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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베이루트의 ‘어린 예수’-<가버나움>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베이루트의 ‘어린 예수’-<가버나움>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19.02.2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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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던 도시이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이곳에서 가난한 자, 약한 자를 위해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 문둥병을 치료하고, 중풍 환자를 낫게 했으며, 장님을 눈 뜨게 하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었다. 이와 같은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이 도시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이 도시는 6세기에 퇴락해서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에서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가 곧 가버나움이다. 감독은 베이루트가 혼돈의 땅이며, 그래서 기적이 필요한 도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서 속의 이야기와 달리, <가버나움>의 베이루트 빈민가는 퇴락하거나 멸망하지 않는다. <가버나움>에는 기적을 행하는 예수가 없다. 이 영화에서는 어느 누구도 가난한 자, 약한 자의 병을 고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약자의 약점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려는 이유가 학교에서 먹을거리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라바키 감독은 혼돈의 도시에 기적의 날이 오리라고, 아니 오고 있다고 믿는 듯하다. 예수의 기적조차 구원하지 못했던 혼돈의 도시가 기적의 도시로 변할 수 있다는 라바키 감독의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열두 살 혹은 열세 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의 행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인은 그 존재 자체가 도시의 혼돈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베이루트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지독한 분쟁 지역이다. 또한 난민과 불법체류자의 도시이다. 그 도시의 황폐한 변두리에서 자인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서류도 없는 처지로 살아간다.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자인은 제 덩치보다 큰 가스통을 배달하고, 주스를 팔고, 앵벌이를 하면서 나날을 견딘다. 낡고 좁은 집의 환경은 말할 것도 없다. 여동생 사바하, 불법체류자 라힐 모녀와 얽힌 사연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라는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대사마저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놀라운 점은, 이 혼돈의 도시에서 자인은 스스로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다. 자인은 한 살 어린 여동생 사바하를 돌보고, 하루 종일 일을 하고, 극한 상황에서도 요나스를 품어준다. 이 부분에서 감독이 영화 제목을 <가버나움>이라고 지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성서에서는 예수가 가버나움의 가난한 자, 약한 자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도시 사람들은 그 기적의 대상자였다. <가버나움>에서는 자인이 행동의 주체가 되어 기적을 만들어나간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이 자인의 삶에서 최종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자인이 작은 어깨로 겪어낸 고통을 생각하면, 그 혼돈의 시간과 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자인의 발걸음을 떠올리면, 라바키 감독의 결론에 동의하게 된다. 자인이 요나스를 냄비 속에 태운 채 보드를 끌고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은 고난의 순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인은 그렇게 자신보다 낮은 아이들을 돌보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가버나움>의 최대 장점은 이러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사실적인 에피소드와 과장되지 않은 연출은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전문 연기자가 아니라 해당 역할과 비슷한 환경, 경험을 가진 실제 인물들을 캐스팅한 점도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가버나움>은 그러면서도 도시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다종교 사회의 현실을 배음으로 깔아 시대성을 확보하고 있다. 어린 소년의 약 1년의 행적 속에 이렇게 크고 어려운 문제들을 정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가버나움>은 김종삼의 시 한 편을 생각나게 한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 청계천변 십전균일상 밥집 문턱엔 /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 이끌고 와 서 있었다 /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 태연하였다 /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 십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掌篇2)이다. 일제강점기, 장님 부모, 거지와 같은 단어들이 베이루트의 자인과 라힐, 자인과 요나스의 관계와 겹쳐진다. 라인이 한 살배기 요나스를 먹이기 위해 빈민구호소에 가서 우유와 기저귀와 과자를 구하는 장면이 특히 그러하다. 먹이려는 대상과 상황은 다르지만, 그 마음만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뭉클하게 전해진다.

<가버나움>은 국내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하고 있다. 개봉 5주차에도 다양성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 중이라고 한다. 자인의 행적이 지닌 기적의 의미, 자인-라힐-요나스의 정서적 연대가 <가버나움>이 국내 관객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먼 중동에 위치한 혼돈의 도시를 살아가는 어린 자인의 삶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 결핍된 것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가버나움>의 흥행이 주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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