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이 호의 문화톡톡] 유통기한 지나버린 속물 백신
[이 호의 문화톡톡] 유통기한 지나버린 속물 백신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5: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알리기에리 단테는, 지금은 고전이 되어 읽히지 않고 인용만 되는 책 <신곡>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캄캄한 숲속에 있었다. 그 가혹하고도 황량한 야생의 숲이 어떤 것이었는지 입에 담는 것조차 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더불어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명한 구절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도 있다. 인생의 어둠 속에 서 있고, 희망이 없는 곳에서 헤매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다.

 

 

그 책의 이름은 르네 지라르라는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가 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1977년 국내에 <소설의 이론>(삼영사 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2001년 김치수 교수에 의해 제대로 완역되어 출판되었다. 지금은 희귀종이 되어버린 문학도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읽은 것은 김윤식 교수의 번역판이었지만 이후에 김치수 교수의 번역판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았어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과 전율은 기억에 생생하다.

지라르의 이 책은 기본적으로 소설론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고리타분하게 소설의 형식을 분석한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서구 고전 걸작들의 주인공들(돈 키호테, 마담 보봐리, 쥘리앵 소렐, 프루스트의 화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을 설명하면서 그들과 우리들이 얼마나 닮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소설들은 우리의 욕망이 자발적이고 순수 긍정형태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한 채 남이 심어준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 형이상학적 초월을 위해 그 욕망을 매개하는 중개자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형상을 일컬어 이 책에서는 ‘속물(snob)’이라고 부른다.

 

“속물은 속물근성으로 획득하게 될 새로운 존재를 가장함으로써 비천함을 피해야 할 정도로 비천한 존재도 아니다. 속물은 항상 자신이 바야흐로 이 새로운 존재를 획득하게 되리라 믿고, 마치 자신이 이 존재를 이미 소유하고 있듯이 행동한다. 따라서 그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만하게 군다. 속물근성은 거만함과 비열함이 풀 수 없게 뒤섞인 혼합물이다. 이 혼합물이 형이상학적인 욕망을 규정한다.”(르네 지라르/김치수․송의경 역,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한길사, 2001, p.120)

 

조금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의 메시지는 소설이라는 장르 양식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구조적 상동성을 갖는다는 주장으로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설이 부르주아의 서사시(루카치)라는 연장선에서 근대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한 인물군상을 그려내면서 인간 영혼의 피폐성과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이 이론서의 내용을 소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이야기 해두어야 할 것은, 인간이 바른 중개자를 갖지 못할 경우, 주변의 타인을 자신의 중개자로 삼고 불온한 형이상학적 욕망에 붙들려 굴절된 초월을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데 이 책은 그러한 우리 ‘근대인’들의 증상들을 고발할 뿐, 직접적인 치료책은 알려주지 않는다. 하기야 처방까지 일러주었다면 이 책은 소설 분석서로서의 가치를 잃고 팸플릿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슬쩍 암시는 하고 있다. “인간 중개자의 거부, 굴절된 초월의 포기는, 소설가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불가피하게 수직적 초월의 상징을 요청한다”고 말하고 있다.

속물근성이란 결국 타인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모든 태도를 일컫는다. 그것은 일종의 식인주의에 다름 아니다. 니체에게 혹독하게 욕 먹었던 칸트 선생은 이를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으로 고쳐 썼고,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타인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도) 대하라”라고 다시 고쳐 쓴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자면 엄마의 젖을 빠는 유아도 이미 엄마를 어느 정도는 수단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속물(snob)이란 말의 영어 동의어는 팔레스티니즘(Philistinism)이다. 쉽게 말해 팔레스타인적인 정신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 이 말은 유태인중심주의에서 생겨난 단어임을 짐작케 한다.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고, 신의 말씀(율법)을 삶과 문화의 중심원리로 조직한 유태인들이 주변 민족들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혼음 풍습, 우상을 숭배하는 생활과 문화를 볼 때 속물적인 삶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문화상대주의에 의해서 자문화중심주의의 허울이 무너져 내렸지만, 역사책의 어떤 곳을 펼쳐도 음란한 문화권이 오래도록 번영을 누렸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은 1960년대에 나온 책이며, 국내에서도 이제는 많이 거론되지 않지만 지금 시대야말로 더욱 이 책에서 말하는 욕망의 삼각형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발달되고 확산된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사람들이 더더욱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고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발견하는 법을 점점 잃어 버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온누리에 가득한 자본주의 세상의 축복을 기쁘게 누리지 못하고 늙어버린 비관주의자의 기우일 것이다.

 

 

글 · 이호(문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