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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바다’를 위한 변명
‘고요의 바다’를 위한 변명
  • 안숭범 l 경희대 교수
  • 승인 2022.03.0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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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에 대한 주목도는 확실히 높아져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흥행 수준도 평단의 예상을 훨씬 상회한다. 물론 일부 작품은 기대만큼 관심을 끌지도, 충분한 비평적 조명을 받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요의 바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희소한 SF 장르로 기획된 데다가, 스타 배우 정우성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개봉 이전 세간의 관심은 상당했다. 주연배우인 공유, 배두나 등을 향한 국내외 팬덤도 작품 개봉 이전부터 큰 기대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개봉 후 10일까지는 플릭스패트롤 TV쇼 부문 5위 안팎에 올랐지만, 50여일이 지난 지금은 100위권 밖으로 사라졌다. 인터넷 공간에서 펼쳐지는 대중비평의 내용도 차가운 편이다. 과학적 정합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비판이나 부분적으로 엉성한 CG 등을 폄하하는 리뷰를 흔하게 읽을 수 있다. SF 장르 국내외 영화들과 비교하면서 폄하의 근거를 찾아 밝히는 글도 있다. 그럼에도 <고요의 바다>가 수준 미달의 작품이라고 뭉뚱그려 평가절하되는 게 온당할까. 만약 잠재적 시청층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이유를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이 글은 <고요의 바다>에 관한 짧지만 구체적인 변명이다. 

‘고요의 바다’라는 제목은 이 작품의 장르적 성격을 중의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고요의 바다’는 물이 메말라 생명체의 활기가 사라진 근미래 지구의 바다를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고요의 바다>의 오프닝은 ‘식수 평등분배 법안’에 관한 시위, 국가생존대책위원회의 활동 등을 보여주면서 출발한다. 물에 대한 소유 가능성, 접근성의 수준이 곧 계급이 된 절망적 풍경을 담아낸다. 말라버린 한강과 황폐해진 도시의 풍경은 세피아 톤으로 생존에 관한 우울한 전망을 가시화한다.

사건 무대가 달로 옮겨진 이후에는 더욱 충격적인 장면이 주어진다. 수많은 SF물에서 아름다운 푸른 별로 그려졌던 지구의 모습이 황토빛 얼룩이 선명한 형태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는 <고요의 바다>가 SF 하위 장르 중에서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특징을 도상적으로 구현하려 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지구를 하나의 폐쇄공간으로 타자화시킨 후, 엔트로피의 증가로 소멸이 예정된 세계를 마주하게 하는 전략이다. 이런 기획이 낯선 것은 아니다. <미래소년 코난>, <아키라>,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아니메와 <블레이드 러너>, <매드맥스>,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영화에 담긴 시공간은 그런 절망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끌어안는다.

여기에 SF 장르의 보편적인 설정 중 하나인 ‘바이오파이러시(Bio-piracy;  선진국의 식품·의약 기업들이 개발도상국의 생물학적 자원을 수탈 수준으로 무단 이용하는 것)’에 관한 소재도 삽입돼 있다. <고요의 바다>는 이 설정을 국가 차원의 음모론과 결속시키면서 긴장감을 높인다. 대체에너지를 선점하려는 글로벌 쟁탈전 속에서 비윤리적 선택을 서슴지 않는 공적 기관의 음모를 다룬다. 굳이 비교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비밀조직 ‘제레’와 그들이 숨기려고 하는 세컨드 임팩트를 둘러싼 흑막은 <고요의 바다>에서 한국 우주항공국과 5년 전에 발생한 발해기지 방사능 유출 사태로 치환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요의 바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의미는 더 명징하다. 그것은 달의 지형으로 인해 검은색으로 보이는 평원지대를 일컫는 보편적인 수사다. 이때 시각적으로 상상되는 ‘검은색 지대’는 거대한 비밀과 음모를 다루는 미스터리 장르의 뉘앙스와 연결된다. <고요의 바다>의 플롯, 곧 사건들이 구조적으로 배열되는 방식은 불가해한 사건에 접근해가는 장르적 공식에 충실하다. 이를테면 <고요의 바다>는 감정적 몰입을 자아내는 몇 가지 사안을 두고, 시청자의 정보량을 통제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시청자들은 플롯이 한참 진행되기까지 5년 전 발해기지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일종의 선악과처럼, 혹은 <반지의 제왕> 속 절대반지처럼 등장한 월수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도 헷갈린다. 물론 불가해한 존재로 등장한 ‘루나 073’의 정체를 두고도 진지한 해석 게임을 벌여야 한다. <고요의 바다>는 시청자를 추리의 주체로 만들면서 진행되는 셈이다. 

이런 장르 혼종의 전략은 발해기지로 떠난 대원들의 개인사와 사적 열정이 국가(우주항공국)의 공적 권력과 길항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그들 장면은 <고요의 바다>의 파토스 축을 이룬다. 그 위에 두 갈래의 ‘인과적 설득’ 과정도 구축돼 있다. 예컨대 송지안(배두나)의 경우 언니와의 개인사를 통해 여러 번 감정적 동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녀는 기본적으로 이성적 논리의 축, 곧 서사의 로고스 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송지안이 풀어내려고 하는 월수의 비밀, 루나 073의 정체, 5년 전 발해기지의 연구책임자였던 언니의 비밀스러운 행적 등은 각각 ‘발단의 불가해성’, ‘서스펜스’, ‘의외의 결말’이라는 가쓰오의 추리 서사 구조를 정석적으로 밟는다.

서사 초반 송지안이 찾아 헤맨 발해기지 데이터 스토리지는 장르적 공식에 따른 맥거핀이기도 하다. 한편 우주항공국이 부여한 공적 임무에 충성을 다하려 했던 한윤재(공유)는 에토스 축을 끌고 간다. 그를 성격화하는 것은, 엘리트 군인으로서 국가의 명령에 대한 자세, 대원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태도, 한 아이의 아빠로서의 책임감 등이다. 그가 서사의 중요 국면에서 취하는 도덕적·윤리적 입장은 지속적으로 시청자의 공감과 신뢰를 이끌어 낸다.

종합하면, <고요의 바다>는 다양한 SF 하위 장르들의 외피를 걸친 후, 미스터리 장르의 플롯으로 시청자를 매혹시키려 한다. 여기에 호러 장르의 문법도 종종 삽입된다. 대원들은 산소가 없는 우주, 연락이 끊긴 발해 기지 내에서 제한된 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의문의 살인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감염방식을 알 수 없지만, 유기체를 만나면 공포스럽게 증식하는 미지의 물질(월수)과도 싸워야 한다. 이는 ‘코로나-19’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시청자의 내면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루나 073은, 최초 등장 시에는 괴물이나 귀신과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 그녀는 우주의 지배적 우월종이라는 착각 속에 자연환경을 마음껏 이용해온 인류의 행태를 고발하는 존재다. 그녀는 기술을 도구삼아 신적 권력과 자유를 누려온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공격하며 우리 안의 괴물성을 응시하게 한다. 루나 073이 발해기지 천장 곳곳에 그려놓은 ‘눈’ 이미지는 그런 반성적 성찰의 의미를 담은 ‘자기 응시에의 요구’일 수 있다. 결국 지안의 죽은 언니가 남긴 암호 ‘루나’는 우리의 왜곡된 욕망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고요의 바다>가 <D.P.>, <오징어 게임>, <마이 네임>, <지옥> 등에 비해 아쉬운 부분을 짧게 덧붙이고자 한다. 일단 한국 시청자들의 SF 장르에 대한 선호 방식은 매우 까다롭고 예측하기 어렵다. 심지어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거대한 신화적 역사를 스펙타클하게 펼쳐가는 검증된 텐트폴 작품들도 외면받을 수 있다. 반면에 런닝타임이 169분이나 되는 난해한 SF물 <인터스텔라>가 ‘사회적 현상’이라 불릴 만한 흥행 스코어를 기록했다(참고로 <인터스텔라>는 한국 전체인구의 1/5이 영화관에 가서 봤다).

 

<고요의 바다>만 놓고 보면, 너무 정석적이며, 서사의 다음 행로에 대한 복잡성도 약한 편이다. 미스터리물의 특성상 시청층의 기대와 예측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추리 본능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건 중요하다. 그런데 <고요의 바다>의 플롯은 매우 안전한 경로를 밟는 쪽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서사진행 속도와 영상의 리듬이다. 다양한 OTT 플랫폼을 유영하는 빈지 와칭(binge watching) 세대의 특징은 장르를 불문하고 더 빠른 서사 진행 속도를 요구한다. 또한 예기치 않은 리듬 변화를 통해 기대와 예측의 방향을 트는 각별한 전략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내게 <고요의 바다> 시즌 2 제작을 응원하는지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루나 073은 한윤재가 달에서 만난 인류의 새로운 딸이다. 다친 발을 월수로 치료받은 후, 루나 073은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돼 간다. 그러나 아직 지구에는 발이 휜 채 아빠를 기다리는 한윤재의 진짜 딸이 있다. 그녀는 앞세대의 과오를 신체에 새긴 불행한 미래세대를 상징한다. 인류의 새로운 딸(루나 073)을 위해 자기 딸과의 약속을 내려놓은 한윤재가 벌써 죽었을 것 같지 않다. 

<고요의 바다>시즌 2가 제작된다면 부디 루나 073을 둘러싼 비밀과 의혹이 지적으로 더 흥미롭게, 더 빠른 속도로, 더 리드미컬한 전환을 이루며 전개될 수 있길 희망한다. 또한 성공이 보장된 레퍼런스가 없는 한국 SF 서사에 의미있는 이정표를 세워주길 바란다.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학부설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 이 글은 대한민국 해외문화홍보원에서 발행하는 <KOREA> 2월호에 필자가 게재한 영문비평을 기본으로 수정·보완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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