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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아랍,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 이바다/대학생
  • 승인 2010.10.08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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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9월호 ‘아랍 지식인의 침묵, 또는 아첨’을 읽고

딱 한 번, 이집트·시리아·레바논·이라크 등 아랍 사람들을 마주 보며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에 능통한 그들은 신비로움이 묻어나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내 세 배는 족히 될 법한 큰 눈까지…. 누군지 모를 신이 좀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당신의 눈 속에서 헤엄치고 싶다’는 닭살 돋는 말은 분명 아랍이 기원일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으며 한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애써도 모자랄 판에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니!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랍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단 하나의 기억이다 보니 그것이 낭만적이든 아니든, 사실 상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랍인으로 기억하는 여러 나라 사람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다. 그때 만난 그들을, 난 어떻게 모두 아랍인으로 기억하는 것일까. 또 그들은 어떻게 자신을 이집트인·시리아인·레바논인 등이 아니라 아랍인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아랍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나라를 묶을 때 쓰는 말로- 난 이번에 알았다- 아랍어를 사용하고 아랍연맹에 가입한 나라는 모두 22개국이다. 그중에 이란은 포함되지 않는다.) 생김새가 비슷해서? 모두 아랍어로 소통이 가능해서? 그러나 그들은 완벽한 아랍인(?)으로서 한 가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역시 그들은 아랍인이었다. 만약 ‘근본주의’라는 코드가 아랍인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면 말이다. 길지 않은 대화였음에도 기독교와 기독교의 신, 그리고 성서에 대한 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공격성 짙은 말이 그들 속에 숨어 있었다. 예를 들어 동성애가 신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좀 친하거나 내 표현이 격했다면 쌍칼을 들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과거의 일과 기사가 합쳐지면서 ‘아랍인=이슬람교도’라는 공식 대신 ‘아랍인=종교인’이라는 공식이 떠올랐다. 종교적 정체성을 빼놓고 아랍인이 자신을 설명하는 일이 있을까, 느닷없이 궁금해진다. (9월호 ‘독재와 근본주의 사이 아랍 지식인의 침묵, 또는 아첨’의 필자는 종교가 무엇인지 심히 궁금하다.)

아랍인 정체성의 거대한 한 축은 이슬람교도인데, 이 정체성은 (기사를 보며 유추할 수 있는 바로는) 종교적 규범이 정치적 지배로 연결되고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의 검열이 자발적으로 이뤄지면서도, 문화예술 작품을 빛나게 한다. 개인의 정체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은 종교로부터 힘을 얻고, 종교는 정치권력 형태로 사람들을 규제한다. 이것은 이슬람의 위대성으로 표현되는 문화 흡수력을 문화 소비력으로 멋지게 탈바꿈시켰다. 불변(해야만)하는 종교와 정치권력은 “종교의 신성한 공간과 문화의 세속적인 공간 사이에 소통구”를 막고, 문화를 소비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막아버렸다. 막으면 고이고, 고이면 썩는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문화예술은 돌파구가 될까

그러니 무엇이든 뚫을 게 필요하다. 필자는 그 뚫을 것을 문화예술 지식인에게서 찾는다. 막혔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하는 그들. 그들이 뚫어놓은 약간의 균열은, 약간의 균열로 댐이 무너져내리듯, 사람들의 상상을 폭풍처럼 일으키며 정치와 종교의 긴밀한 관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낙관할 일만은 아니다. 필자에 따르면 지식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을 아랍인으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아랍의 문화예술 지식인들은 아랍인으로 불리고 싶어한다. 바로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는 문화예술 지식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균열을 만들고 공간을 창조하는 ‘이슬람주의 해방자’로서의 문화예술 지식인. 그러니 그들이 속한 곳의 정치와 그것이 양산한 문화를 비판하고 전복시키지 않는 문화예술 지식인이란 그것을 묵인함으로써 그것에 동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역할이 다른 데에서라고 심히 다르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보’는 문화예술로 무너지지 않는데 어쩌나. 가위를 준비해야 하나.)

얼마 전 어떤 여행기의 껍데기를 보았다. <첫날은 무사했어요>라는 제목이었다. 공항에서 길이라도 잃었던 걸까 하는 순간 제목 위에 조그맣게 달려 있는 한글 ‘아랍 여행 생존기’를 발견하고, 비로소 나/사람들은 ‘아~’ 하는 이해의 탄식을 내뱉는다. 아랍이라면 첫날 무사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아랍이니까 그냥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 생존기’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지점이 나와 이 글을 읽는 68.7%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수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아랍의 이해, 삐딱하거나 평평하거나

기사 두 번째 문단에 “사람들은 서적을 불사르는 대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도서관을 건립했다”는 부분이 있다. 이슬람의 위대함을 문화 흡수력으로 설명하며 한 예를 든 부분이다. 난 이 전체 기사를 두어 번 읽으면서도 꼭 이 부분을    `이슬람 사람들이 다른 곳의 서적을 불사르고 도서관을 부쉈다'는 내용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슬람의 문화 흡수력은 문화를 부수고 이슬람으로 포함시키는, 그런 폭력적인 것이라 이해했다. 잘 모르는데다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아 빚어진 오독이었다.

이번을 계기로 아랍을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욕구가 샘솟는다. 내가 보고 들은 한 면의 아랍만을 가지고 그들의 현상과 이면을 설명해낸다는 것은 역부족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아랍? 거기가 그렇지, 뭐”라며 훅 넘기는 사이, 남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사라져버려 누군가에게 “기왕 이렇게 된 거, 양배추로 김치 담가 먹으라”는 공감 능력 제로의 비수를 꽂을까봐.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다. 하지만 마무리에 비수를 던질 순 없으니, 고운 말을 급조한다. “바라건대 아랍에 대한 이해가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뻗어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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