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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담장 안 현실에 대한 질문 공동체- <어느 가족>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담장 안 현실에 대한 질문 공동체- <어느 가족>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4.2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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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자각하기 이전부터 우리는 어느 가족의 구성원이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딸의 위치에서 인생을 강제 당한다. 이는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가 자연 발생적 공동체라는 말의 부정적인 주석이다. 당신도 희생을 감수한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일방적 돌봄을 전제로 성장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주체적 인지, 혹은 사회적 자아의 수용에 이른다.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엮인 가족 구성원들은 사랑이라는 신비를 공유하고 있다는 유대감에 쉬이 결속한다. 예컨대 우리 중 대다수에게 가족은 나를 여기 있게 한 힘이다. 존재의 가장 따뜻한 배후이면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상당수의 역사다. 이 같은 언명은 진실에 가깝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의 믿음을 기반으로 형성·유지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창조한 인물들은 그 믿음 아래 감춰진 기이한 결핍과 균열을 반사하는 인물들이다. 그의 첫 장편 <환상의 빛> 속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분)는 학창시절 죽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내내 떨치지 못한다.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가족을 꾸리게 된 그녀는 이번엔 남편의 자살 이후 생긴 그 충격적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 <아무도 모른다>의 사남매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돌아오마 약속한 엄마를 끈질기게 기다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창조한 인물들은 결핍 이전의 가족 상태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어떤 희망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셈이다. 모든 게 같은 자기 핏줄을 향한 신비로운 관성 때문이다. 그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자연발생적 믿음 체계에 결속된 탓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사남매를 사회적 잉여의 자리로 던져 버린 최초의 ‘그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어느 가족> 속 가족의 출발점은 ‘그것’의 가장 먼 쪽에 놓인다. 이 가족은 사회적 시선에서 ‘정상성’ 혹은 ‘평범성’을 부여받기 어려운 잉여의 자리에 위치한다. 그들은 혈연관계, 즉 생득적으로 결속된 사이가 아니다. 각자의 사후적 선택에 의해 유사가족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죽은 남편의 집에서 그의 연금으로 연명하는 하츠에(기키 기린 분), 일용직 노동자이지만 도둑질에 더 능숙한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 전직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지금은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아키(마쓰오카 마유 분), 학교를 궁금해 하지만 도둑질부터 배운 쇼타(죠 카이리 분), 부모의 학대에서 벗어나 이 이상한 가족의 마지막 구성원이 된 유리(사사키 미유 분)는 그렇게 가족을 연습하며 살아간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가족에 대한 신화적 믿음과 그 강도를 스스로 결정하며 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족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구멍을 내는 틈새들이면서 그 자체로 미묘한 질문인 것이다. 지면의 제약상 여기서는 쇼타와 유리에 의해 제기된 질문만을 추수해고보자 한다. 그 이전에 공유해야 할 것은, 쇼타의 입에서 ‘스위미’라는 제목으로 언급된 교과서 속 우화가 이 영화 전반을 은유한다는 사실이다. 쇼타는 그것을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거대한 참치를 물리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작은 물고기들은 동정과 연민에 기초해 의지적으로 존속되는, 이 유사가족의 구성원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참치는 제도권의 가족에 대한 규율적 시선일 수 있다. 그 시선의 권력은, 우리의 가족에 대한 신화화된 믿음을 배경으로 강화되어 왔다. 그 때문에 영민한 관객은 이 영화가 실패가 예견된 실험극이란 걸 일찌감치 알게 된다. 아직 기성사회에 진입하지 않은 쇼타와 유리는 그러한 비극적인 전망을 끌고 다니며 날카로운 질문으로 육박해 온다.

 

먼저 쇼타의 의미론적 위치를 떠올려보기로 한다. 앞서 <어느 가족>의 인물들이 ‘가족’에 대한 신화의 균열점들, 그 틈새에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쇼타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 틈새를 들여다보며 사회적 자아를 획득해가는 경로에 있는 소년이다. 혹은 주체적 자각의 단계에 입사하기 직전에 와 있다. 유사가족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한 발짝 떨어져 가족의 요건과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질문하는 존재인 것이다.

유사가족의 성원 과정을 보면, 크고 작은 부도덕과 모순이 산재한다. 단적으로 그들이 밥상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부터가 찜찜하다. 예를 들면 그들의 안전한 생계는 하츠에에게 부도덕한 잘못을 저지른 전남편 덕분이다. 그는 결혼제도가 강제하는 정조의무, 성실과 신의의 원칙을 위반한 채 딴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하츠에를 등지고 죽는다. 그런데 제도권은 하츠에게 죽은 전남편의 집을 물려준 것은 물론 연금 수혜자의 자격도 부여한다. 심지어 하츠에는 전남편이 밖에서 낳은 자식들을 찾아가 종종 생활비를 타오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영화 속 인물들이 ‘가정’이라는 생활 울타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가족제도의 부작용덕분이다. 사실상 그들 모두가 그 ‘부작용’의 결과이면서 또한 수혜자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한 쇼타는 그 모순이 드나드는 가장 투명한 창이다. 그는 인정 많은 오사무로부터 도둑질부터 배운다. 오사무를 좋아하는 쇼타는 별 뜻 없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얘들이 학교에 다니는 거 아녜요?”, “나를 구해줬을 때에도 뭘 훔치려다 날 발견했어요?”. 이 대사는 생득적인 가족 구성원 안에서 사회적 인준을 받으며 자라는 삶에 대한 쇼타의 무의식적인 구심력을 상상케 한다. 실제로 쇼타는 집에서 정규 교육을 받을 때 배우는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곤 한다. 제도권이 정상성, 평범성으로 규정하는 ‘가족’과 ‘가족 내 성장’을 자꾸 상기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마트에서 양파를 훔치다 들켜 쫓기게 되었을 때 내린 선택은 내면의 압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높은 도로 위에서 뛰어내림으로써 그는 스스로 달아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행위는 쇼타가 오사무에게 했던 앞 질문들의 다른 판본이다. 영화 내 유사 가족구성원들과 영화 밖 우리에게 던져 온 질문의 매우 구체적 버전이다.

쇼타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경찰 앞으로 불려나가게 된 이 유사가족은 그들의 실존을 추궁당한다. 노부요는 남편을 살해한 치정극의 주인공으로 취급 받았던 적이 있다. 유사가족 내에서 노부요와 부부처럼 사는 오사무는 그때 공범으로 오인 받았다. 이제 그들은 또 다른 살인과 시신 유기의 용의자로 내몰린다. 집 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하츠에의 시신 뒤처리에 그들이 관여되었으리라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 유리를 유괴한 것은 아닌지, 쇼타를 학대하고 방기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까지 덧씌워진다.

유사 가족에 대한 세간의 취조가 진행되는 영상은 참여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건조한 바스트 쇼트로 유사 가족들의 진심을 사실화하려 한다. 특히 쇼타와 유리의 유사 부모 역할을 해 온 오사무, 노부요의 어떤 입장을 들으려는 작심이 읽힌다. 그들 쇼트에서 노부요와 오사무는 ‘부모’라는 단어 앞에 붙은 ‘유사’라는 말과 다툰다. 그 수식어에 가닿는 내면의 슬픔과 외부의 폭력성을 동시에 감당해보려 한다. 그들을 적당한 거리에 두고서 카메라는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사무적이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노부요, 오사무에게서 쇼타와 유리를 먼 곳으로 몰아세우는 시선의 주인을 되묻는다.

이러한 연출이 영화적으로 훌륭한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오사무와 노부요가 ‘말한 것’과 ‘차마 말하지 못한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제3의 답을 준비하고 싶어진다. 노부요는 유리를 돌보기 위해 세탁 공장을 그만두는 순간까지 반복적인 희생을 치른다. 또한 오사무의 본명(쇼타)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쇼타를 향하던 그의 온정에서 각별한 사연을 상상하게 된다. 지금 쇼타와 유리에게 필요한 가족은 진정 누구인가. 저 유사 가족이 공유하고 있는 사랑, 혹은 유대감은 끝내 부정되어야 하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단순한 질문 앞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주저해온 우리를 극적으로 계몽하려 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처럼, 어쩌면 사무적으로 찍힌 그 취조 영상은 그 이상한 현실을 객관화해보려 할 뿐이다.

 

이제 또 다른 질문으로서 유리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녀는 “낳고 싶지 않았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부모 곁에서 자란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유사 가족과의 조우는 ‘구조’의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그녀가 유사 가족의 일원이 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TV에서 그녀의 실종 소식이 방영된다. 이때 알게 된 그녀의 본명은 쥬리다. 그녀는 이 가족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은 존재인 것이다. 문제의 TV 장면을 본 오사무는 유리에게 집으로 돌아갈 거냐고 묻는다. 그때 그녀는 생득적 가족을 포기하고 유사 가족을 택한다. 이후 유리는 유리도, 쥬리도 아닌 새로운 이름(‘린’)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 이름은 그녀의 자발적 선택과 유사 가족의 선의의 포용에 의해 탄생한 정체성의 새로운 표지이기도 하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오사무를 통해 새 삶의 출구를 찾은 노부요는 유리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함께 목욕을 하던 노부요와 린은 서로의 팔뚝에 새겨진 꼭 닮은 흉터를 어루만져준다. 그렇게 노부요는 자연 획득되는 모성이 아닌, 정서적 교류와 의지적 결단에 의해 내면화 한 모성을 받아들인다. ‘사랑하니까 때린다’던 친부모의 허구성을 주지시키며 린을 꼭 안아준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상호 치유의 관계가 형성되는 경과를 보게 된다.

쥬리이면서 유리이고, 마지막엔 린인 이 소녀를 관망하는 카메라에 대해서는 좀 더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거기로부터 일관된 정서가 형성된다. 영화가 끝날 때쯤의 린은 ‘당신에게 진짜 가족이 있는가’를 묻는 상징적 피사체다. 말 수 적은 린의 내면을 헤아리기에 가장 적당한 거리에서, 그렇게 카메라는 가식없는 유대감의 발생을 돕는다. 가족을 구성하는 조건으로서 사랑과 그 감정에 합당한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하츠에의 죽음 이후, 유사 가족은 사랑으로 소통하는 관계의 필요조건을 떠올려보게 한다. 그들이 다소 과장적인 과거사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처럼 무람없이 대할 수 있는 누군가가 가까이에 필요한 사람들이다. <어느 가족>은 완전한 합일을 이룬 정서적 공동체의 순간을 두 번 보여준다. 먼저 마루에 붙어 앉은 그들이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는 신이 있다. 비 그친 후의 밤하늘을 장식 중인 불꽃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순간의 판타지로 사라질 불꽃을 두고 그들은 생경한 감동을 느낀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해체되어 흩어질 유사 가족에 대한 우리의 시선과 이후 남겨질 여운에 대한 유비처럼 보인다.

유사가족에게 찾아 온 두 번째 합일의 순간은 단연 바닷가 신이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그들은 행복한 한때를 활기차게 즐긴다. 죽음을 예감한 하츠에만 멀찍한 곳에 홀로 앉아 있다. 그 순간 하츠에는 “다들... 고마웠어”라고 조용히 읊조린다. 그녀에게 그들은 상징적·물리적으로 각각 한 번씩, 결국 두 번 죽은 남편을 대신한 식구들이었다. 이후 신에서 하츠에는 죽고 남은 유사 가족 구성원들은 굳이 슬퍼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하츠에의 시신을 집 안에 묻고는, 아무렇지 않게 지금까지 해온 동거를 연장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아무 일 없음’을 통해 신비감 없이 신비로운 가족의 조건을 맞닥뜨리게 한다. 가족 구성원이면서 개별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을 상기시킨다.

영화 마지막 시퀀스에서 쇼타와 유리는 자연발생적·생득적 가족 공동체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쇼타가 오사무를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쇼타가 버스를 타고 혈육의 곁으로 되돌아가려는 순간, 오사무는 진심으로부터 먼, 그러나 전하려 했던 말을 내뱉지 못한다.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다. 그러다가 쇼타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자 뒤늦게 그 꽁무니를 뒤쫓으며 뭔가를 외쳐댄다. 오사무를 되돌아 본 쇼타가 무엇을 들었는지, 혹은 듣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선택에 의해 탄생한 두 번째 아빠를 바라보며 조용히 “아빠”라고 읊조린다. 함께 훔친 낚싯대로 거대한 참치를 낚으려 했던 그들의 바람은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보낸 유대의 시간은 쇼타의 마지막 한 단어로 가장 적확하게 요약된 것인지도 모른다.

친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쥬리가 된 린은 무관심과 물리적 폭력이 횡행하는 담장 안에 다시 갇힌다. 영화의 엔딩신은 그녀가 지금 행복할까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에 일정한 답을 준다. 혼자 무료하게 놀던 쥬리는 발뒤꿈치를 들고서 조용히 담장 밖을 응시한다. 쥬리의 표정을 경유해 우리는, 그녀가 유리이거나 린이었던 시절을 함께 되돌아보게 된다. 그녀가 담장 바깥에서 본 밤하늘의 불꽃과 바닷가에서의 웃음을 다시 누릴 수 있길 기도한다.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했음을 밝힌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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