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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지는 몸, 내 것으로 만들기
보여지는 몸, 내 것으로 만들기
  • 김지연 | 예술 에세이스트
  • 승인 2021.01.2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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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운동을 하고, 운동을 권하거나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시대다. 종류나 강도는 다르겠지만, 새해 계획에 어떤 식으로든 ‘운동’을 끼워 넣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과거보다 건강 정보가 늘어나고 운동할 수 있는 시설이 다양하게 생겨나면서 접근성이 늘어났기 때문이지만, 단순한 건강증진을 넘어서 보통 사람들도 모델같은 몸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바디 프로필 촬영을 하나의 목표로 삼는다. 

이에 운동산업은 좀 더 다양화·고급화·산업화됐다. 운동산업은 ‘운동을 해야만 건강하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우리는 ‘건강해지기 위해’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몸을 만든 뒤 그 몸을 전시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존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몸’이라는 ‘자본’

사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오래된 말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과 체력이 필요하지만 어린 시절에 낭비한 체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을 보인다. 그것을 채워서 다시 건강한 삶을 잇고 원하는 것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분명 버티는 몸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 몸은 사용하기 위한 것이고, 잘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고루 움직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몸은 어딘가 망가질 수밖에 없다. ‘미래 인류는 거북목족’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다. 자연스레 몸을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대부분은 자투리 시간을 내 운동이라는 콘텐츠를 구매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다시 일해서 몸을 망가뜨리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우리의 노동과 운동, 모두 시장 안에 있다. 

운동의 두 번째 메시지는 보기 좋은 몸이 자존감의 상승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다. 신체 이미지가 자본이 되는 사회에서는 자본이 곧 자신감이 된다. 자신감은 자존감과 다르지만, 자존감을 쉽게 뒤흔드는 사회 속에서 구분은 쉽지 않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외모지상주의까지 뒤섞이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 주는 두 가지 메시지 역시 헷갈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운동한다고 하지만,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이 곧 보기 좋은 몸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물론 운동은 다양한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지만, 그것을 넘어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몸을 만드는 일은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과도한 운동과 단백질 섭취는 신체에 무리를 주기도 하며, 개개인의 몸 상태에 따라 과도한 운동이 답이 아닌 경우도 있다. ‘보기 좋은 몸=건강한 몸’이라는 등식은 반드시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과 ‘몸 만들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몸’이 곧 ‘자본’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운동을 하고 자기관리를 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긍정적 이미지에 보이지 않는 가산점을 부여한다. 이는 인간관계에서의 매력, 취업시장에서의 선호도 등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월등한 신체 이미지로 SNS 인플루언서라도 되면, 곧바로 실제 자본 획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바디 프로필 촬영과 다이어트 성공에서 자존감을 얻고 부러움을 사며, 그렇지 못한 이들의 좌절은 여기서 정당성을 얻는다. “다이어트 하지 않은 몸은 긁지 않은 로또”라는 말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운동산업은 콘텐츠를 구매하고 따라오기만 하면 누구나 환상적인 몸을 가질 수 있다고 현혹하지만, 그것은 이 제품을 구매하거나 이 시술만 하면 연예인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하는 미용 산업의 광고와 다를 바 없으며, 누구나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허황된 꿈이다. 한 트레이너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사람들이 많은 돈과 좋은 직장, 학벌은 쉽게 얻을 수 없다고 여기면서 완벽한 몸매는 쉽게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사회가 주입한 메시지 때문이며, 누구나 아이돌 몸매를 가지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 사회에서 실격 판정을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이다. 

실제로는 누구나 연예인 같은 몸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자본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애초에 대단한 신체 자본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이 트레이너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아름다운 몸을 추구하는 대신 몸을 기능적으로 해석하며 운동할 수 있도록 돕는 여성 트레이닝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됐다고 했다. 그곳에는 몸매가 없고 움직임에 필요한 각자 다른 체형만 있을 뿐이다.(1)

 

몸이 내 것이라는 착각

그렇다고 몸을 원하는 만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욕구를 통제하고 성취함으로써 자기효능감을 얻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면 어쩐지 석연치 않다. 몸을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은 맞지만, 그 보여지는 성취만이 성취의 전부는 아니다. 건강에는 다양한 영역이 있고 사람마다 몸은 다르다. 몸처럼 직관적으로 전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분야에서 대단한 노력으로 커다란 성취를 이룰 수도 있고, 건강을 위해 매일 노력하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종류일 수도 있다. 버티는 체력을 만들어낸 몸, 병을 물리친 몸, 살아내기 위해 매일 애쓰는 몸들이 과연 보기 좋은 몸보다 노력이 부족했을까, 그런데 이들은 어째서 보기 좋은 몸만큼 칭송받지 못하는가, 이런 신체는 ‘자존감’을 가질 수 없나. 

운동과 미용 산업이 반복해서 전하는 메시지들을 슬쩍 걷어내고 나면, 몸과 자존감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문이 생긴다. 자본주의와 외모지상주의가 혼재된 이 흐름을 타고 가면 어느새 자존감이라는 단어와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자존감’이라는 것이 정말 자기 안의 내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짜 자존감이 아니라 일정 부분 통제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사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몸이라는 것은 내 것인 동시에 타자에게 보여지는 대상이므로 내 것인 동시에 타자의 것이다. ‘몸 철학’으로 알려진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말하는 몸의 이중성이다.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 의하면, 타자와 이루는 수많은 관계의 교차지점이 나 자신이며,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 의해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단일한 ‘나’는 표면적인 것이고, 그 기저의 진실은 우리 각각의 존재는 타인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몸을 스스로 통제해서 자존감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 몸이 내 것이라는 착각과 다름없다. 자기만족이라는 내부의 동기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 수많은 타인으로 이뤄진 사회에 의해 통제된 것이며, 자존감이라고 여겼던 것의 많은 부분은 사회의 인정으로 인한 자신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술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Battleground)’라고 했다. 몸이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더없이 개인적인 공간이자 끊임없이 타자화되는 곳,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이 전쟁을 거듭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몸, 여전히 중요한

 

My hand is the phone! - 영국 BBC드라마 <이어스 앤 이어스> 중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영국BBC 드라마 <이어스 앤 이어스(Years & Years)>에서 등장인물 베서니는 가족들에게 ‘트랜스 휴먼’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신체를 벗어나 의식을 데이터베이스화 해 클라우드에 업로드하고 영생을 누리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간편하게 몸이라는 전쟁터를 벗어나려는 시도일지 모른다. ‘트랜스 휴먼’은 아직 현실에 없지만, 우리는 이미 페이스타임이나 줌, 구글미트 등을 통해 신체 없이 랜선으로 교류한다. 몸이 이곳에 있어도 우리의 의식은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VR을 통한다면 가상의 세계까지도 진입 가능하다. 이른바 탈신체의 시대다. 그러나 우리가 신체 자본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몸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몸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때다. 자본과 시간을 들여도 운동과 신체자본을 구매하기 어려워지자, 역설적으로 운동의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버티는 체력을 기르고 마음 건강을 구하기 위해 혼자 혹은 랜선으로 함께 운동하며 기록하고 인증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물론 여전히 몸매 유지와 근손실 방지라는 목적이 있을지언정, 이들에게는 코로나 팬데믹을 지치지 않고 건너기 위함이라는 공통의 목적이 있다. 운동산업이 피치 못하게 멈춘 사이에 평소와 다른 패턴으로 운동하며 왜 운동을 하는지 다시 돌아본다. 매일의 건강을 점검하며 몸의 존재를 인지한다. 몸을 가장 사려야 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더 자신의 몸에 가까워지고 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연방 시절 공산당은 사회주의에 무해한 민속공연을 장려했으나 이것은 지역의 진짜 전통춤이 아니라 무대화, 양식화된 공연이었다. 뚜렷한 지역적 특징이 사라지고 균일화된 민속춤은 연방을 균질하게 통합하기 위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도구였다.(2) 또한 지난 봄 코로나19로 인한 재난 브리핑에서 수어는 목소리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소 수어에 관심을 갖지 않던 이들조차, 누구에게나 동등한 정보가 필요한 재난 상황에서 수어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했다. 

더불어 표정과 손의 움직임이 갖는 힘이 주목받으며, ‘덕분에’라는 뜻의 수어로 서로 마음을 전달하는 SNS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신체의 힘이 있다. 몸이라는 것은 보여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다.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전시나 신체의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는 퍼포먼스가 최근 주목 받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몸은 내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곳이자, 타인이 나를 가장 먼저 인지하는 나의 표면이며, 수많은 시선과 욕망이 교차하는 사이에 모호하고 불완전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때로는 잡을 수 없는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중요치 않은 인정에 목매게 만든다. 하지만 몸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무엇보다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변화하는 존재의 지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몸은 여전히 내 것인 동시에 타자의 것이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타자의 시선과 사회의 억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나와 타자의 시선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끊임없이 흔들려야 하는 것이 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의 방향을 바꾸면, 내 몸은 타자의 것인 동시에 여전히 내 것이라는 말과도 같다. 

나의 몸을 인지하고 온전한 현재의 움직임을 감각하며 지금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내 시선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자존감을 구할 방향이 또렷하게 보인다. 바로 그때 몸은 조금 더 내 쪽으로 기울어진다. 수없이 교차하는 관계와 시선 속에서 자유의 영역을 조금 더 넓히는 방법이다.  

 

 

글‧김지연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글을 쓴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공모에 입상했다. 미디어아트 전시 《뮤즈》 시리즈를 기획했고, 책 『마리나의 눈』, 『보통의 감상』을 썼다.


(1) 강혜영, 고권금 외, 『몸의 말들』, 아르테, 2020, pp.145-167
(2) 허유미, 『춤추는 세계』, 브릭스, 2019, p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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