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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새로운 <작은 아씨들> - 이전 영화들과 뭐가 다를까?
[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새로운 <작은 아씨들> - 이전 영화들과 뭐가 다를까?
  • 송영애(영화평론가)
  • 승인 2020.02.17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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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그레타 거윅, 2019) 포스터

그레타 거윅 감독이 연출한 <작은 아씨들>이 상영 중이다. 2019년 버전 <작은 아씨들>이 제작된다는 소식에 ‘또?’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동시에 무엇이 달라질지 궁금했었다. 그동안 리메이크 된 수많은 <작은 아씨들>중 현재 합법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1933년, 1949년, 1994년, 2019년 버전까지 네 편을 중심으로 차이점들을 살짝 살펴볼까 한다. 아마도 영화의 변화와 더불어 시대의 변화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수많은 <작은 아씨들>

1868년과 1869년에 1부와 2부로 출판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자전적인 소설 <작은 아씨들>은 1917년 영국에서 제작된 알렉산더 버틀러 감독의 무성영화 <작은 아씨들>부터 2019년 <작은 아씨들>까지 꽤 많은 장편극영화와 TV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으로 재탄생됐다. 장편극영화만 해도 10여 편에 이르는데, imdb.com를 참고해보면, 영국, 미국, 멕시코, 홍콩 등지에서 1917년, 1918년, 1933년, 1949년, 1957년, 1967년, 1973년, 1974년, 1994년, 2018년, 2019년 버전들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작 소설에서 매그, 조, 베스, 에밀리는 다양한 꿈을 갖고 있다. 매그는 배우도 되고 싶지만,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싶고, 조는 작가가 되고 싶다. 에밀리는 화가도 되고 싶고, 부자와 결혼도 하고 싶다. 베스는 큰 꿈은 없지만, 음악이 좋고, 가족과 함께 하고 싶다. 가난한 살림에 가정교사도 하고, 다른 이들의 집안일도 도우며 돈을 벌지만, 겨우겨우 일상을 유지할 뿐이다. 여자로서 직업을 갖기고 만만치 않고, 큰돈을 벌 방법도 없다. 돈을 번다한들 재산 소유 역시 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갈 수 있는 학교도 많지 않고, 투표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네 자매는 각자의 꿈을 꾼다. 그들이 10대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는 과정이 원작 소설에 담겼다. 그리고 리메이크된 영화들에는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그 과정이 담겼다.

 

1933년, 1949년 <작은 아씨들>

조지 쿠거가 감독한 1933년 버전은 당시 메이저 영화사였던 RKO가 제작했는데, 캐서린 햅번, 조안 베넷 등 스타들이 출연했다. MGM이 제작한 1949년 버전은 <애수>(1940), <마음의 행로>(1942) 등을 감독 마빈 르로이 감독이 제작과 연출을 맡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 자넷 리 등이 출연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영화 모두 사라 메이슨과 빅터 히어만이 각본을 썼다는 점이다. 부부이기도 했던 두 사람은 1933년 <작은 아씨들>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했고, 16년이 지나 1949년 버전에서도 각본을 썼다.

 

<작은 아씨들>(1933) 스틸

각본은 같은 사람들이 썼지만, 두 작품이 강조하는 부분은 달랐다. 1933년 <작은 아씨들>에서 조는 담을 뛰어 넘거나 2층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오는 여성스럽지 못한 행동 정도는 아주 쉽게 하는데, 조를 연기한 캐서린 햅번의 이미지와도 잘 맞았다. 소설가로서 꿈을 자유롭게 따르느냐 마느냐의 고민이 여성성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고민처럼 보여주면서, 조는 소위 말하는 여성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그려졌다. 한편 당시 미국은 대공황 시기였는데, 이 영화는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위안이 되는 착한 영화로서 인기를 얻었다고도 한다.  

 

<작은 아씨들>(1949) 포스터

테크니 컬러 영화였던 1949년 <작은 아씨들>에서도 조는 담 넘기, 달리기 등을 잘한다. 남북전쟁에 참전하지 못했음을 반복적으로 아쉬워하고, 로리가 대학에 가는 것도 매우 부러워하는 등 여성성은 긍정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영화가 제작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전쟁 기간 동안 남성들을 대신해 생산 활동에 참여할 것을 종용받았던 여성들은 전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받는다. 몇 년 사이 자신들의 능력을 확인한 여성들은 여성의 영역을 가정에 한정 두는 것에 반발하고,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를 사는 영화 속 인물들은 주변에 변화를 요구하지는 못하지만 투덜댄다.

 

1994년, 2019년 <작은 아씨들>

1994년 <작은 아씨들>부터 여성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그 사이 사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질리언 암스트롱이 연출을 맡았고, 위노나 라이더, 클레어 데인즈, 커스틴 던스트, 크리스찬 베일 등이 출연했다. 첫 칼라영화였던 1949년 버전이 아기자기한 자수를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1994년 버전도 원작 소설에서 사용된 걸로 보이는 삽화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 초반부터 조의 내레이션이 시작되고, 영화 내내 계속된다. 더불어 가족들의 합창 장면도도 여러 차례 등장해 동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작은 아씨들>(1994) 포스터

위노나 라이더가 연기한 조는 지적이고 여성적이다. 1933년 영화처럼 꿈과 여성성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1949년 영화처럼 군 입대나 대학 진학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소설을 써야하는지 고민한다. 에이미 역을 아역과 성인 배우가 연기하여, 어린 시절과 성인 시절의 격차가 크게 느껴진다. 수잔 서랜든이 연기한 엄마도 훨씬 자신감 있고, 능력 있는 모습이다. 1990년대 <작은 아씨들>에 이르러서 여성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불공평한 시스템과 자신의 생각, 능력, 용기 등이 강조된다.

2019년 <작은 아씨들>은 영화의 시작 시점부터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 조는 이미 뉴욕에 와있고, 소설로 돈도 벌기 시작했다. 다만 아직은 익명으로 출판사에서 원하는 글을 쓰고 있다. 첫 장면의 첫 커트는 출판사 문 앞에 잠시 전 조의 뒷모습 실루엣이다. 조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서툴지만 자신의 소설을 파는데 성공한다. 원작 소설과 앞선 영화들이 모두 시간 순서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2019년 <작은 아씨들>은 조의 시선에서 수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이러 이러한 유년 시절을 보내다 어른이 되었다.’가 아니라 ‘이러 이러한 시절도 있었지.’라 추억하는 것이다.

 

<작은 아씨들>(2019) 스틸

조를 비롯해 대부분의 캐릭터들의 사연도 추가되어, 인물들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졌다. 특히 에이미와 로리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덜 급작스럽다. 회상까지 곁들여지면, ‘저때부터 이미?’라는 생각도 든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고모, 로리의 할아버지, 엄마 등에게도 각자의 사연,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할애되었다. 그 결과 좀 더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로 확대된 면도 있다. 

 

<작은 아씨들>(2019) 스틸 - 에이미

영화의 중심 시점이 조, 매그, 베스, 에이미 모두 성인이 된 시점으로 설정되면서, 철부지 어린 아이들의 동화라는 인상이 줄고, 능력 있는 성인들의 현실 스토리라는 인상이 강해졌다. 에밀리의 그림, 베쓰의 피아노 연주 모두 전문가 실력처럼 보인다. 1994년 버전에서 아역 배우 모습이 먼저 등장해 더더욱 철부지 느낌이 강했던 에이미는 가장 현실적이고 냉철한 방식으로 자신의 꿈과 사랑을 찾아나간다. 엄마도 1994년 버전에서처럼 마냥 완벽하지 않다. 밖에서 벌이는 자선 활동 모습 장면도 좀 더 등장하고, 자신의 단점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냐는 딸의 질문에 “나도 여전히 노력중이다. 너는 나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길 바래.”라 말한다. 보다 인간적인 엄마의 모습이다.

 

<작은 아씨들>(2019) 스틸

조의 창작 과정도 섬세하게 표현된다. 여러 장면을 할애해 소설을 쓰는 모습이 그려지고, 편집장과 내용 수정, 인세, 판권 등을 두고 담판을 벌이는 대화 장면도 보여준다. 그리고 활자들이 조합되어 인쇄되고, 책으로 묶여지는 과정도 보여준다. 조는 소설을 쓰기만 하고 출판은 프리드리히 교수와 그의 지인 출판업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조가 직접 한다. 여자들도 생각과 영혼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조의 일상인지 조가 쓴 소설인지 애매하게 교차한 구성도 인상적이다. 

미국 남북전쟁 기간(1861~1865)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리메이크 되고 있다는 건 원작 소설이 지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감성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다양한 차원의 차별이 존재하고, 법적,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존재한다. 가족들과의 갈등과 화해, 사랑과 꿈을 찾는 것은 많은 이들의 관심사다.

영화 <작은 아씨들>들은 시기에 따라 작품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왔지만, 여전히 착한 사람들의 착한 이야기이다. 악역도 없다. 일이든 사랑이든 현실에 마냥 안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나름의 선택과 의지로 노력하며 어려움을 딛고 꿈을 이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위안이 되는 건 분명하다. 주인공들의 해피엔딩 중 상당부분이 고모의 유산 덕이라는 부분도 19세기 식 로또 당첨 정도의 판타지라 여기면 넘길 만하다. 2019년 <작은 아씨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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