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4.3… 할머니들이 소리쳤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4.3… 할머니들이 소리쳤다
  • 이봉수 외 |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 승인 2024.03.29 17: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4.3항쟁 76주년] 침묵 밖으로 나온 여성 목격자들

필력이 대단한 작가 현기영마저 제주4.3항쟁을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의 참사’라고 했다. 희생자 유족들은 국가폭력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하고도 연좌제 망령을 의식해 한숨조차 내쉬기 힘든 세월을 살아야 했다. 민주정부를 세 번 거치면서 조금은 한풀이가 이뤄졌지만 여성의 발언권은 크지 않았다. 여성은 성폭력까지 당하는 일이 흔했지만 입에 올리기도 민망스러웠다. 몇 년 전부터 그들이 사회를 향해 적극 발언하기 시작했다.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의 이봉수 원장과 심화언론인양성과정 학생들이 여성 특유의 섬세한 기억들을 기록하려고 많게는 아흔아홉 살 할머니까지 목격자들을 찾아 나섰다. 제주 성산읍에 설립된 한미리스쿨은 인문학을 결합한 신개념의 미디어 교육기관으로, 기사 초고를 쓴 문지수·임소현·천종현은 지난해 9월 MBC저널리즘스쿨을 수료한 뒤 올 1월 심화 과정에 입소했다. [편집자]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전시장 입구에 있는 모녀상. 1949년 1월 6일 젖먹이 딸을 안고

남자들 언어로 기억된 전쟁의 상처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기록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200여 명 ‘소녀병사’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소녀병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훈장과 메달을 받았지만, 그것은 ‘전쟁터에서 몸을 함부로 굴린 여성’이라는 주홍글씨이자 결혼을 하기 힘든 족쇄가 됐다. 전쟁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학교 청소부로도 일할 수 없었던 그들은 침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법을 배웠다.

 

희생자 33%가 여성과 노약자였던 내전 

작품 속 이야기는 제주에서 낯설지 않다. 제주4.3사건은 한국전쟁을 빼면 제일 많은 민간인 사망자 수를 기록한 국가폭력이다. 희생자의 33%가 노약자와 여성이다. 1949년 5월, 민간인 수용소로 사용하던 제주 주정 공장을 방문한 UN 위원단이 “수용소에는 여성의 수가 남성보다 대략 3배나 많았고 팔에 안긴 아기들과 어린이들도 많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4·3 관련 연구에서 여성을 표제로 내건 학술대회는 2013년에 처음 개최될 만큼 관심이 낮고, 진상조사보고서에도 여성은 ‘노약자’라는 용어로 뭉뚱그려졌다. 4·3특별법 희생자 규정은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후유장애가 남아 있는 자’로 되어있어 성폭력 등은 거의가 희생에서 제외됐다. 침묵의 역사 속, 국가폭력의 한복판에 있었던 제주 여성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가해자의 ‘현지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

살아남은 여성들은 온갖 수난과 고초를 겪고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부모와 남편, 자식을 잃은 아픔은 물론이고 ‘빨갱이’로 몰린 원통함도 묻어뒀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분노를 토해내는 것보다 수치심을 견디는 게 우선이었다. 피해자를 ‘빨갱이’로 낙인찍고 비난하는 시선 때문이었다. 더 이상 가족의 희생을 막으려고 가해자인 토벌대 간부의 ‘현지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도 있었다. 

4·3 생존 여성들은 증언을 들으려는 연구자에게 왜 그런 ‘추접한 말’을 들으려고 하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더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한을 짐작할 따름이다.

4.3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육지에서 온 토벌대 간부이던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대위의 패륜적 행위는 수많은 사연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제주읍 월평리 출신 인텔리 여성 강상유를 성폭행한 뒤 얼마간 함께 살다가, 그녀를 살해했다. 

1949년 3월 3일에는, 민가에 임시 주둔하던 군인이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홧김에 죽인 사건도 있었다. 희생자 강매옥 씨의 언니 강경옥 씨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군인들은 마을 여성들을 집합시켜, 그중 강매옥 씨를 골라 성폭행을 시도했다. 강 씨가 저항하자 이내 총으로 배꼽 부근을 쐈다. 강 씨는 창자가 쏟아진 채 죽었다.

당시 여성들을 나체로 나무에 거꾸로 매다는 건 흔한 고문 방법이었다. 성기를 담뱃불로 지지거나 수류탄을 집어넣기도 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불러내 성교를 강요하기도 했다. 제주는 문충성 시인의 표현처럼 “섬 하나가 몽땅 감옥이고 죽음”이었다. 

 

300명 넘는 희생자를 낸 북촌 대학살

1949년 1월 17일, 북촌 어귀 고갯길에서 군인 둘이 무장대의 공격으로 숨진 게 북촌 대학살의 시작이다. 보복하기 위해 군부대가 북촌 마을에 들이닥쳤다.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주민을 끌어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그중 군인과 경찰 가족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움푹 들어간 ‘옴팡밭’으로 줄줄이 끌고 가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한날한시’에 300명 넘는 사람을 죽였다.

당시 아홉 살이던 고완순은 영문도 모른 채,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북촌 주민들을 끌어낸 군부대는 남자 11명을 교단에 세우고는 본보기 삼아 처형했다. 스스로 흥분한 토벌대는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사람들의 비명과 총소리로 아비규환이 된 와중에도, 머리를 숙이라던 어머니의 외침은 또렷하게 들렸다. 한바탕 사격이 끝나고 보니 곁에 있던 어머니도, 언니와 동생도 보이지 않았다. 완순은 “어멍”을 외치며 밭을 기어갔다. 손에 피가 묻어 끈적했다.

아홉 살 소녀는 이제 여든다섯 살 할머니가 되어 제주시 조천읍 북촌7길 자택에서 취재진에게 증언했다. 북촌 대학살 이야기를 꺼낼 때면, 당시 느꼈던 피 묻은 잔디의 찐득한 촉감도, 피 칠갑이 된 손바닥도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고완순 씨가 그린 그림. 북촌 대학살 때 ‘옴팡밭’에 끌려가 총살을 기다리던 장면을 묘사했다. © 고완순

바로 앞줄까지 처형되고 내려진 사격 중지 명령

‘열한 번째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사람들이었다. 때마침 대대장 차가 도착하여 총살 중지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에도 예외 없이 ‘만약’이란 가정이 따라왔다. 만약 대대장이 읍에서부터 타고 오던 지프차가 도중에 고장만 나지 않았더라면 한 시간 더 일찍 도착했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삼백 명이나 사백 명은 더 살렸을 것이다.’ 

위에 한 대목 인용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도 북촌 대학살을 소재로 한다. 고완순 씨는 ‘열한 번째로 끌려가던 사람들’처럼 운이 좋았다. “제주시 갈 사람은 따라 나오라”는 군인의 말에, 살려준다는 뜻으로 알고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떠미는 대로 가보니 옴팡밭이었다. 고 씨는 학살터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만 일고여덟 줄쯤 됐다.

“엎어져 죽은 사람, 입에 발이 걸쳐진 사람, 사타구니에 머리 처박아 죽은 사람, 은비녀 꼽은 머리끄덩이 잡고 눈 뜬 사람, 사람이 잘도 많아.”

고 씨 가족은 마지막 차례였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등에 업힌 세 살짜리 남동생의 생사는 확인조차 못했다. 언니는 손을 떨고 있었다. 고 씨는 “시신이 앞에 있는데 아무 생각이 없어, 죽을 건지 살 건지 두려움도 없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멍하니 앉아있는 고 씨 앞에, 눈 뜬 채 죽어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그 할머니가 마치 자신을 흘겨보는 것 같아, 고 씨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때 무언가 반짝였다. 구세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보이는 건 잎사귀가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뿐. 시신이 쌓인 밭은 피로 적셔지다 못해 땅 위로 피가 고여서, 살얼음이 꼈다. 그게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거린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던 중 기적처럼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렇게 고 씨는 북촌 대학살에서 살아남았다.

 

세 개의 전쟁과 99살 할머니의 ’백년전쟁’

 

조춘화 씨(오른쪽)와 외손주 오창현 씨. 오 씨의 할아버지는 4.3 때, 외할아버지는 6.25 때 목숨을 잃었다. © 이봉수

“내는 모르쿠다, 잘 모르쿠다." 

제주도 동남쪽 성산읍 수산리에 사는 조춘화 씨(99)가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옷도 없고, 쌀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때 남자들이 밤낮으로 조 씨 집을 찾아왔다. 이들은 매번 남편의 행방을 물었다. 남편은 숨어 다니느라 집에는 없었다. 낮에는 경찰이 찾아와 “오랑캐들(무장대) 오라낫수과"라며 묻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이들이 “검은개들(순경과 서북청년단) 오라갔수과"라고 물었다. 그때마다 조 씨는 모른다고 할 수밖에.

태평양전쟁 때 징용을 당했던 남편이 4.3 때도 용케 견뎠으나 끝내 6.25 때 전사하자 그녀는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이제 곧 100살이 되는 할머니의 한 많은 인생은 살다 보니 간신히 살아진 거였다.

 

“마지막 소망은 미국의 사과”

북촌 대학살 생존자 고완순 씨는 ‘4·3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공부 욕심이 컸던 고 씨는 학비를 제때 못 내서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그만뒀다. “4·3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이 됐을 것 같냐”고 묻자, 그는 선생님이나 정치인이 됐을 거라고 답했다.

“나는 꿈이 많았어, 우리 외삼촌이 살았더라면 나는 공부를 많이 했어. 근데 (4·3 때문에) 그런 꿈도 못 펼치고, 첫 단추를 잘못 끼웠고, 과거를 간직하고 살다 보니 4·3이 원수같이 싫었어. 옴팡밭만 생각하면 싫고…”

결혼한 언니가 사는 속초로 도망치듯 떠난 뒤, 고 씨는 오랜 세월 4·3을 잊고 살았다. 미용 일부터 편물공장 일, 보험설계사까지, 먹고 살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후 남편을 만나 딸 둘을 낳고, 북촌으로 돌아온 뒤에도 4·3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무장대) 때문에 내 인생은 망쳤다”는 원망도 했다. 북촌 대학살 당시, 청년들은 일찍이 몸을 피했고 그날 죽은 300여 명은 마을에 남아있던 여성·어린이·노약자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역사를 공부하며 4·3의 진상을 알게 됐다. 이승만이 ‘빨갱이 소탕’을 명분 삼아 ‘자국민 학살’을 자행했음을 안 것이다.

 

고완순 씨가 최근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날도 북촌유족회 모임에 참석했다. © 문지수

‘분통이 터진’ 고 씨는 그때 죽은 제주도민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나선 건 2000년대에 들어서다. 4·3평화재단 조정희 팀장 제안으로 제주 문예회관에서 증언을 한 게 시작이었다. 북촌유족회장직도 맡았다. 그는 70년 넘게 제사를 모시고도, 가족관계 증명을 못 해 보상금을 받지 못한 유족 17명을 도왔다.

최근에는 희생자 유전자 감식에 참여해 진술을 돕고 있다. 북촌 대학살부터 UN인권심포지엄 증언까지, 자기 생애를 직접 그림으로 그려 ‘북촌 고완순, 옴팡밭’ 전을 열기도 했다. 여든 중반 나이에도 고 씨가 4·3을 알리는 데 이토록 열심인 이유는 하나다. 고 씨는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했다.

 

동굴 통로에 연기 피워 토벌대 진입 막았으나…
 
제주 서쪽 중산간 마을인 동광리의 복지회관에서 취재진을 기다리던 홍춘호 씨(87)는 4.3 해설가가 되어 6년째 동광마을의 아픈 기억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해설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비극을 알았으면, 고생하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죽기 전에 나라에서 알아줬으면, 4.3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는다.

 

홍춘호 씨가 동광리 일대 주민 120여 명이 ‘큰넓궤’에 숨어 살던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간쯤에 비좁은 통로가 있어 그곳을 바위로 막고 연기를 피워 한동안 토벌대의 진입을 막았다. © 이봉수

“죽저지지 않으니까 사는 거쥬메.”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산 거라 연신 말하는 홍춘호 씨를 따라 4.3 때 사라진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로 올라갔다. 군경이 ‘초토화 작전’을 펼친 1948년 11월 중순, 토벌대가 들이닥쳐 마을을 모조리 불질렀다. 사람들을 불러모아 총검과 죽창으로 찔렀다. 당시 11살 소녀였다.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아버지, 어머니, 세 동생과 함께 ‘크고 넓은 동굴’을 뜻하는 ‘큰넓궤’로 숨어들었다. 토벌대에게 들키기 전까지 50일쯤 빛 한 줄기 없는 동굴 속에서 지냈다. 밤하늘이라도 보는 게 소원이었다.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바위 틈에 물이 고이면 억새 풀 줄기를 빨대 삼아 물을 마시며 배고픔을 달랬다. 두 동생은 이곳에서 굶어 죽었다. 동생들을 묻어주고 돌아온 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다 죽은 게 창피해서 4.3항쟁이 진압된 한참 뒤에도 남이 안 볼 때만 다녔다고 한다. 

숨어 산 지 50일쯤 됐을까, 이곳도 토벌대에 발각됐다. 주민들은 이불솜 등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우며 버텼다. 밤이 되자 토벌대가 굴 입구를 바윗돌로 막아 놓고 잠시 철수했다. 멀리서 망을 보던 청년들이 바윗돌을 치워줘 탈출했으나 한라산 영실 인근에서 붙잡혀 상당수는 현장에서 총살됐다. 

 

홍춘호 씨가 큰넓궤 앞에서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큰넓궤는 길이가 180미터 정도 되는 크고 넓은 동굴인데 입구는 아이도 기어들어가야 할 만큼 비좁아 나중에야 발각됐다. © 이봉수

몇 년 만에 거울 보고 “이러니 폭도라 불렀구나”

홍춘호 씨 가족은 계엄령이 해제됐다는 선전물을 보고 산에서 내려왔다. 하나 남은 동생도 죽은 뒤였다. 이들은 다시 붙잡혔고, 작은 배에 실려 어딘가로 향했다. ‘바당물이 이렇게 크고 출렁일 줄이야.’ 산마을 아래로 내려가본 적 없던 11살 소녀는 그때 바다를 처음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죽으러 가는 거”라고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민간인 수용소로 쓰인 서귀포 단추공장이었다.

이곳에 수용된 이들 중 상당수는 정방폭포에서 학살됐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도 마당에 있는 풀을 다 뜯어먹을 정도로 굶주렸다. ‘강제노역’은 누구나 가고 싶어 했다. 바깥에 나가야 해초라도 뜯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살이 되자 그녀는 순경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됐다. 순경 부인이 그녀를 이발소에 데려갔을 때 몇 년 만에 처음 거울을 봤다.

“이렇게 허니까 우리 보고 폭도라고 했구나. 나는 나가 그렇게 생긴 지 몰랐어. ‘폭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폭도새끼’라고 손가락질 당했는데, 이렇게 험한 몰골을 하고 다니니 폭도라 불린 거구나 생각했지.”

6개월 뒤 석방됐을 때도 사람들은 ‘폭도’라며 집을 내어주지 않았다. 소 키우는 집에 빌붙어 살며 마른 소똥을 모아 불을 지피고 살았다. 이불도, 옷도, 먹을 것도 거의 없었다.

몇 년 전부터 큰넓궤는 좁쌀로 빚은 술을 숙성시키는 곳으로 활용된다. 동광리 주민들과 문화예술인들은 사라진 마을 무등이왓 묵은 밭에 조를 파종해 수확한 좁쌀로 술을 빚는다. 그 고소리술은 이곳 일대 동굴 등지에서 숨진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에 올린다. 숙성기간은 50일로 큰넓궤에서 숨어 살던 기간과 비슷하다. 

 

돌들이 소리치는 이유

“나는 돈으로 문제를 생각하는 게 아니요. 그저 역사적인 뭘 남겨줬으면 좋겠어.”

4.3 당시 살아남은 다섯 여성은 사람들이 4.3을 기억하게 하려고 다큐 영화에 출연했다. 김경만 감독의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이들의 증언을 담은 영화로, 4월 17일 개봉한다.

영화에 등장한 송순희 씨는 임산부 몸으로 등에 세 살배기 아이를 업은 채 군인과 경찰을 피해 다니다 붙잡혔다. 영문도 모른 채 1년 형을 선고받고,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때 다리를 맞은 아이는 살이 썩어 문드러져 끝내 목숨을 잃었다. 같이 끌려간 시어머니는 석방돼 제주로 돌아갔지만, 빨갱이의 부모라는 이유로 학살됐다. 석방돼 돌아가니 시댁 어른은 “남편이 죽었으니 재가하라”고 했다. 재혼했는데, 죽었다던 남편이 살아 돌아왔다. 

송 씨는 4.3을 “세상 천지에 이런 전쟁이 없다”고 말했다. 1948년 제주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3만 명의 대량학살을 저지른 국가권력의 총책임자 이승만은 76년이 지난 지금 동상으로, 영화로 부활하고 있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쓰라린 역사는 반복된다. 

 

 

글·이봉수(대표필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다. 런던대에서 ‘미디어와 경제위기’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을 거쳐 <한겨레>, <경향신문> 시민편집인과 KBS 경영평가위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2017) 등이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