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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 와해의 시대, 공포가 귀환한다:〈극장판 주술회전 0〉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 와해의 시대, 공포가 귀환한다:〈극장판 주술회전 0〉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2.04.2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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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주술회전 0〉와 『주술회전』 등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IP는 《~》, 원작은 『~』, 개별작품은 〈~〉로 표기하였습니다.

 

〈극장판 주술회전 0〉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극장판 주술회전 0〉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를 사유하는 데 있어 공동체를 경유 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진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곧 공동체를 사유하는 일이라고 주장해도 크게 반박할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될 정도다. 그렇다면 영화가 무엇인지 묻기 위해 공동체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인지 무엇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체적 객체(Instance Object)를 두고 생각해보면 영화관 같은 공간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이마저도 플랫폼의 등장으로 유동성을 확보한 상태다. 조금 더 충실한 기술을 위해 우정과 같이 고도로 추상화된 아이디어들을 떠올릴 수는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영화관’ 같이 상쾌한 느낌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데, 아마 한병철(1959~, Prof. of Philosopy in Künste Berlin Univ.)이 『투명사회』(2014)에서 “투명성이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는다”고 지적한 바와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정은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행위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채무 관계를 낳는 듯하다.

대중들도 이러한 경향이 강해진 것 같다. 헤란트 캐챠도리안(Herant Khatchadourian, 1933~, Prof. of Human Biology in Stanford Univ.)은 그의 저서 『죄의식: 일말의 양심』(2010)의 서문에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보다는 권리의식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 같다”고 진술한다. 그만큼 관계를 맺고 네트워크를 쌓아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수도 있겠다. 이러한 의식은 (당연하겠지만) 대표적인 공동체의 구체적 객체,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가족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부부가 중심이 된 공동체라는 점에서 가족은 통념과 상식선에서 사랑을 바탕에 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보자. 그렇다면 현대는 가족까지도 부담으로 여겨지는 시대인가? 그런 것 같다. 적어도 일본 아니메의 경우는 그렇다. 아니메는 코로나 이후 가장 흥미로운 표본들을 제공하는 영상 장르 중 하나다. 코로나로 인해 극장에서 관객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과 <극장판 주술회전 0>(이하 <주술회전 0>)은 1억 달러 흥행 애니메이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등 이전에 없던 새로운 성과들을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코로나 이후에 가족이 우리에게 서사적으로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지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주술회전 0>에는 아래와 같이 흥미로운 진술이 나온다.

 

“이건 지론이지만, 사랑만큼 왜곡된 저주는 없어(これは持論だけどね、愛より歪んだ呪いはないよ)”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주술회전 0>에서 고죠 사토루(이하 ‘사토루’)는 사랑으로 인한 저주로 고통받는 주인공 옷코츠 유타(오가타 메구미, 이하 ‘유타’)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 자못 진술처럼 보이는 사토루의 대사는 저주에 걸려 좌절하던 유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유타의 변화는 맥락상 유타가 사토루의 지론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최소한 유타에게 있어 ‘사랑은 곧 저주’라는 사토루의 지적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사토루의 발화가 발화대상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할지라도 대사 그 자체만 따지면 이상하다. 사토루의 대사를 따라가면 사랑은 저주없이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이 되기 때문이다.

사토루의 대사가 바탕삼고 있는 최소의밋값은 [사랑⊂저주]이다. 사토루는 이를 유타의 사례로 개별화하는 대신, 본인의 지론으로서 일반화시키고 있다. 사토루의 일반화가 독특한 점은, 일반화가 본인의 지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지론은 ‘가지고 있거나 주장해온 생각 혹은 이론’으로써 ‘자신’과 같은 재귀 대명사를 함의한다. 사토루가 지론을 통해 [사랑⊂저주]를 일반화하는 순간, 그가 주장한 명제의 의밋값은 [사토루⊃(사랑⊂저주)]가 된다. 따라서 사로투가 진술한 사랑은 사토루에 의해 개별화된 사랑이다. 사토루는 지론을 그대로 유타에게 적용했으며, 유타 또한 앞서 밝힌 바처럼 맥락상 사토루의 지론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타는 사토루를 따라 주술사가 되기 위해 도쿄 도립 주술 고등전문학교(이하 ‘주술고전’)에 입학하며 “나는 주술고전에서 리카의 저주를 풀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주술회전 0>의 오프닝은 이 작품이 사랑이라는 주제, 그리고 주제가 함의한 갈등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안내판과 같다. 일단 <주술회전 0>에서 사랑은 타인과 소통을 전제로 한 소통과정 혹은 담화가 아니다. 동시에 타인을 반성하는 계기 또한 되지 못한다. 오히려 개인에게 귀속된 감정 상태, 그것도 부정적인 감정이 왜곡된 상태에 가깝다. <주술회전 0>에서 사랑을 통해 대상화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주술회전 0>의 사랑은 유폐를 지향하고 있으며, 타인을 이해하기보단 나 자신을 반성하는 상태에 가깝다. 과장과 비약을 섞어 말하자면, <주술회전 0>에서 사랑으로 제시되는 거의 모든 소통 상태는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 외부와 접촉하는 방식은 저주로, 그 자체로 침범을 전제한다.

원작 『주술회전』에서 저주는 인구에 비례하여 규모가 커지는 부정적인 집단 무의식의 일종이다. 달리 말해, 저주란 ‘인간에게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부려진 주술’이다. 이를 사토루의 지론에 적용하면, 사랑은 인간에게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를 조건으로 두고 있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이 사실과 다르게 해석될 수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이며, 동시에 사랑의 확인은 실재와 달리 부정적인 감정(또는 저주)이 오독된 상태를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주술회전 0>에서 사랑은 크게 3단계를 통과하는 과정이다. ①혹자의 부정적인 감정이 저주가 되어 ②저주가 타인을 침범했는데 ③저주를 왜곡하여 실재와 달리 오독한 상태가 곧 사랑인 셈이다.

 

사토루의 지론, [사랑⊂저주]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풀어놓고 보면 대단히 아스트랄한 상황인데, [사랑⊂저주]라는 사토루의 지론을 유타에게 적용하면 사태는 더욱 묘해진다. 일단 유타가 사랑으로 얻은 결과가 트라우마와 같이 심각한 심적 고통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인 일이다. 사토루의 지론에 따르면 사랑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발현된 저주를, 저주당한 자가 자의적으로 왜곡한 상태다. 유타는 이제 오독을 정정하고 사랑의 원형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사태가 묘한 이유는 부정적인 감정을 인식하고 이를 왜곡했던 건 유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주술회전 0>는 회상 장면을 동원하면서까지 유타가 관계를 정의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상대였던 리카가 유타와의 관계를 정의했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유타의 회상에 따르면 리카는 부정적인 감정에 통달할 수밖에 없던 환경에 놓여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5살 때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유타와 함께 등산을 갔다가 실종되었다. 이후 리카는 산속 보호소에서 혼자 생활했다. 리카와 유타는 리카가 보호소에서 구조된 직후, 병원에서 만났다. 마을로 내려온 뒤에도 리카의 불행은 끊이지 않았다. 친할머니는 잇따른 불행의 원인을 리카에게 돌렸으며, 마을 사람들 또한 리카의 친할머니에게 동조하여 리카를 초현실적인 대상으로 보았다. 리카가 적의로 둘러쌓인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른들도 돌아볼 정도의 미인’이었고, 자신의 외모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리카는 작가가 캐릭터를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룬다고 지적함이 마땅할 정도로 혹독한 환경 안에 놓인 캐릭터다. 리카에게 주어진 유일한 장점은 외모인데, 그마저도 타인의 선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이용해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가 혹독한 환경을 통해 획득하는 것은 리카와 유타의 관계에 대한 심리적인 현실감이다. 리카가 놓인 상황은 그를 둘러싼 공동체가 그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상황이다. 동시에 공동체의 관용 없이는 사회적 생존을 기대할 수 없는 리카가 일말의 기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자신의 신뢰를 공동체에 매몰시키는 방법뿐이다. 때문에 리카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울어진 신뢰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 경우 리카가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방법과 전략은, 공동체에 속해있는 동시에 공동체와 다른 속성을 지닌 인물이 있다고 믿을만한 사례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리카의 입장에서 유타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만약 ①유타도 리카를 적의하는 공동체와 같은 감정을 품고 저주로 발현됐고 ②이것이 리카에게 전달되었는데, ③리카가 저주를 왜곡하여 수용한다면 이는 리카가 유타를 사랑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동시에 ①리카의 부정적인 감정이 저주가 됐고 ②이것이 유타에게 전달되었는데, ③유타가 저주를 왜곡하여 수용한다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서로의 저주는 상호작용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그들은 집단독백에 가까운 사랑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가학의 성>과 같은 이시이 타카시의 영화들이 떠오를만한 <주술회전 0>의 아스트랄한 상황은 무엇을 지목하고 있는가?

 

싸울 이유가 부정적인 경우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일차적으로 <주술회전 0>도 자신이 설정한 상황이 아스트랄하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주술회전 0>가 종착하는 상황은 ‘백귀야행(百鬼夜行)’이다. 백귀야행은 저주가 물리적으로 현현한 형태인 요괴들이 거리를 활보하게 된 상황으로, 극 중 유타가 마주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자 사토루의 친구이자 주적인 게토 스구루(사쿠라이 타카히로, 이하 ‘스구루’)가 ‘주술로 인류가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사토루가 사랑을 왜곡된 저주로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묘하다. 스구루는 고죠와 같은 주술고전 출신의 실력 있는 주술사였으나, “약한 자들을 위해 강하고 선한 자들이 고생과 목숨을 바치는” 것에 부조리를 느낀 인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라는 이유로 “고생과 목숨을 바치는” 책임이 부과된 상황에 스구루가 모순을 느꼈다는 점이다.

자신 앞에 주어진 책임에 대한 갈등은 <주술회전 0>에서 여지없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다만 <주술회전 0>를 넘어, 원작 『주술회전』 전체에서도 언더도그마와 그로 인한 책임의 문제는 갈등의 주된 동력이 된다. 달리 말하면 약한 자가 선의를 기대하여 만들어지는 갈등이 작품 전반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을 지탱하는 주된 갈등인 만큼, <주술회전 0>에서도 갈등은 스구루와 유타 모두에게서 개별적으로 해결된다. 백귀야행을 지나 서로를 마주한 스구루와 유타는 서로에게 “대의”와 “순애”를 내건다. 흥미로운 건 스구루의 대립항으로 등장한 가치가 ‘순애’라는 점이다. 사랑은 앞서 밝혔듯, ‘왜곡된 저주’이자 상호작용 없이 집단독백을 만들어내는 감정이다. 다소 섣부르게 말하자면 상호작용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사랑, 나아가 우정과 같은 느낌이 아닐 것이다. 되려 상호작용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건 스구루가 내걸었던 대의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의만 남은 공동체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주술회전 0>는 ‘왜곡된 저주’로 인해 세상에 남겨진 주인공 유타가 주술고전이라는 유사가족을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영화는 엔딩크래딧이 모두 올라간 후, 쿠키로 ‘시부야 사변’을 예고하며 끝난다. ‘시부야 사변’은 현재까지 진행된 『주술회전』에서 발생한 가장 큰 재난이다. 『주술회전』의 주인공 ‘이타도리 유지’(이하 ‘유지’)는 백귀야행을 통해 공동체를 얻었던 유타와 달리, 시부야 사변을 통해 공동체를 잃는다. 시부야 사변으로 유지가 어른으로 생각했던 ‘나나미 켄토’는 유지에게 책임을 부탁하며 죽는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쿠기사키 노바라’는 안면 전반이 날라가는 치명상을 입고 실종된다. 유지의 친구인 이누마키 토게는 팔 한쪽을 잃고 영구적인 장애를 얻는다. 유지를 책임지겠다던 사토루는 스구루의 저주를 통해 봉인된다. 시부야 사변이 벌어진 시점에서 유타는 유지의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시부야 사변 이후, 스구루가 원했던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위해 “고생과 목숨을 바치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 세상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주술사들끼리 데스매치를 벌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작품 속 평가는 꽤나 가혹한 편이다. 데스매치에 참가하게 된 한 인물(샤를 베르나르)은 이렇게 말한다. “싸울 이유가 부정적이야. 배틀 만화는 독자가 만화에 몰입할 이유가 필요하다고!” 한마디로 싸움의 명분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되돌아봐도 그 “순애”가 ‘왜곡된 저주’라면, 남는 것은 서로에게 던지고 던져지는 저주를 바탕으로 집단독백을 펼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가족 와해의 시대, 혹은 공포의 귀환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극장판 주술회전 0〉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앞서 말했듯 가족의 사전적 정의는 부부가 중심이 된 공동체로서 상식과 통념상 사랑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다. <주술회전 0>처럼 [사랑⊂저주]라는 지론이 일반화된 경우, 우리는 그 지론을 어떻게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가장 손쉽고 선명한 답변은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가 와해한 시대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대단히 김세고 힘 빠지는 결말이지만, 당장은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와해는 왜 일어났는가?” 더 나아가 “환원주의적인 진단이 현 사태를 평가할 수 있기는 한가?” 혹은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적절한 진단을 내리고 처방하는 것에 도움을 주기는 할까?” 반대로 “대의와 같은 어젠다에 집중하는 게 도움이 되기는 할까?”

가족은 아니메에 있어서도 일종의 마지노선이었다. 가령, 《기동전사 건담》에서 샤아 아즈나블이 끝까지 수호하려는 가치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구체화된 가족이다. 샤아의 경우에는 이미 해체된 가족을 어떻게든 수호하려는 과정에서 끝내 몰락하고 만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너의 이름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레이-신지-아츠카, 그리고 타키-미츠하는 모두 어떤 요인에 의했던 가족 공동체의 와해를 목격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와해한 가족을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의미 지어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와 가족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나루토》와 《강철의 연금술사》에 이르면 가족 마지노선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진다. 나루토-사쿠라와 엘릭-원리 두 작품 모두 (이어지든 아니든) 않든 모두 서사적 여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말은 가족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결말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블리치》 등에서도 발견되는 대체적인 경향이다.

가족에 대한 가치는 《귀멸의 칼날》에서도 이어지는 흐름이다. 다만, 《귀멸의 칼날》도 《주술회전》과 거의 비슷한 길을 간다. 탄지로-네츠코의 서사가 여타의 영웅서사 혹은 소년 장르와 구분되는 점은 네츠코든 탄지로든 소중하게 여겨지는 무언가를 위협한다면, 일단 죽이고 본다는 점이다. 빌런에게 변명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 또한 탄지로에게 처형을 당한 뒤다. 이 경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먼 관계를 지향하고 가까운 관계는 지양하는 것이다. <주술회전 0>는 먼 관계를 권장하는 시대에 벌어진,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 와해의 전조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현대는 가족까지도 부담으로 여겨지는 시대인가? 그런 것 같다. 적어도 일본 아니메의 경우는 그렇다. 이제 여기, 그리고 작금의 상황이 싸울 이유가 부정적인 경우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당장 눈앞에 재앙이 닥치고 있고 심적・물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그것이 곧 공포다. 와해의 자리에 공포가 귀환하고 있다.

 

 

글·이현재
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 평론 신인상.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연구를 보조・수행했다. 지금은 경희대 K-컬처·스토리콘텐츠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에서 영화 평론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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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영화평론가)
이현재(영화평론가) blueparanchung@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