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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세계에 던진 정의라는 질문
불완전한 세계에 던진 정의라는 질문
  • 양근애 l 문화평론가
  • 승인 2022.08.3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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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연극 <당선자 없음>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 두산아트센터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화두로 등장한 ‘공정’은 지난 대선 당시 유력 후보들이 내세운 주요 공약이었다. 그러나 성평등, 교육, 고용 등에 대한 상반된 견해에서 볼 수 있듯, 공정은 숙고된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수사로 동원된 측면이 크다. 공정 논의가 당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던 청년 세대의 표심을 얻기 위해 동원됐다는 점이 증명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이 던진 질문은 중요하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한국 사회에서 공정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불평등하며 정의롭지 않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공정을 위시한 정의, 평등, 분배 등은 이론적 추상이 아니라 생존과 실존을 위한 질문이자, 현 사회문제의 핵심요소로 주어졌다. 

봄부터 여름까지 두산아트센터에 마련된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은 여덟 편의 강연과 세 편의 공연, 한 편의 전시를 마련해 이와 같은 동시대 고민을 풀어냈다. 그중에서 <당선자 없음>, <웰킨>, <편입생>은 각각 시간도, 공간도 소재도 다르지만 불평등하고 불완전한 이 세계가 어떤 얼룩과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들여다본 공연이다.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 <당선자 없음>(이양구 작, 이연주 연출)

 

연극 <당선자 없음>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 두산아트센터

<당선자 없음>은 해방 이후 남북이 분열된 상황에서 1948년 남한 단독 선거로 설립된 제헌국회가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현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한 겹 더 있다. 해방기 제헌헌법과 관련된 과거를 다룬 연극과, 그 연극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난항을 겪는 방송제작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과거와 현재, 허구와 현실을 연결하는 것은 헌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헌법에서 호명하는 주권자가 누구인지, 법과 제도적 장치(Dispositif)를 통해 유지되는 통치 권력이 배제하는 것은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역사로부터 현재를 조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제헌헌법 초안 작성 당시 ‘이익균점권’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이익균점권이란 노동자가 기업 이윤의 일부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의미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권리다.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의 제일 원칙으로 삼았던 ‘국민의 경제적 균등 생활 보장’을 반영한, 말하자면 좌우의 이념적 갈등을 넘은 헌법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노동이란 자본에 예속된 수단으로 여겨지고 위계화된 노동은 차별의 근간이 된다. 방송작가로 일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이와 같은 문제를 펼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방송국에서 핵심적인 인력을 담당하고 있는 방송작가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연출가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법의 보호 바깥에 있다. 연극은 정치적 이권 다툼 속에서 지배 권력의 유지를 위해 역사와 진실이 왜곡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제목 ‘당선자 없음’은 제헌헌법 공포 당시 정부 수립 기념 표어 현상 모집에 총 4,353편이 응모됐지만 1등 당선자는 없고 2, 3등만 뽑혔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채 재건된 국가와 역사를 은유하듯, 연극은 주권자-시민의 자리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헌법과 그 실효성을 심문한다. 극의 마지막에 배치된 헌법을 낭독하는 시민의 영상은, 이 연극이 던진 ‘법은 누구를/무엇을 보호하려는가’라는 질문이 극장을 넘어 현실을 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연극에 장애를 연기하지 않는 장애인 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은커녕 여전히 소수자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가 큰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장애인 배우가 비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이 모순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연극이 지향하는 공정은 사회가 나아가야 할 정의와 무관하지 않다. 

 

권력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웰킨>(루시 커크우드Lucy Kirkwood 작, 진해정 연출)

 

연극 <웰킨>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 두산아트센터

1759년 영국의 외딴 마을에서 어린 소녀가 살해된다. 용의자로 지목된 20대 초반의 샐리 포피는 살인을 인정했지만, 임신을 했다고 주장해 감형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다. 연극은 열두 명의 여자들이 법원의 다락방에 모여 샐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그린다. 임신이 아니라면 샐리는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물과 빵, 불과 양초가 금지된 채 샐리의 상태에 관해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서 열두 명의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임신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여성이라고 해도 임신으로 인한 경험은 다 다르다는 점에서 논쟁이 복잡해진다. 산파이자 치료사로 이 마을의 임신과 출산과 관련된 일을 담당해온 루크는 샐리를 살리기 위해 나머지 여성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웰킨>은 하늘, 천국을 뜻하는 고어인 ‘Welkin’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살려 생경한 느낌을 전한다. 이 극에서 말하는 하늘은 75.3년을 주기로 나타난다는 핼리혜성을 의미함으로써, 핼리혜성이 몇 번을 돌아올 만큼 세월이 흘러도 크게 개선되지 않는 여성의 삶을 문제시한다. 한편 하늘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지만 마치 신의 목소리처럼 무대를 장악하는 판사의 목소리, 곧 법을 가리킨다. 판사는 온전하고 공정한 판결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금기시하며 권리가 제한된 하층계급 여성들의 갈등을 묵인한다. 루크와 일부 여성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심받았던 임신이, 결국 남성 의사가 들고 온 차가운 금속성의 기계에 의해 판정되는 순간은 여성의 능력에 대한 사회적 불신과 반대로 남성 중심의 권력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연극 <웰킨>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 두산아트센터

무엇보다 이 극에 나오는 여성들은 아름답지도 현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따라서 이상적이고 옹호할만한 여성의 모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샐리는 동정심을 전혀 유발하지 않는 음란하고 못된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이 연극은 샐리가 그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만 처벌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웰킨>은 빨래, 청소, 요리, 육아 등 각종 노동을 수행하는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활인화처럼 비추며 시작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에 있지만 영국의 초연에서는 생략된 에필로그 장면을 살려 현대적인 복장을 한 여성의 모습으로 매조지 됐다. 이 반복은 어떻게 가능했나? 통치 권력이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차별하고 배제했던 앎과 경험이 그 사이에 있다. 

 

교육은 불평등을 해소할 기회인가 : <편입생>(루시 서버Lucy Thurber 작, 윤혜숙 연출)

 

연극 <편입생>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 두산아트센터

교육의 기회는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누구나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면 교육을 통해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 논의에서 특히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는 교육과 고용에 관한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문제다. 능력주의가 강조될수록 경쟁이 심화되고 부의 대물림과 불평등이 공고해진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이한 판단에 따라 자유와 평등은 대립각을 세운다. 능력주의가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불평등 심화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느냐 구조를 문제 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결책이 제시된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면서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더욱 팽창하고 있다.

<편입생>은 브롱스 지역에서 성장한 빈곤층 청년들이 대학 편입 과정에서 부조리를 겪는 모습을 그린 연극이다. 총격사건 등 폭력이 난무하는 슬럼가에서 자랐지만 클라런스는 문학, 작문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크리스토퍼는 레슬링의 천재로 불린다. 이들은 명문대 편입생 후보가 돼 장학 프로그램 담당자 데이비드와 함께 면접 연습을 할 참이다. 그러나 섬세하고 진중한 클라런스와 달리 크리스토퍼는 입만 열만 욕설을 하고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두 인물이 자라면서 겪었을 빈곤과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불안과 박탈감 등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와 같은 환경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재능이 더 많은 기회를 통해 발휘될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편입생으로 선발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고, 두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면접을 마친다.

결과는 관객들이 감지할 수 있는 분위기와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난다. 수학 점수가 높았던 크리스토퍼가 편입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지원자 선정의 권한을 가진 교수는 SAT 점수라는 객관적 기준을 통한 선발이 더 공정하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 주어진 기회를 받아들이는 태도, 자기 분야에 대한 기본기와 애정, 앞으로 펼칠 수 있는 잠재성과 같은 개량화 될 수 없는 기준이 점수 앞에 무력해진다는 것이 문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기를 쓰고 명문대에 진학해야만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다. 

그러나 클라런스와 크리스토퍼가 명문대 편입의 기회 자체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이야기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부모와 국가, 지역, 성별 등 우연으로 얻은 삶의 조건마저 능력으로 치환되는 이 세계에서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이 연극에는 서로 다른 인종과 성격과 가치관과 지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했지만, 다양성과 포괄성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누구나 누려야 할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이 아니라, 결과의 공정만이 강조될 때 이 세계가 그려낼 수 있는 다채로운 무늬는 점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연극 <편입생> 공연사진, 두산인문극장 2022 공정 - 두산아트센터

 

 

글·양근애
문화평론가,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 경계에 파열을 일으키는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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