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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 후의 진정한 사랑: <사랑 후의 두 여자> 알림 칸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 후의 진정한 사랑: <사랑 후의 두 여자> 알림 칸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08.1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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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후의 두 여자>: 파키스탄 동성애자 감독의 트라우마와 사랑의 여운

 

<사랑 후의 두 여자>(After Love, 2020)는 단편영화 <삼형제>(Three Brothers, 2014)로 영국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인 감독 알림 칸(Aleem Khan)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한 영국 백인 어머니와 무슬림이면서 동성애자로 성장한 감독 자신의 방황했던 청소년 시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그의 전기적인 삶을 내러티브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가 그의 “전 인생”을 담고 있고, 그에게 잠재된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 작업 자체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구 찾기였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그의 첫 장편영화 <사랑 후의 두 여자>는 소수자로서 그의 정치성이 깊이 내재된 영화임이 분명하다.

이 영화의 감독 칸은 성인이 되어 무슬림 신앙을 버리고 커밍아웃을 하기 까지 영국과 이슬람 문화라는 다른 두 문화 속에서 그 어디에도 결코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그의 동성애적 섹슈얼리티와의 혼란스러운 갈등에 휩싸인 채 성장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에 상당한 수치심을 느껴 그 사실을 감추고 부정을 했는데, 그 이유는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라 적응자가 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오랫동안 비밀리에 공존하는 별개의 분리된 개인적인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 후에”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청소년기에 그가 겪었던 그의 트라우마와 그것을 치유할 수 있었던 사랑에 대한 잔잔한 회상이 이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겪었던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의 성장 시기에 그의 어머니가 겪었던 혼란과 갈등은 그가 경험한 것과 유사하며,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내러티브의 전개를 통해, 즉 자신이 겪었던 위기를 어머니에게 비쳐보는 방식을 통해 그의 정치성을 구현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 영화를 전통적인 무슬림 내러티브 영화가 아니라 여성 영화 또는 페미니즘 영화로 만들어, 성정치성의 이슈를 전경화하여 그의 정치성을 은밀하게 다루고자 한 것이다. 이 영화는 그의 어머니의 허구적 버전인 주인공 메리(조안나 스캔런)에게 백인 무슬림으로서 그녀의 “가시성, 위엄과 공간”을 부여하고, 그녀의 진실 찾기 과정을 부각시킴으로써 은밀하게 그의 정치성과 억압된 동성애적 섹슈얼리티를 구현하고 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칸처럼 모두 다른 인격들이 은밀하게 공존하고 있는 분열을 의식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소극적이고 주저하는 영국 백인 무슬림 여자 메리를 포함하여, 수다스럽고 외향적인 프랑스 여자 주느비에브(나탈리 리샤르), 외관상 반항적인 파키스탄계 프랑스 소년 솔로몬(탈리드 아리스)은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얼굴을 보이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사실 여 영화는 도버와 칼레 사이 해협을 오가는 페리 선장 아메드(나세르 메마르지아)가 영국과 프랑스에 전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정을 꾸리는 이중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어, 메리가 그의 이중생활에 대한 탐색이라는 모험으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2. <사랑 후 두 여자>의 내러티브와 시각적 이미지의 이중성

통제된 느린 카메라 워크로 포착된 오프닝 쇼트는 앞으로 전개될 세밀하고 진정성이 강조되는 이 영화의 톤과 이중적인 리듬의 패턴을 보여준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부부가 조명이 전경을 이루고 있는 어두운 부엌으로 함께 들어와 아메드는 얼굴 정면을 보이지 않은 채 더 어두운 배경 거실로 들어간다. 전경의 찻물 끓는 소리, 후면에 아메드가 틀어놓은 무슬림 기도송 너머로 부부가 사갈루(sag aloo)와 방문하고 온 무슬림 교우의 갓 태어난 손녀 이야기를 나누는 평온한 가정의 일상을 담은 차분한 이미지의 장면을 보여준다. 차를 가지고 거실로 들어간 메리가 죽어 있는 아메드를 발견하는 극적인 상황 또한 그 장면을 전경화하지 않고 그대로 어두운 후면에서 포착하고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일상적인 상황과 대비되는 극적인 상황까지도 톤과 리듬의 세밀한 차이와 변화로 처리하는 편집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처음부터 보여준다.

 

이후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 뒤, 울고 기도하며 오가는 조문객들 사이에 거의 넋이 나간 그러나 조문에 위엄을 갖추고 응대하는 흰색 무슬림 상복을 입은 커다란 체형의 메리가 화면 중간에 앉아 있는 장면은 이 영화 전반에 걸쳐 반향하게 될 일련의 이미지들을 설정해준다. 정적인 롱테이크로 찍은 애도 장면은 메리가 경험하는 절망의 시간을 고요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영화는 평온한 일상과 극적인 죽음, 내면적인 좌절과 외면적인 평정 등, 내러티브와 시각적 이미지 상에 있어서 이러한 이중성을 섬세하게 드러내 보이는 촬영과 편집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줌인으로 흰 히잡을 쓴 메리의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천천히 스크린 가득히 포착하며 끝나는 조문의 시퀀스에 이어 백악절벽의 갈라진 틈을 클로즈업하며 천천히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 저 멀리에서 절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메리를 익스트림 롱숏으로 보여준다. 천천히 다가오는 침착한 메리의 내면적인 좌절을 백색 절벽에 난 틈의 검은 선으로, 시각적 이미지로 상징하는 이러한 기법은 앞으로 반복되어 사용된다.

 

이 영화는 영어, 불어, 우르드어 등 3개 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주인공 메리는 말보다는 조용히 그녀의 푸른 눈으로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의 주요 장면들, 그녀의 외면적인 고요와 평정심과는 상반되는 내면적 갈등과 절망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대부분 그녀가 있는 또는 바라보는 백암절벽, 호텔 방, 바닷가, 내연녀의 빈 침실, 텅 빈 집 등, 조용한 장소에서 시각적 그리고 청각적 이미지로 전달된다. 페리를 타고 해협을 건너가는 메리의 관점에서 보는 무너져 내리는 백암절벽, 호텔 방에 햇빛 속에서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 내연녀 침대에 누웠을 때 본 점점 커져가는 천장에 난 금 등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들과 마치 심장 소리 같은 파도소리, 선박들의 고동 소리,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와 아기 우는 소리 등과 함께 다양한 청각 이미지들로 메리의 내면과 그녀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칸 자신도 이 영화에서 도버와 칼레의 촬영 현장에서 녹음한 소리들로 만든 “소리의 세계”를 집중 탐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3. 아메드의 “번버링”: 영국 무슬림 가정과 프랑스 세속적 가정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은밀하게 이중생활을 해온 아메드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진지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에서 만들어낸 “번버리스트”(bunburyst), 그것도 가장 진보적인 번버리스트로 불릴 수 있다. “번버리”(Bunbury)라는 가상의 인물을 핑계로 가족의 도리와 사회가 요구하는 의무감으로부터 도피하는 일에 능한 빅토리아시대 댄디(dandy)이자 바로 원조 번버리스트인 알저논(Algernon)은 “결혼생활에서 세 사람은 좋은 짝이 되지만, 두 사람으로는 안 된다(in married life three is company and two is none.)”라는 와일드식의 아포리즘을 가장 진보적인 번버리스트라고 알저논이 인정한 잭(Jack)에게 주장한다. 아메드의 내연녀 주느비에브가 영국에 있는 부인에게 아메드가 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덕분이라고 메리에게 한 그녀의 푸념은 아메드의 이중 결혼생활 역시 번버리스트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해준다고 볼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타락한 프랑스 연극이 그러한 주장을 해왔고, 지난 4반세기 동안 행복한 영국 가정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잭과 알저논의 번버리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흥미롭게도 주느비에브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번버리, 번버리스트, 그리고 번버링(bunburying), 번버리즘(bunbur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와일드는 칸처럼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동성애적 섹슈얼리티가 공적인 이슈로 드러나 사회적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혀 치욕적인 삶을 살았던 작가로 옥스퍼드 출신 댄디이자 그 자신 번버리스트이다. 따라서 와일드는 번버링이라는 이중생활을 당대 사회 제도로서 결혼과 불륜 풍습 등을 풍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기존 사회의 패러디와 더불어 그의 억압된 동성애적인 섹슈얼리티와 숨은 자아 실현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칸 또한 와일드와 유사한 의도로 아메드의 번버링과 이를 추적하는 메리의 스토리를 다룬다.

그러나 와일드와 그의 번버리스트들은 모두 영국 상류사회 옥스브리지 출신 댄디이며, 이들의 번버링은 영국 상류사회와 가정이 요구하는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반면에 칸과 그의 번버리스트 아메드는 영국사회에서 문화와 인종적 소수자인 파키스탄 남자이고, 그의 번버링은 이슬람교와 무슬림 사회와 가정이 요구하는 의무와 율법 실천의 억압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성은 단순히 인종적 차이만이 아니라 종교, 성정체성 등 복합적이고 교차적인 요인들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칸은 이러한 별개적인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요인들이 반영된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메리를 아메드의 번버링을 추적하는 주체로 등장시키고 있다.

 

4. 메리의 개입: 두 삼각형의 연결

 

아메드의 번버링이 만들어낸 영국과 프랑스 가정은, 남근중심적 오이디푸스적 구조로 구조화하면, 영국 가정은 아메드, 메리, 부재한 아이(죽은 유아)로 그리고 프랑스 가정은 부재한 아메드, 주느비에브, 솔로몬으로 구성되는 삼각형을 형성한다. 이 두 개의 삼각형은 라캉의 정신분석 패러다임을 도식화한 두개의 제1, 2 삼각형(왕, 왕비, 장관과 왕비, 장관, 분석가로 각각 구성되는 두개의 삼각형)처럼, 별개의 삼각형으로 떨어져 서로를 거울같이 비추고 있는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두 삼각형을 서로 마주 보게 하면, 이 둘은 하나로 겹쳐져, 사실 하나의 삼각형(왕/장관/듀팽)이 되고, 그 결과 왕비는 남성들의 경쟁적 관계 맺기를 중재하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 뒤에는 사라질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사라지는 중재자”가 된다.

따로 떨어져 있어야 각각 존재할 수 있는 아메드의 두 가정 또한 별개의 두 삼각형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정신분석 패러다임을 오히려 깨뜨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메드가 죽고 난 뒤, 메리의 개입으로, 즉 제1의 삼각형의 메리가 제2의 삼각형에 개입하면서 이 두 삼각형은 서로를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다. 이 영화는 정신분석 패러다임에서 왕비의 위치에 있는 메리 또는 주느비에브가 중재자가 되어 남자들(죽은 아메드, 죽은 아이, 솔로몬) 사이의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맺어주고 사라지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죽은 아메드가 중재자 역할을 맡아 두 여자, 메리와 주느비에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 두 여자와 솔로몬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주는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그리고 두 삼각형의 연결로 죽은 아메드는 사라지는 중재자가 아니라 여전히 현전한다. 죽은 그는 실체로는 부재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음원이 보이지 않는 다양한 “아쿠스마틱”(acousmatique) 사운드의 효과를 통해, 메리, 주느비에브와 솔로몬이 떠나보낼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유령처럼 그의 현전을 시사하고 있다.

칸이 이 영화를 “유령 이야기”라고 불렀듯이, 죽은 아메드는 마치 유령처럼 떠나지 않고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틈틈이 메리가 핸드폰을 꺼내 듣는 아메드가 보낸 음성 메시지, 연애시절 그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내준 로맨틱한 내용의 편지, 주느비에브 집에서 엿보게 된 또 다른 그의 가족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홈무비 영상 속 그의 모습과 목소리 등, 부재한 아메드는 주로 ‘목소리’로 현전한다. 이러한 아쿠스마틱 사운드는,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 물리적 공간과는 다른 차원의 영역에 속한 유령과 같은 존재의 편재된 영향력을 의식하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아메드의 유령이 메리로 하여금 해협을 건너 자기와 전혀 다른 프랑스 여자를 만나도록 유도를 한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이다.

 

5. 메리의 선택: 소수-되기

 

이 영화의 주인공 메리는 십대 때 같은 런던 공공주택에서 살았던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을 해서 히잡을 쓰고 사그 파니르(saag paneer)를 만드는 법, 우르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칸의 백인 영국여자 어머니를 허구적 시나리오 속에 가져다 놓았을 때 탄생한 캐릭터이다. 사실 메리의 결혼과 개종은 그녀의 선택이고, 다수가 지배하는 영국 사회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소수-되기”로 볼 수 있다.

남편의 내연녀의 집에, 제2의 삼각형 구조 속에는 포함될 수 없지만 안과 밖을 넘나들며 부재한 마님을 대체하는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 취급을 받는 하녀로 들어가, 이사를 돕는 것 또한 그녀의 소수-되기 시도이다. 이와 같이 그녀의 아메드의 번버링 추적은 그녀의 소수-되기 과정으로 진행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느비에브와 솔로몬 또한 소수-되기의 블록 속으로 유도된다. 메리가 아메드의 번버링을 추적하여 해협을 건너간 것은 배신감과 증오심, 또는 분노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개종한 무슬림 백인 여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 아이를 잃는 비극을 비롯하여 모든 사회적 소외와 장애들을 극복하면서 남편과 함께 만들어온 무슬림 가정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이슬람교에 헌신해온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갖게 된 회의와 상실감 때문에 해협을 건너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매리 역할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스캔런은 히잡을 쓰고 다니면 얼마나 다른 대접을 받는지를 체험하기 위해 칸의 어머니 옷을 빌려 입고 같이 외출하면서 연기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히잡을 쓰는 것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는 주느비에브에게 너무 오랫동안 쓰고 있어서 그렇지 않다고 메리가 대답하듯이, 자주 반복되는 히잡을 쓴 메리의 기도하는 장면은 무슬림 복장과 신앙을 실천하는 무슬림으로서의 그녀의 정체성이 이제 그녀의 일부가 된 것 같아 보인다. 또 한편으로 히잡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장면, 기도를 하면서 절규하는 모습은 무슬림으로서 그녀의 내적인 스펙트럼을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그녀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오히려 무슬림으로서 그녀의 존재의 가시성을 확보해준다.

 

주느비에브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 아메드의 번버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남편의 흔적, 자신과 정반대인 내연녀의 당당한 모습, 자신을 파키스탄 여자라고 한 남편의 거짓말, 자신의 죽은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솔로몬을 훔쳐 보면서 느끼는 메리의 굴욕감과 절망감은 시각적 그리고 청각적 이미지들로 섬세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전달된다. 그녀가 바다 위에 누워 몰아치는 파도에 자신의 몸을 맡긴 채 하늘을 응시하는 장면, 히잡과 옷을 벗고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는 장면 등은 미움과 질투의 표출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소수-되기 과정에서 존재의 현실태를 벗는 시련과 아픔, 그리고 수용을 보여주는 일련의 장면들인 것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이사 도우미 역할을 끝낸 메리가 솔로몬을 위해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파키스탄 전통 요리 방식으로 저녁을 준비하여 같이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외출했던 주느비에브가 합류해서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식탁에서의 시퀀스이다. 메리가 음식을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간단한 우르드어로 서로 소통도 하고, 솔로몬이 가고 싶어 하는 파키스탄 이야기 등을 해주는 가운데, 그녀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들켜 어색했던 솔로몬이 주느비에브와 달리 문화와 인종적 정체성과 성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이 겪는 갈등과 혼란을 이해해줄 수 있음을 느끼며 유대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소외감을 느낀 주느비에브가 끼게 되면서 세 사람은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에 놓이게 되고, 곧 서로를 깡패와 창녀라고 욕하는 격한 모자간의 싸움이 메리 앞에서 벌어진다. 흥분한 솔로몬이 주느비에브에게 침을 뱉자, 메리는 자신도 모르게 솔로몬의 빰을 때리게 되며, 이에 주느비에브의 분노는 메리에게로 향하고, 세 사람은 모두 적대적인 관계로 흩어지게 된다.

이 식탁 시퀀스에 이어 어둠이 다가오는 해변에서 메리가 음성사서함에 보관된 아메드의 목소리가 기한이 만료되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자, 당혹감과 상실감에 휩싸이게 되는 장면으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절정에 이르고, 아메드의 유령이 사라진 이제 메리는 그의 번버링을 추적하는 과정을 끝낸다. 그리고 주느비에브와 솔로몬에게 자신의 정체와 아메드의 죽음을 알리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관계 맺기는 주느비에브와 솔로몬이 아메드의 번버링을 추적하기 위해 해협을 건너와 도버의 메리를 찾아옴으로써 구체화된다.

 

6. 메리와 주느비엔느의 이중적 거울 비춰보기

 

칼레에 도착한 첫날 밤, 익스트림 롱숏으로 불이 켜진 등대를 중앙에 두고 주느비에브의 집이 있는 거리를 카메라가 잡고 있는 가운데, 낮에 왔다간 메리가 다시 그녀의 집 쪽으로 걸어오는 장면을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잡고 있다가 등대와 그녀의 집을 번갈아 보는 메리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장면은 그녀 자신이 절벽에 서서 남편이 오길 기다리듯, 내연녀 또한 저 등대를 보며 그를 기다렸을 것을 헤아리는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오이디푸스적 내러티브의 패턴에 따르면, 메리와 주느비에브는 한 남자를, 그것도 죽은 남자를 두고 질투하며, 헛된 싸움을 해야 하는 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보기의 주체인 메리는 상대방 주느비에브를 자신을 투영해서 비춰보는 거울로, 그리고 쉽지는 않지만 그녀의 입지에서도 그럴 수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사실 오이디푸스적 패턴에서 여자는 남성 주체의 일방적인 거울 비춰보기의 도구인 거울 역할만을 맡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보기의 주체로서, 그리고 소수-되기의 주체로서 메리는 주느비에브에게 일방적으로 거울 역할만 강요하지 않는다. 두 여자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비춰보기를 하는 이중 거울 비춰보기를 함으로써 마담과 하녀, 대타자(the Other)와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의 서열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주체로 상호간의 유대를 형성하는 것을 이 영화는 주목한다.

자기 집 문앞에서 히잡을 쓴 메리를 보자마자 대뜸 청소업체가 보내준 청소부로 간주하며, 집에 들여 청소부 앞치마를 건넨 주느비에브의 행동은 무슬림 여자에 대한 그녀의 편견과 우월 의식을 시사한다. 그녀는 아메드가 유부남인 것, 무슬림이라서 자신을 위해서 영국에 있는 아내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국 아내를 정략결혼을 한 아이도 없는 파키스탄 여자로, 일종의 “번버리”로 만든 아메드의 거짓말에, 그녀는 사회적 전통을 깬 것은 맞지만 그들 나름 만든 규칙에 따라 가정을 이루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항변한다. 아마도 그들 나름의 규칙이란 그녀가 내세운 규칙으로 무슬림 종교와 문화로부터 자유로운 결혼생활,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성적 자유 허용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주느비에브는 아메드의 영국 아내가 백인이 아니라 파키스탄 사회가 강요한 정략결혼을 한 고향 여자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 “무”일뿐인 부재한 부인(대타자)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백인 여자인 그녀는 아메드의 파키스탄 정체성과 문화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전용하듯이,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는 그녀를 그의 부인을 대체하는 욕망의 대상(오브제 쁘띠 아), 하녀와 같은 지위로 간주하는 서구사회의 전통도 무시할 수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가능했다. 메리의 정체를 모른 채,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그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편안하고 당당하게 밝히는 주느비에브는, 메리도 직접 목격하고 있지만, 아메드가 부재한 가운데 혼자서 경제와 육아를 책임져야하는 가정생활이 이제 더 이상 지속하기가 힘든 상황에 이르렀음을 털어놓는다. 특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성정체성의 혼란까지 겪고 있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지만, 사춘기의 솔로몬을 감당하기엔 도저히 역부족이다.

도버해협을 가운데 두고 거울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도버와 칼레에서 아메드를 기다리는 두 여자와 두 가정은 모든 것이 정 반대로 대조적인 서로의 거울이 된다. 인내하며 수용적인 메리와 개방적이며 직설적인 주느비에브, 아이가 죽어서 부재하지만 아메드와 함께 하는 평화롭고 안정된 메리의 무슬림 가정, 반항적인 아들이 있지만 남편이 부재한 불안정한 주느비에브의 세속적 가정,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의 거울로 마주보는 두 삼각형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이 두 여자는 서로에게서 결핍된 가장 원하는 것을 본다. 메리는 아이를 원했고, 주느비에브는 안정감을 원했기 때문에, 서로 상대에게서 각자 가지지 못한 것을 본다는 것이다. 외견상으로 복장 뿐 아니라 몸도 풍만하고 마른 체형으로 두 여자는 대조적이다. 메리가 주느비에브를 처음 만난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벗은 몸을 유심히 바라보고 욕조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두 여자는 거울을 통해 또는 거울 너머로 자신을 보기도 하고 또는 상대방의 삶을 관조하기도 한다. 각자 상대방의 침실에 들어와 화장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거울 너머로 아메드가 상대방 여자와 잤을 침대를 바라보는 장면들이 두 여자의 이중 거울 비춰보기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나 두 여자는 각각 다른 여자의 침대에 누워보면서, 그 침대가 상징하는 여성에게 주어진 젠더의 틀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메리의 침대에 함께 누워 두 여자는 그 틀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들로 재탄생하는 의식과 같은 소통을 나눈다. 침대에 누워 서로를 바라보며 메리가 주느비에브에게 왜 아메드가 자신을 파키스탄 여자라고 속였을까라고 물어본다. 쥬느는 모른다고 하지만, 청년 시절 아메드와 그의 아내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고, 자신을 택하기 위해 아메드가 아내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아내에 대하여 질투를 했고,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면 미칠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아메드의 “더 좋은 반”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를 그의 아내와 공유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만,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래층에서 아메드의 모자를 쓴 솔로몬이 연애시절 고향에 간 아메드가 메리에게 보낸 잊고 있었던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여 틀어 놓은 아메드의 목소리는 다시 먼 과거에서 돌아와 나타난 아메드의 유령처럼 그녀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중재자 역할을 한다. 솔로몬에게 그 테이프를 주고, 마치 죽은 아메드 또는 죽은 아들의 분신처럼 서로 울면서 포옹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멜로드라마적인 장면이다. 이로써 메리와 주느비에브는 솔로몬과의 관계를 통해 주느비에브가 공유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사랑을 이제 할 수 있게 된 것임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7. 백암절벽에 선 세 사람

백인 영국 여자와 프랑스 여자가 선택한 파키스탄 남자와의 사랑은 결코 현대인이 추구하는 쉽고, 안전한, 모험이 없는 사랑이 아니다. 두 여자는 각각 인종적 소수자 아메드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사랑을 시작하여 각각 가정을 이루었다. 사실 사랑은 하나 되기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아메드와의 사랑을 그의 아내와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주느비에브보다 메리가 더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메드가 죽고 그의 이중생활을 발견하자, 그동안 그와 함께 하나가 되어 위기를 극복하며 이루어온 행복한 가정이 해체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 빠지게 된 것이다. 아메드의 번버링에 대한 메리의 추적은 진실 찾기의 과정이자, 소수-되기와 이중 거울 비춰보기에 의한 두 여자의 유대 관계 형성 과정이다.

“사랑은 장님이다, 사랑을 하면서 현명해질 수가 없다”(Love is blind. One cannot love and be wise.)라는 영어 속담이 말해주듯이, 메리는 하나 되기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닌 사랑 그 너머에서, 즉 “사랑 후”(after love)에 마침내 바디우(Alain Badiou)가 예찬한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사랑은 하나 되기가 아닌, 둘이 무대에 등장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이며, 그 둘은 그 무대를 다자를 향해 열린 무대로 만드는 최초의 다자임을 마침내 “사랑 후에 두 여자”는 알게 되고 이를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백암절벽 위에 솔로몬을 중앙에 두고 선 세 사람이 해협을 가로질러 먼 곳을 함께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엔딩은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 나아가 셋... 다자의 관점에서 공유될 수 있는 하나의 삶과 진리를 구축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재발명 가능성을 세 사람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자를 향해서 열림”이 가능한 “사랑 후의 진정한 사랑”에 대한 칸의 추억과 갈망이 스며들어 있는 이 영화는 그 자신 뿐 아니라 다자가 함께 겪고 있는 혼란스러운 문화적 인종적 정체성과 성적 정체성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진정한 사랑이 실종된 현대사회에서 재발명되어야 한다고 바디우가 주장한 진정한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탐색을 유도함으로써, 문학, 철학, 종교, 예술 전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중에 하나인 사랑에 대한 사유와 담론에 접속할 수 있는 리좀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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