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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이 라띠마’를 찾아서: <마이 라띠마> 유지태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이 라띠마’를 찾아서: <마이 라띠마> 유지태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02.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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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라띠마>의 기획 의도와 완성된 영화

<마이 라띠마>(유지태, 2012)는 도주한 태국 이주여성과 무력한 한국 실업청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배우 유지태의 감독 데뷔작으로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되고 2013년 도빌 아시아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독립영화이다. <마이 라띠마>1990년대 중국 이주여성이 등장한 <파이란>(2001)과 같은 신파성이 없는 멜로드라마인 조폭영화보다는 1960년대 청춘 멜로드라마의 리바이벌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멜로드라마적 성향이 강한 영화이다. 그러나 2010년대 버전의 청춘 멜로드라마로 이 영화는 1960년대 청춘 멜로드라마의 신파성과 페이소스 보다는 글로벌화 시대 이주여성의 현실적 삶과 누아르적인 도시 세계를 다룬 차가운 사실주의와 고독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지태 감독은 30대의 덜 자란 남자”, 즉 미성숙한 남자의 성장영화를 멜로드라마 장르로 만들 의도로 그의 첫 장편영화를 기획하였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원래 기획 의도는 수영을 주인공으로 하여 2010년대 버전의 청춘 멜로드라마로 그의 정신적 성장을 보여주는 로드무비 또는 성장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마이 라띠마와 그녀의 이야기의 비중이 커지게 되어, 수영과 마이 라띠마가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구도를 갖게 되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마이 라띠마 부분이 너무 반복적이라 덜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영화의 완성 단계에서는 수영 부분을 오히려 좀 버리고 이주여성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자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마이 라띠마 부분의 비중이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은 처음 의도한대로 수영의 성장영화를 고집한 결과, 결국 이주민인 마이 라띠마(박지수)와 다 큰 어른 수영(배수빈)의 꿈과 좌절이 중심에있는 성장영화로 완성했다고 자평을 했다.

수영과 마이 라띠마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들의 이야기를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감독은 여전히 관객으로 하여금 수영에게 더 비중을 두고 보기를 유도하고자 했다. 이에 그는 이 영화의 엔딩을 열린 결말로 처리하였다. 수영이 마이 라띠마를 찾아가지만 서로 만나지 않는 열린 결말의 엔딩은 관객에게 수영과 마이 라띠마의 비중,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사유를 스스로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2010년대 버전의 청춘 멜로드라마

 

<마이 라띠마>의 수영은 1960년대 청춘 멜로드라마의 주인공과 같은 멋진 사나이의 포즈를 취한 건달이 아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남자로서는 실패했지만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건달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를 당한 찌질이 백수이다. 마이 라띠마 또한 남성 주인공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순정을 받치고 그를 위해 죽거나 사라지는 여자가 되는, 미혼모나 접대부, 마담 등의 화류계 여성과 같은 타락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 또한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낸 생존회로의 말단에 처한 이주여성으로 글로벌화의 하녀이다.

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1964)과 같은 1960년대 청춘 멜로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페이소스의 주된 원천은 한국의 가부장적 근대화 프로젝트가 만들어낸 가부장적 멘탈리티와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데 실패한 건달의 좌절 과정을 통해 발생하는 슬픔과 비애감이다. 남성 주인공 건달은 비록 좌절을 당했지만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는 사나이로 당대 영화계와 관객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순정적인 사랑을 받치는 타락한 여자는 그를 위해 더한 타락과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페이소스를 더욱 강하게 유발하고 사라지는 근대화의 하녀역할로 인해 또한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1960년대 청춘 멜로드라마는 근대화 시기의 손상된 한국 남성의 남성성으로 인한 남성들의 좌절과 절망의 페이소스 유발과 치유를 위해, 즉 멜로드라마적 효과를 위해 타락한 여자를 근대화의 하녀로 이용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2010년대 청춘 멜로드라마 버전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냉혹한 누아르 도시 공간에서 소외된 루저 수영에겐 타락한 여자영진(소유진)는 그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순정적인 여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남성적 에고를 위협하고 손상시키고 그를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로 등장한다. 이제 그의 손상된 남성적 에고를 치유하고 구원해줄 여자는 이주여성 마이 라띠마로 대체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2010년대 청춘 멜로드라마는 글로벌화 시대에 부적응자 루저의 전락이 불러일으키는 페이소스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이주여성을 글로벌화의 하녀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글로벌화 시대 한국영화 속에 이제 이주여성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젠더화된 하위계층의 근대화의 하녀를 대체하여 글로벌화의 하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이 라띠마>의 성과는 바로 이러한 이주여성 마이 라띠마의 존재와 역할을 주목하고 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수영과 마이 라띠마의 성장영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의 냉혹한 한국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가족도 직업도 없는 신용불량자 수영과 타락한 여자영진, 불법체류 이주여성 마이 라띠마의 사랑은 순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러나 부담감 또는 불신 때문에 떠나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그런 사랑으로 볼 수 있다. 감독은 이러한 사랑의 과정을 통해 남성 주인공이 성장을 하게 되는 성장영화로 그의 첫 장편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마이 라띠마>는 수영의 파멸보다는 덜 자란 남자수영이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 마이 라띠마가 망가진 모습을 보고, 본인이 결국 성장하게 되는 그런 수영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든 성장영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이 라띠마>가 수영을 주인공으로 한 청춘 멜로드라마와 그의 성장영화로 만들어졌다면 마이 라띠마가 겪는 시련과 불행은 수영의 비애감을 더 고양시켜주기 위한 한 것이며, 그의 성장을 위해 더욱 타락하고 망가져, 죽거나 사라지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마이 라띠마> 또한 <파이란>과 같이 이주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이야기를 위해 이주여성의 이야기를 전유하고 있는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이 라띠마는 파이란처럼 강재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 속에 존재하다 사라지는 빨래 요정같은 유형의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수영에게 버림받고 누아르의 도시 공간에서도 가장 비루한 홈리스들의 주거공간인 지하도에서 기거하며 임신한 아이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수영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감당해야 할 현실 속 여자이다. 따라서 수영은 그녀를 더 이상 구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더 깊은 비애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 마이 라띠마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더 이상 그에게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게 된다.

사실 이 영화의 결말은 수영이 떠난 후 마이 라띠마가 한국 사회 이면의 가장 어두운 지하 세계로의 추락과 소진을 통해, 거기서 역설적이지만 자신과 마이 라띠마”(태국어로 새로운 삶을 의미)를 찾아 탈주할 수 있는 순수 강도의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마이 라띠마>는 기획 의도와는 달리, 수영의 성장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이 라띠마가 수영을 기다리며 겪는 사랑과 배신, 그리고 추락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수영의 망가진 모습을 보면서 그녀 자신이 결국 성장하게 되는 그녀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읽을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이 라띠마>는 추락을 통한 그녀의 소수-되기 과정과 지하세계로부터의 탈주의 시도를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마이 라띠마의 소수-되기

 

이주여성들을 단순히 수동적인 피해자로만 부각시키지 않고, 이들의 긍정적인 특성과 역할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최근 이주여성에 대한 담론의 추세이다. 이주 여성 마이 라띠마 또한 무력한 희생자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한 추락을 통해 소수-되기의 과정에 진입함으로써 오히려 주체로서의 해방과 새로운 삶을 추구하기 위해 이동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영화 전반부에 마이 라띠마는 마치 쫓기고 있는 사냥감 동물처럼 늘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시아주버니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는 그녀를 수영이 구해주기 전까지 그녀는 태국에서 팔려온 돈값을 해야하는 상품 또는 동물처럼 한국 시집 식구들의 성적 학대, 정신적, 물리적 폭력, 노동 착취를 위한 강제 피임 등, 온갖 가정 폭력을 견디며 살고 있었다. 신원보증이 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되어 추방당하기 때문에 고향에 있는 치매 걸린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지적장애 남편, 시어머니의 욕설, 시아주버니의 성추행, 모든 것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이 라띠마는 본인의 주민등록증 갱신 조차할 수 없는 신용불량자 신세이지만 그녀의 구원자 수영과 포항에서 서울로 도주하여 그와 지내게 된 후에도 추방을 당할까봐 불안해서 수영에게 더욱 의존적이 된다. 수영이 술집 여자 영진의 유혹에 넘어가 그녀를 버리고 떠난 뒤에도, 그녀는 수영이 다시 와서 포항에서처럼 그녀를 구해줄 것을 믿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는 몸으로 누아르 도시 공간의 폭력을 혼자 감당하면서, 마이 라띠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 추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녀는 수영의 구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더 타락한 여자가 되는 대신,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주체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인간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벙어리 할머니를 도와 박스를 줍기도 하며, 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줄려고 한 돈가방을 그 할머니 목에 걸어주고, 추근거리는 홈리스들을 욕설과 저항으로 제압하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그녀의 소수-되기로 진입을 의미한다.

소수는 역사와 사회에서 배제되어, 어떤 고정된 경계를 세우지 않고 언제나 다시 이동하는 노마드이며, 따라서 소수-되기란 권력과 지배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사실 이주여성으로서 마이 라띠마는 하위주체로 생존회로의 말단에서 다중적인 억압을 겪지만, 오히려 경계를 횡단하는 초국가적 이동성의 동력이 그녀를 소수-되기로 유도할 수 있다. 그녀의 본격적인 소수-되기는 다수의 시스템에 존재한다는 것이 억압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녀와 세계 사이에는 단절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성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돌아온 수영과의 만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그의 남성적 에고가 철저하게 깨져 비참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수영과 마이 라띠마가 홈리스들과 섞여 지하도에서 박스를 깔고 서로 돌아누운 채 이야기를 나누는 시퀀스에서 수영이 혐오와 자책, 슬픔과 분노를 터뜨리며 오열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배수빈이 열연을 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돌아누워 수영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지나가.” “괜찮아.” “괜찮아.”라고 서툰 한국말로 위로하는 누더기 옷에 배가 부른 마이 라띠마의 모습이 수영의 오열 장면을 더욱 감동적인 것으로 만든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기 때문에 이렇게 망가진 그녀를 차마 마주보지 못하는 수영의 좌절감을 더욱 부추겨 페이소스를 강하게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마이 리따마의 이야기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에게 돌아온 수영의 오열은 최종적으로 그가 더 이상 그녀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이후 수영이 잠든 사이 그녀가 떠나는 것은 청춘 멜로드라마의 타락한 여자들이 그랬듯이 자신과 임신한 아이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수영을 위해 떠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의 사라짐은 자신의 무책임함을 깨닫게 하는 계기로 수영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열하는 수영보다 오열하지 않고 그를 위로하는 마이 라띠마의 사라짐은 마이 라띠마를 찾기 위한 그녀의 떠남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열린 결말은 마이 라띠마의 이야기의 시작을 시사하는 엔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이 라띠마의 스토리-텔링을 시작하며

 

<마이 라띠마>의 엔딩 시퀀스는 수영이 사라진 마이 라띠마를 찾아 마침내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 그 집까지 왔지만, 만날 용기가 없어 뒤돌아서는 것으로 구성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 비현실적인 장면이, 시골 바닷가 방파제에서 차를 대놓고 서있는 영진, 태국춤을 추는 흰옷 입은 여자, 그 옆에서 아이를 안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지나가는 세련된 모습의 마이 라띠마를 비추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아마 이 장면은 마이 라띠마를 찾아 왔다가 안 만나고 가면서,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수영이 떠올린 이미지들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삽입은 끝까지 수영의 이야기에 비중을 둔 그의 성장기로 영화를 만들려고 한 감독의 의도를 반영한다.

그러나 똑바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마이 라띠마의 사뭇 위협적일 정도로 당당한 시선에서 우리는 이제 그녀의 스토리-텔링이 시작할 때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 영화는 이주여성 마이 라띠마의 존재를 주체로 재현하기보다는 억압되고 착취당한 소수로서 그녀를 사라진 존재로 그리고 왜 그녀가 사라진 존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친다. 그러나 이주여성 마이 라띠마를 등장시킨 이 영화는 그녀의 스토리-텔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수영화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영화를 지향하고 있는 영화로서 그 성과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출처: 『젠더와 문화』(11권1호, 2018)에 실린 “한국 영화에서 사라진 이주여성 찾기”(7-39)에서 다룬 <마이 라띠마>에 대한 읽기 부분을 기초로 하여 다시 쓰기를 한 글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저자·정문영
계명대 영문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각색과 전유 및 상호매체성과 문화 혼종성의 관점에서의 각색영화 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며, 한국 이주여성 영화 읽기 또한 주된 연구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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