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반복과 시선 <아사코>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반복과 시선 <아사코>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4.11 10: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사코>에는 반복의 모티브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아사코(카타라 에리카)와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의 만남과 헤어짐은 세 번 반복되며 고쵸 시게오의 사진전은 바쿠와의 만남과 유사하게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와 함께 반복된다. 이 반복은 인물과 사건으론 모자라다는 듯 카메라 연출과 구도로 확장 된다. 예컨대 오프닝 시퀀스에서 빵을 사러 나가던 바쿠를 따라 트랙아웃 되던 카메라는 공원에서 아사코를 바라보는 자동차 트랙아웃 쇼트로 다시 등장한다. 또는 택시를 타고 떠나는 아사코를 쫓는 료헤이를 차 내부에서 바라보는 쇼트는 택시를 타고 오사카로 떠나는 료헤이를 쫓는 마야를 같은 구도로 찍었다. 이처럼 이 모티브는 영화 전반에 과도할 정도로 배치되어 반복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연출의 포화도가 관객이 픽션을 자각하는 임계점을 넘어선다.

 

픽션을 자각시키는 장치는 반복에만 있지 않다. <아사코>는 끊임없이 카메라라는 사각의 프레임을 의식하게 하거나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아사코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부터 그녀는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고초 시게오의 사진이라는 정확한 역 쇼트가 있지만 그녀의 시선은 명확하게 봉합된 픽션의 경계를 향해있다. 이후에도 아사코는 바쿠의 등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볼 때, 유리에 비친 료헤이를 바라볼 때도 가상의 시선 너머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는 연극이라는 소재를 활용할 때에 아사코의 위치를 통해 재확인 된다. 그녀는 마치 관객처럼 주방의 네모난 프레임 안에서 마야와 쿠시하시의 재연을 바라본다. 또한 센다이에 봉사활동을 간 아사코와 료헤이를 비추던 카메라는 느닷없이 시선의 주체를 알 수 없는 핸드헬드로 넘어간다. 이 시선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거는 순간에 이르러야 아사코의 카메라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아사코라는 관객이 지속적으로 바라보지만 자각되지 않는 사각의 프레임, 픽션의 경계란 이야기 속에서 어느 순간 사라졌지만 그 이면에 숨어있는 바쿠라는 과거와 료헤이라는 현재의 중간 지대다. 꿈을 먹는 가상의 동물을 맥을 지칭하는 이름대로 바쿠는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드라마의 바깥의 무언가다. 쿠시하시가 연기했던 체홉의 대사처럼 지쳐 잠드는 노동자의 삶인 료헤이의 반대편에 있는 방랑자는 등장만으로 일상을 뒤흔든다. 때문에 바쿠와 료헤이가 같은 인물이 연기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아사코는 겉모습이 완전히 똑같은 바쿠와 료헤이 둘 사이에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바쿠를 택한다. 그녀에게 바쿠란 가져보지 못 한 비일상이자 환영적 과거이고 허구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사코가 방파제 앞에 서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던 료헤이와의 과거가 반복되고 있음을 자각하고 바쿠/료헤이라는 픽션의 경계를 바라보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픽션과 같은 비일상은 일상을 뒤흔들며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다. 갑자기 터진 폭죽, 거대한 지진이 각각 바쿠/료헤이와의 사랑 이전과 이후를 만든 것처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삶으로 거침없이 침투해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다. 쿠시하시의 말처럼 모든 형태가 있는 것은 깨어지기 마련이다. 이제 아사코는 무너진 관계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어진 상태로 살아가기 위해 료헤이에게 돌아간다. 루게릭을 앓으면서도 유머와 일상을 잃지 않는 오자자키와 그의 어머니처럼 환상 없는 일상을 살기 위해 걸어간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난 관객의 위치가 아닌 주체적 의지로 향한다.

 

그러면 프레임이라는 창 뒤편이 아니라 문이라는 픽션의 경계를 지나 계단을 올라 료헤이를 바라본다. 이때 료헤이는 시선이 아니라 수건을 던지는 것으로 답하며 마야가 무사히 출산했다는 말을 건낸다. 화해의 손짓은 아니지만 무언가 안심이 되는 모호한 대화가 오가고 료헤이와 아사코는 창밖으로 나가 강물을 바라본다. 점점 불어 오르는 강물은 비일상이 다시 일상을 덮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만든다. 때문에 료헤이는 평생 아사코를 믿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아사코는 알고 있다고 답한다. 이제 시선을 섞지 않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둘 사이에는 서로를 대상화 하며 만들어내는 환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대신 거짓된 환영이라는 픽션을 벗겨내 더럽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삶만이 남아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