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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누군가의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그리고 앞으로의 죽음에 대해 – 영화 <축복의 집>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누군가의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그리고 앞으로의 죽음에 대해 – 영화 <축복의 집>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2.04.19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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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 20여 년 전, 카메라를 통해서만 꿈꾸던 청년이 있었다. 돈 앞에서 도무지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없었던 청년들이 한 세대로 명명되었다. 2004년 <마이 제너레이션>의 병석과 재경의 삶은 흑백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을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카드깡 대출로 몇 푼을 손에 쥔다 해도 제대로 된 밥을 먹기도, 편하게 잠을 자기도 쉽지 않았던 그때의 청년들은 버거웠다. 이제와 보니 그래도 그들에겐 이곳을 떠나 무엇으로 향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듯 하다. 비록 병석은 카메라를 팔아야 했지만 아마도 돈이 생긴다면 다시금 그 카메라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보였고, 재경에겐 대화를 나누고 좋지 않은 음식이라도 내어줄 병석이 있었다. <축복의 집>을 보기 전, 절망만이 가득하다고 믿었던, 그래서 조용하고 고요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마이 제너레이션>의 삶에 적어도 나와 내일과 상대와의 소통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영화 <축복의 집> 속 해수(안소요)는 암전 속에 갇혀버린 소리로 자신의 삶을 드러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놓인 이 답답함은 해수가 삶인지 죽음인지 모를 현재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을 의심치 않게 한다. 암전에서 벗어난대도 이 갑갑함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가 따라가는 해수의 발끝에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의 노동과 불안과 냉대, 그리고 죽음이 묻어 있다. 엄청난 일인 것 같은 죽음도 해수 앞에선 그저 버겁게 처리해야 할 일일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슬픔도 애도도 그 흔한 안타까움도 사치일 뿐인 죽음 앞에 해수가 바라는 것은 엄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뿐이다. 자신과 늘 함께 해 온 이의 죽음 앞에서 조차 침묵하는 해수의 입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축복의 집>에 남은 것은 생존뿐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해수는 생각할 수 없다. 재개발을 위해 허물어져가는 주택들 사이에 끼인 해수의 집은 곧 철거될 것이다.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고 일당을 주던 일자리는 아마도 이 시국에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공장에서의 노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어떤 지위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명확치 않다. 이런 해수를 돕는 듯 보이는 이들의 의도는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영화가 가장 많이 보여주는 해수의 현재는 구부정하게 잰 걸음으로 바삐 움직여 닥치는 대로 일하는 모습일 뿐이다. 그저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자야 하는 그 흔한 본능의 시간조차 해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가 이처럼 잔인하게 해수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내일이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이의 현재가 정말로 그런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해수가 겪어내야 하는 현재가 마치 그런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셔터가 내려진 건물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따라 들어간 곳에서 해수는 마치 죄인처럼 앉아 있다. 그의 질문을 미루어 보건데 누군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듯하다. 그것을 알면서도 해수에게 질문하는 이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연민도 녹아 있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는 해수 역시 덤덤하다. 영화는 바로 이 무덤덤함 사이에서 해수의 삶을 짐작하게 한다. 해수가 드나들던 공간이 누군가의 죽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섬뜩하리 만큼 많은 생각과 감정이 오가도록 만드는 식이다. 이는 해수를 둘러싼, 사실상 그가 이 나라에서 어떠한 길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다.

 

이 효과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바로 해수를 도와주는 듯 보이는 한 중년 남성의 설정이다. 해수를 차에 태우고 그의 집에서 직접 시신을 처리를 돕는 이는 어떠한 이유로 그 일을 하는 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합법적인 일을 하는 이라고 하기에는 사인(死因)이 드러난 흔적을 감추고, 불법적인 일을 하는 이라고 하기에는 태도가 미심쩍다. 이후 그는 해수가 보험금을 받게 될 때 자신에게 돌아올 금액을 계산하고 이를 담당할 보험사의 명함을 건네주면서,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이 어딘지 수상한 기운을 풍기면서 그가 그리 좋은 의도로 해수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후 엔딩크레디트에서 그가 형사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관객에게 영화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해수가 어디에서도 어떤 식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확해졌을 때의 먹먹함은 오랫동안 고스란히 남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할 해수의 삶과 직면하게 한다. 해수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은연 중 그가 그런 상황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진단하는 지금이 어떤 현실인지를 묻는다. IMF 이후의 <마이 제너레이션> 속 인물들이 조금이라도 나았을지도 모른다며 회상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현실이라면 해수는 과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상황 속에서도 그에게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해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해수는 시신을 확인하고 처리하러 온 형사에게 갑자기 생각난 듯 물 한잔을 따라 건넨다. 더운 여름,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집에 온 이에게 뭔가를 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또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에서 건넨 최선의 호의이자 아부일 것이다. 그러나 형사는 해수가 물을 꺼내는 냉장고, 해수의 모습과 집을 찬찬히 훑은 후 그가 건네는 물에 끝내 입을 대지 않는다. 더워서 부채질을 하면서도 마치 해수를 둘러싼 모든 것을 거절하는 듯 보이는 이 태도는 <축복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사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축복의 집>은 분명 소수의 누군가에게 드리워진 절망이 아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많은 이들의 현재를 그리고 있다. 과연 해수‘들’의 침묵과 견딤과 피로와 한숨은 얼마나 많이 쌓여 있을까.

 

<축복의 집>(2022)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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