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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의 문화톡톡] 이야기 범람 현상에 관한 단상(2)
[이 호의 문화톡톡] 이야기 범람 현상에 관한 단상(2)
  • 이호(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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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의 홍수 현상에 관하여

이 글에서 ‘텍스트’란 책을 포함한 모든 인간 문화의 단위를 일컫지만, 구체적으로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아무튼 텍스트는 삶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이 때 삶이란 단지 텍스트 생산자의 개인적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텍스트 생산자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와 환경, 그 시기까지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지혜, 기술과 아이디어의 집적물이 그 텍스트에 담긴다. 저자가 하나의 텍스트에 그러한 맥락을 남김없이 모두 쓸어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거기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사고들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게 마련이다. 언어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런 개념이나 역사, 사고를 포함하기 때문이며, 하나의 텍스트는 무의미한 언어의 낱말더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저자가 당대의 최고 지성들이었다면 텍스트의 무게는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텍스트는 역사를 포함해서 당대의 최고 지식과 기술, 지혜와 인간 지성과 노력의 결실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담는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시간을 때우거나 오락거리를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지식과 기술만을 습득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러 실제적인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과 텍스트를 통해서 다양한 간접 경험을 원하고, 그것이 내 사고에 혁신을 가져오며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의식적으로 그런 기대를 하지 않더라도 우린 그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모종의 실망감을 느끼게 마련이고, 그런 책에 대해서 평가절하를 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기대를 많이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그것은 학문분과의 세분화와 전문화의 탓 때문이기도 하고 무수한 관점들의 상대주의적 향연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의 어려움에서 오는 절망감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는 그러한 기대를 포기하고 기술적이고 정보파악용으로 책을 소비하게 요청하는 사회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카프카의 말처럼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독서경험을 하기 어려운 시대에 책읽기는 그 기대에서부터 기술적이고 정보수집에의 욕망으로 독서를 제한하는 독자의 습관이 유도될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러한 경향에 편승하여 질이 낮고 깊이가 없으며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볼거리로 가득찬 표피적인 텍스트들이 생산되고, 그러한 텍스트에 포위되어 질낮은 텍스트 경험이 또다시 텍스트와의 희열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를 양산하는 것이다. 리쾨르에 의하면, 의미와 의미작용은 이해를 위한 두 가지 단계다. 의미란 어떤 지시체(텍스트)로부터 오는 효과인데, 그런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지시체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의미를 독자 자신의 실존에 흡수시켜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텍스트의 생산과 유통의 장에서 독자들이 읽어주지 않는 텍스트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텍스트라고 하는 믿음이 팽배해 있다. 그 말이 진정 의미하는 바는 책이란 근원적으로 소통이라는 조건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으며, 상호소통되지 않은 텍스트의 가치는 적다는 뜻이리라. 그림에 떡이 아무리 맛깔나도 독자에게 가 닿지 못한 텍스트는 소용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텍스트의 소통가능성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 단 한 명의 독자도 읽어주지 않는다 해도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 텍스트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평가받지 못하고 읽히지도 않았으며, 저평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는 누군가의 피땀 어린 결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독자 없는 텍스트는 무의미하다는 말의 본뜻은 독자와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의미의 소통과 해석적 수용을 통한 의미의 재생산과 증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게다가 그 텍스트가 언젠가 어떤 독자를 만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언젠가 존재하게 될 그 독자를 위해서, 혹은 언젠가 독서행위를 통해서 조우하게 될 독자와의 만남을 위해서 그 텍스트는 의미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하다. 독해가능성의 미래적 지평은 그 책이 존재하는 한 항상 열려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텍스트 읽기의 습관은 또 있다. 그것을 단지 텍스트의 문제로 돌려 버리고 자기 삶과 사고로 끌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이야기나 영화 속의 허구와 상상으로 제한하며 그것을 나의 삶이나 지금 여기의 우리들의 삶의 지평으로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때 텍스트는 단지 시장의 상품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 삶을 얼마나 바꾸었는가가, 우리를 얼마나 가르쳤고 우리를 이끌어주었는가가 아니라 환금가능성과 부가가치(즉 돈)를 얼마나 생산해 냈는가로만 환원된다. 그래서 이야기의 질과 상관없이 관람객이 몇 명이었는지, 몇 권이 팔렸는지만이 중요하게 된다. 사실 텍스트의 문제에서 이러한 숫자놀음은 대단히 수상하고 문제가 많은 사고방식인데 오늘날에는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많이 팔린 텍스트가 양질의 텍스트라는 보장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작금의 사실이다. 그것이 팔렸거나 상영되었다고 그만큼의 이해와 소통을 창출했다고 하는 평가는 어디서도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일까? 텍스트는 언제부턴가 철저히 상품이 되었고, 나아가서 수치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일반화된 경향이라는 것도 지나친 진단만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결코 단순하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거기에는 삶의 이야기가 담긴다. 이야기들이 다루는 주제는 대단히 보편적인 것들이다. 그들의 삶이 아무리 특수하고 텍스트 속의 인물들이 매우 구체적이고 특징적이라 해도 그 안에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담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텍스트는 값어치가 떨어진다.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나며 우리 자신을 확장한다. 이 때의 확장이란 단지 기능과 정보가 확장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삶의 차원이 확대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타자와 소통하는 것이며 인생과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인물의 고뇌는 물론 인류 보편의 문제들, 삶과 우주의 문제가 담긴다. 그런데 아무리 그러한 텍스트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통찰하고, 숙고하고 그 얻어진 내용들을 살지 못한다면 그 텍스트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텍스트를 ‘보았는가’에만 집중한다. 그 텍스트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고, 그 텍스트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는 이야기되지-생각되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텍스트라는 말은 단지 작품을 영어로 바꾼 말이 아니다. 롤랑 바르트는 작품의 일의성과 저자의 의도중심적 독해를 불식하고 독자중심의 유희가능성의 지평을 열기 위해 텍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고 그것은 그런대로 성공했다. 즉 텍스트라는 용어에는 그것을 읽고 독해하며 수용하는 수동적인 독자 역할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향유하고 해석하면서 텍스트와의 유희를 벌이겠다는 의지적인 용법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텍스트라는 말은 범람하되 텍스트를 텍스트로 읽는 독법과 의지는 실종된 기현상이 횡행하고 있다. 다양한 독해가능성의 열림은 단지 무책임한 주관주의적 감상을 허용하고, 어떠한 소통의지도 없이 자기만 재미있으면 그뿐이라는 텍스트 수용의 닫힌 주체들을 양산하고 있다.

사실상 텍스트라는 용어의 본 취지에서 말하자면 특정한 문화 장르의 볼거리-읽을거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하는 모든 대상이 텍스트일 수 있다. 나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이 텍스트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텍스트로 구성해 낼 능력이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태를 경험하고 사고하겠다는 것을 일컫는다. 단순히 마주치는 사물을 흘려버리지 않고 그것을 나의 삶의 의미 있는 대상, 일부로 구성해 내겠다는 의지다. 모든 사물을 대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의 생각과 실존에 마주친(촉발된reconsile) 것들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타자와 사물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다.

그런데 텍스트를 읽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실 그 텍스트를 사는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텍스트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 삶과 텍스트는 결코 유리되어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텍스트에의 경험은 단지 두 시간 혹은 몇 시간 짜리 오락에 지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철학, 세계관, 그리고 숱한 인물 형상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인물들은 우리 자신이거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 혹은 내가 매일 대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텍스트의 우주란 바로 그러한 현상을 일컫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글 · 이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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