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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식물이 건네는 힐링 영화 <식물카페, 온정>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식물이 건네는 힐링 영화 <식물카페, 온정>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1.06.24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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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카페'에서 온정(溫情)을 느끼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코로나 블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이 생기는 현상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상생활에 제약이 커지면서 오히려 더 많은 힐링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간 내 몸과 마음이 바쁜 일상에 얼마나 지쳐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오히려 멈추고 나니 지치고 상처 난 마음의 구멍이 보이기 시작하다. 그래서 코라나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쉬게 도와주고 다독이는 방법을 찾는다. 평소에는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창가의 먼지, 책, 식물...-이 새삼스레 눈에 띈다. 영화 <식물카페, 온정>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느리게 사는 삶, 여유를 되찾는 삶,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나직하게 들려준다.

 

식물 카페 ‘온정’의 현재

주인공 '현재'는 식물로부터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카페를 찾아오는 손님이 가져온 식물에 적절한 처방전을 조심스레 건넨다. 그는 어떻게 사람들의 아픔을 잘 듣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먼저 아팠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그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를, 그리고 치유의 과정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는 천천히 차를 만드는 섬세하고 차분한 손길만큼이나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도 섣불리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말수가 적은 사람의 신중함과 식물에 대한 적절한 비유와 타인의 상황에 맞는 정성이 담긴 차를 내미는 것으로 위로를 건넨다. 

시험, 연애,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과 음식으로부터 위로받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리틀 포레스트>에, 음식으로 받는 위로가 <심야식당>에 담겨있었다면, <식물 카페, 온정>은 식물로부터 받는 위로가 영화 속에 따스하고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식물을 통해 위로받고 성장하는 이야기는 더 깊은 공감을 불러오고, 영화 속 식물들이 주는 시각적 효과는 힐링을 배가시킨다.


낯선 식물 이름을 알게 하다 '거북알로카시아'

 

깨진 화분 속에 ‘거북알로카시아’가 있다. 깨진 화분 속 식물은 오래 버티질 못한다. 거북알로카시아의 잎이 겉으로 멀쩡해 보여 사람들 눈에는 생기를 띄는 듯 보이지만, 식물은 머금고 있던 양분을 빼앗기고 서서히 말라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겉이 멀쩡해 보여도, 금이 가 있거나 깨진 화분 같은 환경에 살고 있다면 자신이 가진 수분과 양분을 서서히 빼앗기게 된다. 모두 새 화분이 필요하다. 

 

'산세베리아'의 분갈이

 

'뭐하며 살 수 있을까?', '나는 뭔가’라는 존재의 의미로 고민하는 청년이 있다. 그 청년이 선물로 받은 산세베리아를 키우는 몇 년 동안, 산세베리아는 번식력이 좋아 새잎들을 계속 밀어내고 있었다. 자그마했던 산세베리아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왕성하게 자라 자신을 담고 있는 화분이 비좁게 느껴진다. 식물은 자기 몸에 맞는 화분 속에 있어야 잘 성장한다.

식물의 몸집에 비해 화분이 너무 작다면 '분갈이'를 해줘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자꾸 밖으로 빠져나갈 때 마음이 가는 곳으로 사람도 분갈이를 해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화분으로 옮겨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

 

떼어내야 살 수 있는, ‘호야케리’

 

다른 시공간에 살던 식물을 하나의 화분에 옮겨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뿌리가 엉겨든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물과 양분을 함께 한다. "가깝게 붙어 자란 뿌리들이 건강할 때는 서로의 성장점이 되지만, 병들기 시작하면 가장 가까운 곳부터 상하는 지점이 된다.” 이때는 떼어내야 한다.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떼어낼 때 아픔이 크고, 좁게만 느껴졌던 화분이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랑에도 생성과 소멸의 시점이 있다. 못내 아쉽지만, 관계가 끝나감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거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다.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 어딘가에서 미궁에 빠지고 결국 길을 잃는다.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고, 모든 사랑에는 생로병사가 있다. 관계의 끝.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작은 사랑에서,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큰사랑까지. 이제 더 이상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해나갈 수 없을 때 그들의 사랑은 생명을 다한 거다. 생명이 다한 사랑의 끄트머리에 존재하는 언어는 잔인하다. 사랑했던 두 사람의 언어에는 뜨거웠던 감정의 파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없는 감정이 잔뜩 실린 말들은, 뱉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화상을 입는다.

사랑이란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인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따뜻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 말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도 새겨진다. '온정'어린 언어는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감싸 안아준다. 세상살이에 지쳐 있을 때 영화 <식물 카페, 온정>을 만나면 따스한 위로를 건네받을 수 있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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