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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프랑스어는 필요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프랑스어는 필요하지 않을까?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3.05.3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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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대에 프랑스어의 위상은 여전하지만, 국내에서는 낮은 효용성을 이유로 불어불문학과와 불어교육학과가 폐과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프랑스어 원문을 번역해야 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발행인으로서 프랑스어가 내몰리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국제연합(UN), 유럽연합(EU), UNESCO, OECD 등 최고 국제기구들에서 프랑스어는 엄연히 공식 언어 중 하나이며, 특히 UN에서 일상 업무를 위해 사용되는 실무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다.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영어보다 먼저 등장하는 언어가 프랑스어다. 또한 프랑스어 사용국가 단체인 프랑코포니는 88개국으로 구성돼 있고 최근 2016년에는 우리 한국도 참관국으로 가입한 상태다. 특히 프랑스어는 과학적인 언어로서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IoT) 등의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언어학 전공자가 아니지만, 필자는 프랑스어가 지닌 과학성과 예술성에 종종 감탄하곤 한다. 거의 모든 명사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고, 동사와 형용사도 인칭과 성별에 따라 변화하는 문법 규칙은 영어에는 없는 독특한 언어적 특징이다. 몰리에르, 위고, 발자크, 랭보, 사르트르, 카뮈, 부르디외, 푸코, 그리고 아니 에르노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문학가들과 사상가들의 저서가 모두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것은 독보적인 언어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프랑스어 발음이 지닌 특유의 멋스러움과 귀족들의 교양과목으로 인정받아온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지만, 자칫 사대주의자로 비판받을 수 있어 길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런 프랑스어가 최근 우리 대학과 관계 당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학생 수가 줄고 제2외국어 선호도가 낮아지면서 과거 인기 과목이었던 프랑스어는 고사 위기다. 불어불문학과, 불어교육학과 등 프랑스어 관련 학과들이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국내 대학 중 현재까지 불어교육학과가 남아있는 곳은 서울대, 한국외대, 한국교원대 그리고 경북대까지 총 4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한 대학에서 곧 불어교육학과가 사라진다. 경북대에 따르면, 2025학년도부터 유럽어교육학부 불어교육전공을 폐과할 예정이다. 1970년 경북대 사범대 외국어교육학과 불어전공으로 시작된 지 53년 만에 내린 결정이다. 

외국어 교육학과의 통폐합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부산대는 2024학년도부터 불어교육과와 독어교육과를 각각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와 통합하기로 했다. 한국외대는 지난해부터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학과를 외국어교육학부로 통합하고 첫 신입생을 뽑았다. 통폐합 과정에서 학생들과 교수, 동문들의 반발에 부딪혔지만, 교육부 역량진단에서 C등급을 받아 교원양성 정원을 30% 줄여야 했기에 내린 결정이다.

불어교육과 폐과의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교사의 길이 폐쇄된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22년 만에 프랑스어 교사를 1명 뽑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2008~2009년 이후로 국공립 프랑스어 교사 선발이 없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는 대표적인 제2외국어 과목이었다.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1990년 전국의 프랑스어 교사는 총 698명이었으나, 2022년에는 45명에 불과하다. 무려 93.5%p 감소한 셈이다. 프랑스어 수업이 사라지면서, 영어 등 다른 교과로 전향했고 지금도 전향 중이다.

현장에서는 프랑스어 수요가 줄었다고 말한다. 중국어, 일본어의 상승세에 밀려 유럽어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시들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1991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동아시아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중국어와 일본어의 인기가 크게 높아졌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제2외국어가 처음 도입된 2001학년도에 프랑스어를 선택한 수험생은 23.6%에 달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5%에 불과했다. 반면, 같은 기간 중국어 선택 비율은 9%에서 16.7%로 늘었다.

프랑스어 관련 전공 폐과에 대해 해당 대학의 학생들과 동문들은 결사반대해왔다. 하지만, 대학들과 관계 당국은 ‘수요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대처’였다고 설명한다. 경북대는 폐과된 불어교육전공 모집인원 8명을 활용해 정보·컴퓨터교육과를 신설할 계획이다. 이 대학 출신의 프랑스어 교사와 선배들은 최근 교육부와 대학 측이 결정한 불어교육학과 폐과에 대해 조목조목 그 부당성을 지적한 장문의 글을 필자에게 여러 차례 보내 왔다. 

적어도 프랑스의 사상과 철학을 지속적으로 게재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이라면, 자신들의 입장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이들이 프랑스어 관련 전공 폐과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래 발전의 도약을 위해서는, 프랑스가 내세우는 첨단과학 교육에 필요한 프랑스어 교육자 양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둘째, 세계 곳곳에서 특히 프랑스에서도 한류 붐에 의해 한국어와 한국에 대해 배우는 사람들이 가파른 속도로 늘고 있다. 프랑스 대학 공식 사이트(Parcoursup.fr)의 자료에 따르면, 2021년 프랑스 대학별 한국어 및 한국학 전공 지원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학별로 보면 파리대 2,388명(정원 136명, 경쟁률 약 17.6배), 국립동양어문화대 2,050명(정원 200명, 경쟁률 약 10.3배), 엑스마르세이유대 1,875명(정원 75명, 경쟁률 25배), 라로셸대 1,474명(정원 75명, 경쟁률 약 19.7배), 리옹3대 1,183명(정원 75명, 경쟁률 약 15.8배), 보르도대 1,117명(정원 40명, 경쟁률 약 28배) 등이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정작 국내에서 프랑스 관련 학과를 폐지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교육부와 대학이 프랑스 관련 학과를 폐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문학이나 프랑스어가, 정부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대학 평가 기준이 되는 취업률에도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대학을 산업체의 직업훈련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경북대를 나온 전직 교사 장계현씨는 교육부와 대학이 학과 구성원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불어교육학과를 폐지한 후, 그 자리에 컴퓨터교육 관련 전공을 채우려 한다고 지적했다. 컴퓨터교육학과가 불어교육학과보다 지원금도 많고 취업률도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문법과 발음 연습에 집중된 프랑스어 전공의 커리큘럼을 들여다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프랑스와 유럽에 불고 있는 한류 바람에 맞춘 ‘외국인을 위한 교습법’이나 문화 강좌는 아예 없다. 19세기 시와 소설에 집중된 불어불문학과의 커리큘럼을 봐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EU), 나토, OECD, 유네스코, 미디어 강의 등 역동하는 프랑스와 유럽의 현 쟁점을 이해할 강좌들이 전혀 없다. 일부 대학들은 프랑스학과, 유럽학과 등으로 학과 명칭을 바꾸긴 했으나, 커리큘럼은 대동소이하다. 시대적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프랑스 관련 학과 교수들이 다양한 영역을 공부하고 전공하며 개척했더라면, 지금쯤 프랑스 문학을 비롯해 프랑스 전반에 걸친 다양한 연구물이 축적됐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도 이에 환호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취업경쟁력이 없는 학과는 프랑스 관련 학과만이 아니다. 글로벌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독일어, 러시아, 중국어 등 거의 모든 언어 관련 학과들이 비슷한 위기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학과의 폐지가 정년퇴직하는 교수들의 퇴임 시기에 맞춰져, 처음부터 학생들의 자율적 선택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부나 대학이 당장의 경쟁력과 효용성만을 내세워 대학의 학과를 폐지하고 신설하는 것은, 교육의 100년 대계를 거스르는 처사다. 더욱이 컴퓨터 프로그램과 달리 그 성과가 당장 가시화되기 어려운 인문학과는, 어쩌면 직업훈련소로 전락한 대학을 그나마 대학답게 만드는 학문의 영역일지 모른다. 글로벌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대학이 학과의 다양성을 보완하고, 새로운 교육전문가를 적극 찾아 나선다면 프랑스어를 비롯한 모든 언어 전공의 학과들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와 대학 당국의 속전속결식 폐과 결정을 보면 이 역시 불가능한 꿈으로 여겨진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영어 외에도 2개 이상의 외국어를 더 배우게 하는 이유는 미국 등 특정 강대국의 언어 편향에서 벗어나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익혀야 공동체적 세계시민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과와 불어교육과가 자취를 감춘 다음, 우리 곁에 남을 프랑스어는 레스토랑, 카페, 살롱, 모드, 셰프, 바게트, 크루아상, 샹송, 시네마, 바캉스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의미의 단어들만이라 생각하니,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다. 필자만의 느낌일까?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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