr /인스타그램: @leehey_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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