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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 후의 두 여자 After Love, 2020> 상실과 치유의 여정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랑 후의 두 여자 After Love, 2020> 상실과 치유의 여정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2.09.15 09: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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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얼리즘 영화 : 키친-싱크부터 이슬람 여성까지

<사랑 후의 두 여자>는 파키스탄계 영국인인 알림 칸 Aleem Khan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알림 칸 감독은 BAFTA Gurud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자전적인 영화이며

메리(이슬람식 이름은 파히마)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온 것으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영감의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인터뷰에서 메리 역의 배우 조안나 스칼란Joanna Scanlan 역시 감독의 어머니를 직접 만난 후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동성애 설정도 십 대 시절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반영한 것이다. 태생적으로 이 영화는 다층적 문화 혼종 코드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기독교 국가에서 이슬람교도로 산다는 것, 영국에서 파키스탄계 이민자가 산다는 것,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디테일한 접근은 영국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스티븐 프리어스 Stephen Fears 감독의 파키스탄 이민자 이야기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My Beautiful Launderette,1985>의 한계를 극복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파키스탄계 영국인이 표현한 파키스탄 문화는 리얼리즘에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다. 50년대 영국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영향을 받은 영국 리얼리즘 영화에는 사회적 문제의식에 집중한 스티븐 프리어스 Stephen Fears 나 켄 로치 Ken Loach 영화, 그리고 ‘키친-싱크 리얼리즘 Kitchen-sink Realism’을 보여주는 마이크 리 Mike Leigh의 영화 등이 있다. <사랑 후의 두 여자>에는 이런 다양한 영국 리얼리즘 경향이 고른 스펙트럼으로 펼쳐져 있다. ‘사랑’과 ‘상실’이라는 멜로드라마 서사에 이민자와 이슬람 여성, 동성애 등 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음각되어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도 상징적인 의도가 느껴지는 키친-싱크에서 시작한다.

 

두 잔의 차에 담은 의미들 meanings : 사랑과 상실 그리고 남편의 시뮬라크르

꼼꼼하게 배치된 세트와 연기자 동선, 거의 움직이지 않는 긴장감을 주는 키친-싱크 롱테이크 쇼트 long take shot로 시작한다. 이슬람 세례식에서 돌아온 부부의 잔잔한 일상이 무심하게 전개된다. 카메라 전경에 있는 메리는 부엌과 싱크대를 오가며 남편과 자신을 위한 두 잔의 차를 준비한다. 이 영화에는 두 잔의 차가 두 번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남편의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 일상과 변화를 함축한다. 두 잔의 차는 남편과 마시던 차에서 홀로 마셔야 하는 차가 되고, 영국에 있는 자신의 부엌을 채우던 평화로운 일상 속 차 에서 프랑스 어느 허름한 숙박업소에서 마시는 번민 가득한 차가 된다. 한 잔의 차만 만들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닫는 순간 비로소 남편의 죽음과 외롭고 고립된 자기 모습, 남편의 비밀스러운 연인을 만나야 한다는 현실을 각성한다. 이렇게 두 잔의 차는 그녀의 안온한 결혼생활과 상실, 그리고 남편의 배신에 대한 당황스러운 현실 등 여러 가지 소소한 의미들 meanings를 내포한다. 메리가 의식처럼 차를 준비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는 롱테이크 화면의 후경은 남편의 공간이다. 거실문에 가려진 남편은 문 저쪽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의 얼굴은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 잠깐 볼 수 있거나, 음성메시지를 통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파키스탄 이슬람 남성 가부장의 존재감은 부연하지 않아도 익히 강력한 가부장의 상징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만들어내는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의 개념을 빌자면,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시뮬라크르simulacre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 시뮬라크르는 원존재보다 더 존재감이 있어 사후에 모든 비밀이 드러나도록 이끄는 강력한 시뮬라시옹 simulation으로 작용한다. 그는 사실상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의 중심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가지고 영화를 이끄는 대단한 가부장이다. 그는 죽음(부재)으로써 비밀을 드러내고, 시뮬라시옹으로 영화를 이끈다. 그의 사후에 남겨진 그를 사랑하는 두 여자와 아들이 갈등하고 연대하는 보이지 않는 힘은 첫 장면의 폐쇄된 멜로드라마 키친-싱크 공간에서 시작하여 그가 살아생전 선장으로 일하던 도버해협을 가로질러 또 다른 연인이 살고 있는 프랑스까지 도달하며 도버 백악 절벽을 가로지른다.

 

도버 백악 절벽 : 마음의 풍경 그리고 메타포

 

도버 백악 절벽 White Cliffs of Dover 과 메리
도버 백악 절벽 White Cliffs of Dover 과 메리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에 연이은 다음 장면은 백악절벽처럼 하얗게 차도르를 입고 화면 중간에 앉아 있는 메리의 모습이다. 이 장면은 영화 포스터에서 사용되어 인상 깊은 아우라를 보여주고 있는데, 메리가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감정도 표정도 행동까지 모두 미니멀하다. 소파 양옆의 지인들은 눈물을 흘리고 울지만, 그녀는 그저 앉아있을 뿐이다. 그녀는 영국인이지만 사랑하는 파키스탄계 영국인인 남편을 따라 이슬람교도로 개종하였다. 아이를 먼저 보내고 가슴에 품고 살며 오랜 결혼 생활을 남편 사랑 하나만 보며 살아냈다. 그런데 이제 그 남편조차 떠났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눈물도 보이지 못한다. 메리는 남편 아메드의 유품 정리 중 그의 지갑에서 어느 프랑스 여인의 신분증을 발견한다. 급기야 남편의 전화기에서 다정한 문자까지 보게 되자 손끝이 떨린다. 그녀의 절제된 감정은 이 정도가 최대치다. 영화는 폐쇄된 메리의 거실에서 시작하여 광활하게 열린 바닷가 절벽으로 이어진다. 흰 절벽을 틸트업 tilt up 해서 메리 얼굴까지 올라가는 절벽 장면은 절벽과 메리가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하나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메리는 이 절벽에서 남편이 남긴 음성메시지를 반복해서 듣는다. 메리를 걱정하며 절벽 끝에 서서 기다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메시지는 사실 메리가 절벽 밖의 세상으로 나오지 말라는 암시다. 남편 아메드는 도버 해협 저편에 자기 주도적이고 독립적이며 서구적인 프랑스 여성과 아들을 두고 있었고, 메리와는 이슬람식 가부장적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메리는 마침내 남편을 기다리던 절벽에서 바라본 도버 해협을 건너기로 한다. 메리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는 여정에는 도버해협 백안 절벽이 펼쳐진다. 메리의 공간은 점차 확장된다. 부엌에서 거실, 거실에서 절벽, 절벽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절벽 이쪽에서 자신이 서 있던 절벽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너지는 절벽을 마주한다. 메리의 시선인 주관적 시점에서 무너지는 절벽이나 회벽 천장 등 불쑥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현실적인 ‘메리의 감정’은 주관적인 쇼트라는 영화적 장치 없이 천연덕스럽게 나타난다. 메리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감독은 위의 인터뷰에서 절벽에 부는 바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파도의 리듬 그리고 새들까지도 감정을 부여하고 영화 전체를 압축하여 상징하는 캐릭터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 음악 앨범 (Chris Roe)
영화 음악 앨범 (Chris Roe)

이 절벽은 타이틀곡 ‘절벽 The Cliffs’과 ‘균열 Cracks’(크리스 로Chris Roe)의 강렬한 첼로와 바이올린 현악기 앙상블로 마음을 긁는 듯 드라마틱하게 표현된다. 메리 마음 풍경이 고스란히 표현된 완성도 높은 미장센이다. 이 절벽은 녹색과 흰색 그리고 푸른색으로 구성되는데, 녹색 초원과 흰색 절벽 그리고 푸른 파도는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강렬한 메타포가 된다. 메리에게 절벽은 항해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이 될 ‘기다림’의 절벽이며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된 후에는 무너지는 ‘가슴‘이며 남편에게는 아내가 절벽 끝에 서지 말아 달라는 다정한 애정이 담긴 ‘우려’의 절벽이다. 이 절벽의 의미는 이렇듯 중층적 의미를 가지고 점차 넓고 강력해지는 점강법으로 펼쳐지다가 대미에는 남은 세 사람이 새로운 대안관계로 통합되는 ‘품는’ 절벽이 된다. 메리의 강인하고 따뜻한 모성처럼. 그래서 세 가지 색을 모두 품은 절벽은 이제 하얀 절벽같이 앉아있던 ‘하얀‘메리에서 남편을 꼭 닮은 쥬느의 아들 솔로몬에게까지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 세 명은 다른 국적, 다른 세대, 다른 피부색이고 부재하는 시뮬라크르, 아메드로 인해 얽힌 기막힌 인연들이지만 이제 서로 각각의 색과 개성을 살려 더 아름다워지는 태피스트리가 되어간다.

 

석양 속 절벽 위 초원을 걷는 메리와 쥬느
석양 속 절벽 위 초원을 걷는 메리와 쥬느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의 부드러운 햇살 속에 절벽 위 초원을 걷는 메리와 쥬느 그리고 솔로몬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결핍과 상실을 가진 세 사람의 성장과 치유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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