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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청춘’=‘밝음’=‘희망’이라는 강박 – 영화 <시동>의 착오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청춘’=‘밝음’=‘희망’이라는 강박 – 영화 <시동>의 착오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19.12.17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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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동>의 포스터는 밝고 맑은 색들이 가득 채운다. 파스텔톤의 깨끗한 하늘 아래 자리한 핑크, 초록과 파랑, 그리고 깜찍하게 매달린 이응이 만들어낸 <시동>이란 제목은 그 자체로 장난스럽다. 영화의 포스터가 관객들이 가장 흔히, 많이 볼 수 있는 영화로의 진입로라고 할 때 이 포스터가 이야기하는 바는 명확하다. 영화 <시동>은 포스터 속 인물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렇게나 자리 잡고 앉아 있는, 혹은 행동하는 이들의 이야기일 테지만 밝고 청량한, 해피엔딩으로 나아갈 이야기일 거라고 말이다. 거석이형(마동석)의 장난스런(하지만 상대에겐 치명적인) 모습에 기댄 예고편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시동’은 희망차게 달려나갈 것이지만 아직은 예열이 덜된 이들의 코믹한 모습이 그 중심에 놓일 것이라는 의도를 여기 저기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영화 <시동>이 다음에서 연재됐던 조금산의 웹툰 <시동>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밝음’은 분명 의아함을 자아낸다. 웹툰 <시동>의 색채는 톤 다운 된 어두움으로 일관했고, 인물들의 아등바등은 처연할 정도로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의 몸부림이었다. 웹툰 <시동>에서 가장 밝은 범주에 있던 택일이의 노란 머리나 경주의 빨간 머리 조차도 패션이라기보단 어떻게든 강해 보이려는 발악 같았고 그나마도 그리 성공적인 선택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했다. 거석이형의 자조나, 택일이 엄마가 묵묵하게 견뎌내던 그 침묵의 순간들은 <시동>의 인물들이 살아가던 방식이었다. 택일이 반말부터 할 때, 상필이 새로운 일에 긴장할 때, 경주가 악착같이 상대에게 달려들 때, 장풍반점의 사장이 그들을 바라볼 때 그것은 또 그들이 살아남으려 터득한 방법들이었다. 이렇게 두 <시동>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서술에 따라붙을 이야기를 안다. 이는 원작을 각색한 작품에 늘 따라붙는 비교일 뿐이며, 원작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 역시 좋은 방식은 아니라고 말이다. 당연하다. 원작과 그 각색은 분명 다른 작품이기에 각각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별개의 대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각색은 작품의 길이와 매체적 특징이라는, 서사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기본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로 인한 선택과 배제의 문제에서 두 작품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각색은 분명 원작의 후광을 전제한다. 여기에 따라붙는 기대를 모두 충족시킬 필요도, 그럴 수도 없겠지만 선택과 배제로 남은 것들이 원작의 맥락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다시금 원작이 소환된다는 것은 각색과 원작이 완벽하게 분리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각색의 허점이 대체로 원작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온다면 역시나 원작은 각색에 어떤 식으로든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웹툰이 이러했는데 영화는 이렇지 않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각색작이 원작의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성취되었는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 <시동>은 표면적으로 웹툰 <시동>과 그리 멀어지지 않은 작품이다. 인물의 설정이나 성격, 사건의 전개 등은 웹툰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으며, 전체적인 시공간적 배경 역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웹툰에서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특징적이라 할 수 있는 거석이형을 최대한 활용했고, 장풍반점이 미묘하게 쌓아가던 훈훈함도 그 안에서 일정 부분 성취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가 바로 이쯤에서 멈춰버린다는 점에 있다. 택일이의 객기와 거석이형의 귀싸대기, 엄마의 스파이크와 경주의 반항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독특한 인물들과 이들의 적절한 화합. 영화 <시동>이 예열한 후 달려나가는 것은 바로 이쯤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 자신의 아들에게 강스파이크를 날리는 인물 설정을 제외한다면 이는 그리 특별한 것 없는 이야기로 귀결되어 버린다.

결국 이는 영화가 웹툰에서 그리고 있는 시동을, 그것을 걸기 위해 그렇게 애쓰고 있는 인물들의 하루하루를 훈훈한 청춘들의 이야기 정도로 해석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좀 더 넓혀 본다면 영화가 생각하는 청춘이, 청년이 과연 무엇에 대해 ‘시동’을 걸고 싶어하는지, 즉 ‘시동’을 걸려는 주체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단순하다는 것과 맞물린다. 어차피 훈훈해질 청춘 이야기에 거석이형이 줄 수 있는 독특함은 적절한 코믹 요소로 활용할 수 있고, 택일이나 상필이가 가지고 있는 반항기는 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적절한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간신히 살아갈 힘을 부여잡고 있으면서도 ‘간신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버텨내던 웹툰 속 인물들의 모습을 너무도 단순화시킨 결과이다. 두 <시동>이 다루고 있는 단 한마디의 대사는 이 두 작품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사실 영화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것처럼 지나갔던 대사는 웹툰에서 모든 인물들이 앞으로를 살기 위해 찾아야만 하는, 시동을 걸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질문이다. ‘어울리는 일’. 바로 이 ‘어울리는 일’을 찾기 위해 웹툰 속 인물들은 버티고 방황하고 고민하고 싸운다. 택일은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일단 집을 떠나고, 거석이형은 사람을 때리는 순간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 이것이라며 자조하기도, 더 이상 그것이 하기 싫다며 바로 아래 부하에게 ‘징징대’기도 한다. 상필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무섭다며 울어버리고, 이를 지켜보던 사채업자 두목은 자신은 무섭다는 말을 하지 못해 이젠 이 일들이 어울리는 일이 되어버렸다며 상필을 내보낸다. 배구선수였던 엄마는 아들을 키우며 함께 사는 것에 적응하기 위해 버텨내며, 경주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에 대한 복수를 준비한다. 이 모든 인물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동’을 걸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한다. 그 귀결이 훈훈함일 수도 있겠지만, 경주가 자신의 복수에 실패했던 것처럼 아닐 수도 있는 ‘어울리는 일’ 찾기는 그렇게 꾸역꾸역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울리는 일’을 찾는다는 것은 내가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행복하고 재미있는 일로의 도착을 의미한다. 지금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웹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겪는 이 혼란은 그렇기에 ‘시동’을 위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영화에서 택일이 상필을 다그치는 말 정도로 지나갔던 ‘어울리는 일을 하라’는 말은 사실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난관을 겪는 이들이 가장 큰 고민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그 결과는 분명 훈훈함 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청춘과 청년을 대하는 이 결정적인 차이는 외형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두 <시동>을 만들었다. ‘어울리는 일’을 찾은 후 맞을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서의 훈훈함이 아닌 훈훈해야만 했던 영화는 경주의 실패를 삭제했고, 갑작스러운 화해와 화합의 순간으로 나아갔다. 물론 웹툰 역시 모두가 각자 만족할 만한 자리를 찾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만, 그 과정의 무수한 부딪힘은 그러한 결과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위태로움도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 <시동>에서 내건 ‘일단 한 번 살아보라’는 문구는 그래서 꽤나 잔인하다. 이후를 짐작할 수 없는, 아직 ‘어울리는 일’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이들에게 해피 엔딩은 그리 높은 확률로 마주칠 수 있는 미래는 아니니까. 영화 <시동>은 사회로 나서려는 이들의 행복의 당위를 위해 많은 위기와 우울과 눈물을 삭제하면서 과도한 ‘밝음’을 그 중심에 두었지만, 오히려 이 강박은 ‘시동’을 걸려는 청춘과의 괴리와 맞닥뜨린다. 청춘과 청년들은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오로지 긍정이 전제된 치기만이 허락된 것일까. 설사 그 결말을 알고 있더라도?

영화가 선택한 밝고 희망차며, 안정적인 듯 보이는 성장담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웹툰에서 영화가 선택한 것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 결국 웹툰 <시동>의 모든 것들이 편안한 것으로 읽히길 바라는 근저에는 우울해 보이는 이야기를 밝은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된다. 과연 이 선택에서 고려한 관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단순한 감정에 쉽게 공감할 것이라는 바로 그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영화 <시동>의 전환이 달성하지 못한 것을 읽어낼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그리 인상적일 수 없을 것이다.

 

 

<시동>(2019)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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