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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 이동권
[장윤미의 문화톡톡]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 이동권
  • 장윤미 (문화평론가)
  • 승인 2022.09.1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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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권을 뺏긴 사람들

이동권. 말 그대로 이동할 수 있는 권리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면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그리고 원하는 방식으로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동권은 신체 조건에 따라, 효율성에 따라, 그리고 권력에 따라 선택적·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첫 번째는 장애인의 경우다. 신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이동권은 사실 공염불이나 마찬가지다. 문을 열고 나가는 동시에 이동을 방해하는 것이 산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베이터 같은 대체 이동수단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관리가 잘 안된 경우 어쩔 수 없이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들여야 하는 시간과 체력소모는 외출을 포기할 만큼이나 지치는 일이다. 비장애인이라면 몇십 분이면 될 이동 거리도 장애인의 경우 두서너 시간 이상이 걸린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든 건 사람들의 비난과 비아냥에 가까운 시선이다. 비경제적인 당신 하나 사용하자고 아까운 내 세금이 축나고 있다는 비난부터 그 몸을 하고 뭐 하러 ‘기어’ 나왔냐는 존재 자체를 향한 상스러운 비아냥까지 견디려면 보통의 인내심이 아니고는 힘들다.

두 번째는 이동 수단이 없는 경우다. 빠르고 편리한 이동 수단은 대도시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집중되어 있다. 기차역이나 지하철역은 대부분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게 마련이고, 지하철이 갈 수 없는 곳에는 시내버스가 다닌다. 하지만 시내버스조차 지나지 않는 곳도 많은데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가 그렇고, 그 변두리에서도 한참 먼 시골이 그렇다. 한번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고, 하루에 몇 대 운행하지 않는 버스를 놓치기라도 하면 비싼 택시비를 치르거나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택시비만큼의 시간을 버려야 한다. 이동수단의 노선은 자본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어 소비가 없는 곳, 돈이 모이지 않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효율성을 이유로 이동권을 보장받기 어렵다.

세 번째는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경우다. 권력은 대개 종교나 정치의 형태를 띠는데 종교는 신의 명령이 곧 운명이라는 명분을, 정치는 다수 행복·공동체 유지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명분을 제시하며 합리화, 보편화한다. 이 권력을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강력한 통제와 억압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또 다른 권력을 통해 쉽게 전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제와 억압의 대상을 설정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나와 다른 무엇, 즉 타자 설정이다. 이를테면 남자/여자, 백인/유색인, 정상인/비정상인 등과 같은 방식 말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타자를 꼽으라면 단연 여성이다. 비단 한국문화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전통적으로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 남편이 없다면 아들 아래서 보호라는 형식으로 사는 공간, 활동 공간을 선택·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세상은 변했고, 여성해방은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와 정치를 이유로 여성들의 이동권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억압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권 국가들을 들 수 있다. 위급한 상황이나 긴급한 상황이라면 여성 혼자 다닐 수 있지 않으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병원에 여의사가 없다면 아기가 나오기 직전의 산모라도 여의사가 있는 다른 병원으로 가거나 길바닥에서 출산해야 하고, 부모나 가족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함께 갈 남자 보호자가 없다면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갈 수 없다. 죽을 만큼 아파도 남자 보호자가 없다면 택시를 탈 수도 병원에 갈 수도 없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가는 여성들이 일 년에도 수십 명에 달한다는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여자들의 이동권

‘위민 투 드라이브 운동’은 1990년 47명의 여성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 운전 금지법에 저항하며 일으킨 일종의 해방 운동이다. 이 운동이 시작되고 무려 27년이 지난 2017년에 드디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 운전 금지법이 해제되었다고 한다.

이 운동은 수많은 여성과 희생과 용기가 없었다면 마침표를 찍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위민투드라이브'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법은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 법이 일상과 개인의 인식 구석구석에까지 닿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소음은 각기 처한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기에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위민투드라이브운동에 참여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여성 마날 알 샤리프가 쓴 자서전 <위민 투드 라이브>는 여성이 아닌 개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고뇌, 그리고 운전으로 은유 되는 이동권,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를 향한 욕망을 담은 책이다.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했지만, 여자란 이유로 각종 폭력에 노출되는 현실에서 어린 마날은 울분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체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분노는 여성이 품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고 종교와 사회는 말한다. 감정은 표출했을 때만 죄악이 아니라 그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범죄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에게 폭력을 당할 때마다 마날의 느꼈던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이유 없는 반성은 사실 상상의 감정, 거짓된 감정일 뿐이란 걸 알게 된 것은 마날에게 불행이자 행운이었다.

종교와 권력의 억압은 단지 신체 억압만으로 끝나지 않는데 여자아이에서 여성으로 불리는 시기가 오면 이른바 “무감각의 세계”에 여성을 가두어버린다. 이를 “키드르”라고 하는데 여성은 감정이나 느낌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고 사람들 앞에서는 베일을 써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남자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기 소유의 여성을 통제해야 하 고, 여성은 이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엄격하게 차단해야 한다. 여성의 “무감각의 세계”로의 진입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거부는 곧 죽음의 다른 말일 뿐이다.

마날 역시 한때는 극단적 종교주의자가 되어 스스로 니캅을 두르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여자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그동안 자신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종교적 신념과 사회의 명령에 대해 의심한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그리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라는 종교적 가르침과 그림을 통해 알게 된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마날은 종교의 허구를 깨닫게 된다.

종교를 거부할 힘을 만들어준 첫 번째가 그림이라면, 두 번째 힘은 바로 세계 최대 규모 석유 회사인 아람코에 취직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자가 입사하려면 우선 임신하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했다. 아무리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회사라고 해도 여성은 회사 버스를 탈 수 없으며, 여성은 주택지원금이나 장학금 프로그램과 같은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회사에는 보육원이 있지만, 여자들은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게 되면 바로 퇴사해야 하니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마날은 실력 하나로 버티며 살아남는다. 그렇다고 좌절이 없던 것은 절대 아니다. 마날은 아람코 회사에 다니며 겪었던 것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사우디 여성으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뼛속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남성과 경쟁하고 싶다면 팔다리를 자른 상태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과 다름없었다.”

#위민 투 드라이브 운동

마날이 운전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른바 ‘아랍의 봄’이 봉기한 2011년이었다. 병원 진료를 본 후 택시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자 남자 보호자 없이 걸어가는 마날에게 남자들이 매춘부라며 야유를 보내거나 그녀를 끝까지 따라오며 모욕을 준다. 남성 보호자 없이 길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희열은 마날을 변화하도록 했다. 그녀를 가두는 건 돌을 던지며 비난하는 남자들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한 법규라는 것, 분노는 그들을 향할 것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의 부당한 법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마날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여기에 여성의 운전은 불법이 아니라 단지 편견과 관습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회사 동료의 말에 마날은 한껏 고무되었고, 여성도 원하면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고, 운전하는 건 범죄도 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도 아닌 그저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행위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물론 그녀의 파격적인 행동에 적극적으로 응원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걱정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 말로 마날을 말린다.

“조용히 지내세요.”

진심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협박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살아남고 싶다면 조용히 지내라는 말처럼.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마날은 더 크게 더 많이 외쳤다.

미친 여자라는 조롱은 필수였고 그로 인한 가족의 고통 역시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악습을 이용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그 피해자들을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운전하지 않았다면 평생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의 전부인 걸로 착각하며 살았을지도 몰랐던 그녀는 운전을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밖을 알게 되고 세계를 알게 된 이상 그녀는 핸들을 놓을 수 없었다.

단, 오분의 자유일지라도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알 샬랄 테마파크는 일주일에 한 하룻밤을 여성에게만 개방하는데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는 범퍼카라고 한다. 이 범퍼카를 타면 5분 동안 운전을 할 수 있는데, 갈 수 있는 거리라곤 기껏해야 왕복 1킬로가 될까 싶은 공간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운전할 때 그 설렘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짜릿한 자유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다음을 욕망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을까. 고작 5분 동안 빙빙 돌며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신이 나는데 내가 직접 운전해서 광활한 도로를 달린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동시에 밀려오는 생각은 장난감 차인 범퍼카는 되는데 왜 진짜 차는 안될까. 이 공간에서는 되는 왜 도로에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남자는 운전할 수 있는데 왜 나는 안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재미로 시작한 범퍼카 운전이 실존적 문제와 연결되는 것을 두고 너무 멀리 간다며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는 한 방울의 물로 시작된다.”라는 마날의 말처럼 문제의식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게 마련이다. 한 방울의 물이 안개로 흩어질지, 아니면 비가 될지, 그것도 아니면 폭풍우가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안개든, 비든, 폭풍우든 그것의 시작은 아주 작은 물 한 방울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건 다른 세계,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조금씩 변화하는 세계다. 다만, 지금보다는 더 진보된 세계로 말이다.

 

 

글 · 장윤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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