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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주의 시네마 크리티크] 의도적 거리두기와 동일시 - <불도저에 탄 소녀>
[송연주의 시네마 크리티크] 의도적 거리두기와 동일시 - <불도저에 탄 소녀>
  • 송연주(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15 14: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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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력한 제목과 포스터만큼, ‘불도저에 탄 소녀’ 구혜영(김혜윤)은 ‘쎈’ 인물이다. 그냥 ‘쎈’ 정도가 아니라 ‘울분’이 가득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분노가 태도에 배어있다. 오늘만 사는 듯, 혜영은 세상에 앙칼지게 덤벼든다. 너무 강력해서 보는 이들을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영화는 혜영을 다듬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불편한 시선들

오프닝에서 혜영은 법정에 서 있다. 학생 3인을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정황을 선고문으로 유추해 보면, 세 학생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다툼이 있었고, 아르바이트생을 보호하기 위해 세 학생을 먼저 때린 상황으로 보인다. 카메라는 이 법정 장면이 끝날 때까지 혜영의 표정을 가까이 담지 않고, 판사나 배심원이 앉을만한 위치에서 미디움 쇼트로 거리를 두고 혜영을 바라본다. 왼팔에 토시를 끼고, 삐딱하게 서 있는 혜영에게 선고는 계속된다.

 

“다수의 폭력에서 약자를 보호하려고 한 것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 학생을 먼저 때린 점,

정도는 미약하나 반복되는 폭행 전과는 반성의 여지가 있습니다.”

 

약자를 보호하려던 정의감에 우러난 행동이라 억울한 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혜영에게 고마워했을지도 모르지만, 혜영이 먼저 폭행을 한 것은 죄가 됐다. 선고문을 듣는 혜영은 담담하고, 살짝 건들거리는 느낌마저 있다. 판사는 그런 혜영을 향해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못한다. 폭력교정 수강명령과 직업수강 행정명령이 선고되고, 다음엔 선처가 없다는 판사의 경고가 이어지지만, 혜영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고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는다.

 

법원을 나온 혜영은 자신을 신고했던 세 명의 여학생을 곧바로 찾아간다. 왼팔에 꼈던 토시를 벗고, 세 학생에게 악바리처럼 달려가는 혜영. 가녀린 왼팔에는 용 문신이 크게 새겨져 있다. 혜영은 또 신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혼자서 세 명을 때리다가, 싸움에서 밀린다. 오히려 혜영이 맞게 되자, 가위를 찌를 듯이 들고 자신을 건들지 말라고 위협한다. 세 명의 여학생은 혜영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혜영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은 집과 사회에서도 계속된다. 혜영의 집은 ‘해적의 짬뽕’이다. 손님이 많은 중국집, 바쁜 상황에서, 아빠 구본진(박혁권)과 이모부는 계산을 도와주지 않는 혜영을 불편하게 본다. 아빠가 화상을 입고 치료하러 간 병원에서, 혜영은 병원비가 과도하게 청구되었다며 수납직원에게 따져 묻고, 수납직원은 그런 혜영을 불편하게 대한다. 건설기계운전기사 수업 강사도, 이 수업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여자가 할 만한 직업수강 과목으로 바꾸라고 권하다가, 혜영이 참견하지 말라며 쏘아붙이자 불편하게 본다. 법원의 직업수강 명령을 이행해야 하니 출근이 늦어질 거라는 혜영의 말에 햄버거 가게 사장은 혜영을 해고한다. 혜영은 해고당했으니 지금까지 일한 페이를 당장 달라며 요구한다. 사장은 당장은 줄 돈이 없다고 회피하는데, 혜영이 거친 태도로 공격하자 움츠러들고 바로 출금하러 간다. 영화는 이렇게 거친 혜영의 모습과 이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고, 관객을 그 불편한 시선에 동참시킨다. 혜영과 관객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붕대와 토시

혜영의 목표는 독립할 돈을 모아, 동생 혜적을 데리고 나가서 아빠와는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혜영과 혜적은 '방'이 없다. 중국집 2층 홀에 칸막이를 쳐서 '방'인 듯 물건을 쌓아둔 공간은 언제든지 칸막이를 열어 손님들이 식사하는 공간과 섞일 수 있다. 혜영의 눈에 비친 아빠는 중장비 회사에 다녔지만, 경마에 빠졌었고, 그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고, 자신이 어린 동생을 돌볼 수밖에 없게 한 사람, 혜영의 표현 그대로, "너나 똑바로 살아!"야 하는 인물이다. 중국집을 2층으로 증축해서 손님이 북적대지만, 아이들을 위한 '방'은 마련해주지 않은 아빠다. 게다가 언제 올지도 모를 행운에 집착하듯, 아빠의 지갑에는 낡은 복권들이 가득 끼워져 있고, 보험은 실효되었고, 아빠의 카드는 한도 초과다. 아빠는 혜영에게 '말빨'도 밀린다. 그런 아빠가 화상을 입고 왼팔에 붕대를 감게 된다. 혜영이 문신을 새긴 왼팔에 토시를 한 것처럼. 

 

붕대와 토시의 이미지는 유사하지만, 쓰임은 다르다. 토시는 평소 용 문신을 가려주고 혜영이 힘을 내야 하는 순간 벗을 수 있지만, 화상 입은 피부를 보호하는 붕대는 벗어버릴 수 없다. 이후, 토시를 제거한 혜영의 모습에서 '성장'을 읽을 수 있지만, 붕대는 아빠의 '죽음'과 연결된다. 

아빠는 이모부가 전해주는 최영환(오만석) 회장의 돈을 거절하려다 사고로 화상을 입었다. 중국집은 한국 중장비 최 회장의 땅에 올린 건물이다. 오랫동안 계약을 유지해주겠다는 최 회장의 말을 믿고 거액을 투자해 건물을 증축했는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최 회장은 약속을 깨버리고 계약서상으로는 계약이 끝났으니 가게를 그만 비워달라며 적은 돈을 건넨 것이다. 붕대를 감은 아빠는 타협하려 최 회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아빠의 제안 방법은 미숙했다. 권리금조차 받지 못한 채, 칼을 휘두르다 사람을 다치게 하고, 궁지에 몰린 아빠는 최 회장의 차를 훔쳐 달아나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교통사고 피해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혜영에게 합의금을 요구해오고, 아빠는 뇌사에 빠졌다. 최 회장은 계획대로 중국집을 빼앗으려 한다. 그러나 혜영은 아빠의 사고가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빠와 최 회장의 관계는 어땠는지 전혀 모른다. 처음부터 밝혀야 하고, 동생도 지켜야 한다.

 

 
아빠처럼, 아빠 그 이상으로

경찰의 수사는 늦고, 혜영은 스스로 사건을 추적한다. 아빠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혜영은 최영환 회장을 여러 번 찾아간다. 처음 혜영이 최 회장을 찾아갔을 때, 최 회장은 혜영에게 진실은 은폐하며 “어째 구본진이 같은 사람이 너 같은 딸을 낳았을까”라고 혜영이 착실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혜영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해가면서 최 회장에게 덤벼들 때, 최 회장은 혜영의 행동이 아빠와 닮았다고 비웃으며 “구본진이 딸이 맞긴 맞네.”라며 비아냥댄다. 이후 가위를 쥐고 최 회장에게 달려드는 혜영의 몸부림은, 칼을 들고 최 회장을 찾아가 절규하던 아빠의 모습과 의도적으로 교차편집 된다. 마치 혜영과 아빠를 동일시하듯이.

 

동일시는 비교를 거쳐, 아빠와 혜영의 차이를 부각한다. 아빠도 혜영도 최 회장에게 달려들었지만, 아빠는 졌고, 혜영은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모부는 혜영에게 그만하라고, 분수에 맞게 참고 살라고 설득한다. 최 회장이 주는 일거리로 먹고사는 이모부의 입장에서 혜영의 발악은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나 혜영은 최영환 회장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까지 찾아간다. 시민들에게 '신뢰'와 '정의'를 외치는 최 회장을 혜영은 어떻게 공격할까? 대중 앞에서 최 회장을 비난할까? 아니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호소할까? 혜영이 선택한 방법은 폭력이다. 법정에서의 첫 장면부터 영화 전체에 응축된 분노를 혜영은 혜영이답게 발산한다. 이 폭력으로 경찰에 연행되고, 풀려난 뒤에도 혜영은 멈추지 않는다. 더 강한 폭력으로 최 회장을 위협하고, 또 실패한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동생을 지켜야 하는 가장이 되고도, 혜영은 최 회장에게 지독하게 끝을 보여준다. 용 문신을 가린 토시를 벗고, 불도저에 오른다. 아빠는 타협과 계산, 헛된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혜영에게는 타협도 계산도 헛된 꿈 따위도 없다. 아빠는 힘 있는 사람의 거짓말에 속았지만, 혜영은 힘 있는 사람에게 속지 않고, 끝까지 따져 물으며 응징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아빠처럼 불도저를 타지만, 아빠 그 이상의 힘이 있다. 훗날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혜영의 마지막 외침은 지금까지 혜영을 불편하게 보았던 시선을 깨뜨려버리고 충격을 안겨준다. 영화는 이 지점을 위해서 혜영을 과도하게 울분에 찬 인물로 출발시키고, 혜영을 향해 불편해하는 시선을 의도적으로 배치하며, 그 시선에 관객이 동참하도록 거리를 둔 것 같다. ‘불도저에 탄 소녀’가 되는 혜영의 선택은 처음부터 그런 '혜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송연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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